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수상자가 밝힌, 황당한 테마주가 생기는 이유

feat. 로버트 실러,《내러티브 경제학》

by 머니맥락

숫자가 아닌 스토리가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민낯

이성적인 시장은 없다, 오직 ‘이야기’가 있을 뿐

주식 시장은 흔히 자본주의의 꽃이자, 기업의 가치를 가장 정교하게 반영하는 이성적인 집합체로 여겨집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효율적 시장 가설에 따르면 주가는 이용 가능한 모든 정보를 즉각적으로 반영하며, 따라서 투자자들은 합리적인 판단 하에 움직인다고 가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을 목격하곤 합니다.

가장 대표적이고 황당한 사례로 2022년 9월, 제11호 태풍 ‘노루(NORU)’가 북상했을 때의 일을 꼽을 수 있습니다. 당시 태풍이 접근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주식 시장에서는 뜬금없이 ‘노루페인트’의 주가가 급등하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태풍의 이름이 ‘노루’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페인트 제조 회사인 노루페인트가 관련주로 묶인 것입니다. 페인트 회사가 태풍과 무슨 상관이 있어서 기업 가치가 올라간 것일까요? 태풍이 불면 페인트가 더 많이 팔리기라도 하는 것일까요? 물론 아무런 논리적 연관성은 없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자연재해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선거철만 되면 특정 정치인과 같은 대학 동문이라거나, 본가가 같은 지역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파산 직전의 회사 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정치 테마주’ 역시 우리 시장의 고질적인 현상입니다. 도대체 왜 투자자들은 이토록 말도 안 되는 이유에 소중한 자산을 베팅하는 것일까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실러(Robert Shiller) 교수는 그의 저서 《내러티브 경제학(Narrative Economics)》을 통해 이러한 현상을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그는 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차가운 수식이 아니라, 사람들의 입을 타고 전염병처럼 번지는 ‘이야기(Narrative)’, 즉 내러티브라고 주장합니다. 오늘 우리는 실러의 통찰을 빌려, 도대체 왜 태풍 소식에 페인트 주가가 오르는지,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인간의 심리는 무엇인지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진실보다 강력한 ‘그럴싸함’, 뇌를 파고드는 경제 전염병

전염병처럼 번지는 이야기의 힘, 내러티브 경제학

로버트 실러는 경제적 사건이 발생하고 변동하는 주된 원인으로 ‘전염성 있는 이야기’를 지목합니다. 그는 바이러스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오가며 전염병을 일으키듯, 경제적 내러티브 역시 대중의 심리를 파고들어 집단행동을 유발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의 ‘진실 여부’나 ‘논리적 타당성’이 아닙니다. 그 이야기가 얼마나 흥미롭고, 기억하기 쉬우며, 남에게 전파하기 좋은가가 핵심입니다.

2022년의 ‘태풍 노루와 노루페인트’ 사례는 내러티브가 어떻게 형성되고 전파되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예시입니다. ‘태풍 노루가 온다’는 자연현상은 대중의 관심을 한순간에 사로잡는 강력한 뉴스입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 강력한 키워드와 연결될만한 대상을 찾기 시작합니다. 이때 ‘노루’라는 동음이의어를 가진 ‘노루페인트’는 대중의 뇌리에 즉각적으로 꽂히는 소재가 됩니다. “야, 태풍 노루 온다니까 노루페인트 오르는 거 아니냐?”라는 농담 섞인 이야기는 메신저와 커뮤니티를 통해 순식간에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갑니다.

이처럼 자연현상은 그 자체로 강력한 내러티브의 씨앗이 됩니다. 사람들은 복잡한 재무제표나 거시경제 분석보다는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이야기에 더 쉽게 반응합니다. 사람들이 비합리적으로 주가가 급등락 하는 상황에 뛰어드는 건 그들이 바보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이 인간의 타고난 심리적 메커니즘이자, 이야기를 소비하고 전파하려는 본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가를 움직인 것은 태풍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소재로 만들어진 ‘그럴싸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집단 심리에 전염된 결과인 것입니다.






