성해나, <기념>
현대 사회를 직역하자면, 대관절(大關節)의 시대다. “결론부터”, “요점만”, “긴 말 말고.” 쇼츠와 AI가 대표하는 것은 속도가 아니라 편집된 인과다. 누군가가 잘라 붙인 원인과 결과가 자연스러운 흐름처럼 유통되고, 사람은 그 리듬에 길들여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사회와 기관이 편집한 서사에 맞추어, 가족조차 ‘이상적으로’ 보여야만 한다. 대관절의 시대가 가족에게까지 번진다.
성해나의 <기념>이 흥미로운 지점은, ‘대관절 가족이다’ 같은 표어를 보여주는 대신 ‘나’(하나)의 가족 서사와 각자의 개인 서사를 끌어와 그 구조를 흔든다는 데 있다. 이 소설의 가족은 가족의 형태가 갖추어졌을 때보다 붕괴 이후가 더 오래 지속된 가족이다. 말하자면 유효기간이 만료된 뒤의 삶이 더 길게 남아버린 가족. 스위트룸에 모인 네 인물은 그 잔여를 들고 앉아 서로를 확인한다. 휴거와 기도원, 자성의 과격시위와 ‘나’의 불륜 같은 사건들이 드러날수록 질문은 선명해진다. 이들은 가족인가.
이 질문의 한 갈래 답은 미시마 유키오의 <목숨을 팝니다>에서 더 노골적으로 확인된다. 하니오가 펼친 신문의 활자가 바퀴벌레가 되어 흩어지는 장면은, ‘정상’이라는 말로 봉합되지 않는 공백을 드러낸다. 가족과 정상이라는 두 단어로는 삶을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이, 언어 자체를 벌레로 만든다. 그래서 하니오는 목숨을 팔고 죽기로 결심한다. 누가 칼을 들고 협박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한동안 “누칼협”이라는 말이 유행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기념>을 읽고 나니 이처럼 쓰기 좋은 시대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와 기관은 노동-가정-육아를 ‘정상’의 범주에 몰아넣고 개인에게 요구한다. 하지만 개인은 쇼츠나 AI가 아니다. 삶은 편집과 가공처럼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고, 각자의 사정이 그 자체로 인과가 된다. 그럼에도 ‘정상’이라는 정형에 의탁하라고, 보이지 않는 칼을 들이미는 구조가 있다. MZ세대부터 ‘쉬었음 청년’까지, 그 범주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비판의 시선을 갖게 된다. 비판이 과격해서가 아니라, 구조가 먼저 칼을 닮았기 때문이다.
성해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대관절 가족’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작중 인물들은 누가 칼을 들고 협박하지 않더라도 각자의 삶을 선택하고, 그 선택을 감당하며 살아간다. 물론 그것이 가족 붕괴와 관계 균열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하니오가 “죽을 결심”을 통해서야 삶을 생각할 수 있었던 것처럼, 소설은 가족이라는 단어가 만들어내는 형평성의 허들을 낮춘다. ‘가족이니까’라는 문장으로 뭉개온 것들—특히 사건의 인과(기도원)를 잊은 채 오지랖처럼 ‘대관절 가족’을 요구하는 시선—을 다시 의심하게 만든다.
누가 칼을 들고 협박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종종 칼을 본 것처럼 움직인다. <기념>은 그 착각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가족의 이름으로 강요되는 정상의 문장을 낯설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