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치스 국립공원
살면서 수없이 노을 진 하늘을 봤다.
내가 몇 년 전에 살 던 아파트에서는 저녁을 짓다 보면 주방베란다로 붉은 노을빛이 들어오곤 했다.
밥 냄새와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노을빛은 피곤에 찌든 저녁 일과에서 안도감을 줬다.
사실 여행을 하다 보면 평소보다 무리하게 된다. 평소에 관심이 없던 곳도 한 번 가보게 되고, 일출이나 일몰보기 같은 특별한 일정을 넣기도 하고, 미국이니 한 번에 900킬로를 운전하기도 한다.
18일간의 여행에서 모압지역은 마지막 여행지였다. 그러니 다들 많이 지쳐있었다.
남편은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데블스 가든은 가야 한다, 아들은 어려서 그런지 팔팔하게 아무 곳이고 다 갈 수 있다, 나는 일출이랑 일몰은 봐야겠다, 딸은 사실 도시 파라 이런 곳은 그다지 관심 없으니 가자는 대로 가준다.
“델리케이트 아치에서 석양을 보고 메사 아치에서 일출 보자! “
“둘 다? “
“언제 또 오겠어?”
남편의 언제 또 오겠어와 나의 언제 또 오겠어가 합쳐진 이번 여행은 점점 난이도 상이 돼서 이젠 6시간 하이킹을 하지 않으면 이상한 느낌이 들 지경이 됐다.
“왜 이렇게 일출을 좋아해? 겨울에 브라이스 캐년에서도 일출 봤잖아!”
“거긴 거기고 여긴 여기고. 그땐 겨울이고 지금은 여름이고."
남편의 ‘언제 또 오겠어’였던 데블스 가든에 갔다. 해가 저무는 4시에 하이킹을 시작해서 절반만 돌았다. 4시에는 해가 기울어 핀이 그늘을 만들어서 걷기 많이 힘들진 않았다. 그다음에 델리케이트 아치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숙소에서 만들어 온 계란 소시지 덮밥을 차에서 대충 먹고 델리키트 아치로 갔다.
하이킹을 시작한 시간은 7시. 해가 넘어갈 때까지 시간이 넉넉하다고 생각했다.
델리케이트 아치는 겨우 편도 2.4 킬로미터라고 해서 가볍게 생각했다. 그런데 바위를 넘고 또 넘어도 아치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해가 기우는 건 보이고 아치는 안 보이고 마음이 급해져서 뛰다시피 걸었다. 40분 동안 성큼성큼 걸었더니 드디어 아치가 보였다.
여행 내내 하이킹을 하도 해서 그런지 40분 정도는 바위를 뛰어다녀도 거뜬했다. 심지어 아이들은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며 바위를 뛰어 올라와도 힘든 기색도 없었다.
거대한 델리케이트 아치 사방으로 원형극장처럼 앉을 수 있는 바위가 빙 둘러져있었다.
이 모든 것이 자연이 만든 건지 아니면 앉기 편한 이 바위는 사람이 만든 건지.
그 거대함에 잠시 멍해졌다.
델리케이트 아치에서 사진을 찍는 데는 나름 룰이 있었다.
아치 뒤로 길게 줄을 서서 차례가 오면 사진을 찍는데 몇 컷 찍고 다음 사람을 위해 얼른 빠져야 했다. 그러면 다음 사람이 달려가 사진을 찍는다. 이곳을 사진 아치라고 불러도 될 것 같았다.
모두 카메라를 들고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으니.
나도 델리케이트 아치를 사진 아치로 만든 사람 중 하나였지만.
아치에 서서 뒤를 돌아보니 깊게 파인 협곡 때문에 아찔했다. 사방이 뚫린 곳이라 바람이 불어대는데 이러다가 떨어지면 사막에서 비명횡사하게 생겼다. 사진을 기다리는 사람들만 아니면 그래도 협곡 아래를 내려보고 싶었지만 여기는 '개인사진'을 찍으려고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곳이라 그런 행동은 비매너였다.
여기는 완전히 '사진 아치'였다.
아치 주변은 원형극장처럼 앉기 편한 계단형의 지층이 둘러져 있었다.
일부러 조성한 것인지 자연적으로 그렇게 깎인 것인지 모르겠다.
역시 사암이 갈린 모래들 때문에 조심히 걷지 않으면 미끄러져서 다칠 수 있었다.
모압 지역은 바위 위 모래가 제일 장애물이다.
하지만 물 잔 위에 나뭇잎을 올려서 물에 체하지 않게 줬다는 이야기처럼 모래 때문에 더 빨리 걸을 수도 있는데 속도를 줄일 수 있다니 그걸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치는 멀리서 봐도 거대했다. 정면에서 봐도 왼쪽에서 봐도 아무리 봐도 이런 구조물을 자연이 깎았다는 게 신기했다. 소금덩어리와, 퇴적의 압력과, 비와, 바람의 합작물.
데블스 가든에 있는 랜드스케이프 아치는 불과 1991년 1월에 무너졌으니, 이 아치도 바람에 깎이면서 점점 얇아지다가 언젠가는 사라질 거다. 인간이 가늠할 수 없는 미래 언젠가.
해가 캐년 뒤로 넘어가고 사람들도 하나 둘 자리를 떴다. 8시 20분. 해도 거의 저물어서 이제 아치를 내려가기로 했다. 걷는 중에 해가 점점 넘어갔다. 달빛이 이렇게 밝았던가? 키 큰 나무가 없는 곳이라 달빛이 발걸음을 지켜줬다.
세상이 캄캄해져서 발 앞도 잘 보이지 않을 때는 귀에 의존하게 된다.
눈으로 즉각적으로 들어와 판단하던 시선이 거두니 귀에서 뇌를 거쳐 발 한걸음을 옮길 때까지 그 한걸음을 의식하게 됐다.
해가 지니 밤의 동물들이 나왔다. 검지 손가락만 한 박쥐들이 내 머리를 스쳐 날아갔다. 찌르르 찌르르 귀뚜라미 소리도 들렸다. 사박사박 모래를 밟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와 소리를 죽여 이야기하고 웃는 소리도 들렸다.
눈으로 먼저 사물을 보는 낮의 시간과는 달리 어둠 속에서는 귀가 예민해졌다. 해가 더 져버리자 사람들은 휴대폰 불에 의존해 걸었지만 나는 웬만하면 달빛에 의존하고 싶었다. 그렇게 칠흑 같은 어둠도 아니었으므로.
그랜드 테턴 이나 글래시어에서 이 시간에 산을 돌아다니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이었다. 이렇게 캄캄한 사막을 걷는 건 호사스러운 일이다.
하산하는 데는 20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