생존 본능이 투자 판단으로 오작동하는 순간

감정 휴리스틱: 두려움은 어떻게 투기로 변질되는가

그렇다면 왜 하필 태풍이나 지진 같은 자연재해나 충격적인 사건들이 주가 급등락의 재료가 되는 것일까요? 로버트 실러는 인간에게 존재하는 ‘감정 휴리스틱(Affect Heuristic)’ 메커니즘을 통해 이를 설명합니다. 휴리스틱이란 복잡한 과제를 해결할 때 논리적인 추론보다는 직관이나 감정에 의존해 빠르게 판단하려는 뇌의 성향을 말합니다.

자연재해는 인간에게 근원적인 공포와 두려움이라는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태풍이 몰려온다는 소식은 생존 본능을 자극하고, 사람들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듭니다. 이렇게 고조된 감정 상태는 합리적인 사고를 방해하고, 그 감정을 전혀 무관한 경제 영역으로까지 확대 적용하게 만듭니다. 심리학적으로 흥분 상태나 공포 상태에 있는 사람은 평소보다 위험을 감수하는 성향이 높아지거나, 반대로 극도로 회피하는 성향을 보입니다.

‘노루’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느끼는 태풍에 대한 긴장감과 주목도는 뇌 속에서 오류를 일으켜, 같은 이름을 가진 주식 종목에 대한 관심으로 전이됩니다. 뇌는 ‘노루(태풍)’에 대한 감정적 반응을 ‘노루(주식)’에 대한 투자 신호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는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지만, 감정적으로는 매우 자연스러운 연결고리입니다. 투자자들은 기업의 실적을 냉철하게 분석하기보다는, 현재 자신의 감정을 지배하고 있는 그 ‘단어’와 연결된 주식을 매수함으로써 심리적 해소를 경험하려 합니다.






펀더멘털을 압도하는 눈치 게임, 그리고 군중의 욕망

케인즈의 미인대회와 증폭되는 변동성

이러한 비합리적인 현상을 더욱 증폭시키는 것은 타인의 행동을 예측하려는 투자자들의 심리입니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는 일찍이 “주식 시장은 장기적으로는 펀더멘털을 반영하지만, 단기적으로는 미인대회처럼 작용한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신문 속 미인 사진 100장 중 가장 예쁜 사람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가장 예쁘다고 찍을 것 같은 사람’을 골라야 상금을 받는 대회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황당한 테마주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투자자들 중 상당수는 노루페인트가 태풍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불합리한 이유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그 주식을 매수할 것이라고 예측된다면, 나 역시 수익을 위해 추격 매수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건 말도 안 돼”라고 생각하면서도 “남들이 사니까 오르겠지”라는 생각으로 매수 버튼을 누르는 것입니다.

여기에 ‘포모(FOMO)’가 기름을 붓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돈을 벌고 있는 모습을 보고 추격 매수하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결국 펀더멘털과 무관하게, 타인의 행동에 대한 예측과 눈치 싸움이 주가의 변동성을 극단적으로 증폭시킵니다. 주가가 급락할 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기업 가치는 변한 게 없지만, 남들이 투매할 것이라는 공포가 전염되면 너도나도 주식을 던지게 되고 하락 폭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소음과 신호를 구분하는 용기, 역발상의 미학

투기의 끝과 현명한 투자자의 자세

하지만 실러가 경고하듯, 실체 없이 내러티브만으로 쌓아 올린 주가는 모래성과 같습니다. 미인대회의 열기가 식고 나면 사람들은 다시 냉정을 되찾습니다. 태풍이 소멸하고 나면 ‘노루’라는 키워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식어버리고, 바이러스처럼 퍼졌던 이야기는 힘을 잃습니다. 전염병이 정점을 찍고 사라지듯, 테마주의 열풍도 순식간에 사그라듭니다. 뒤늦게 군중심리에 휩쓸려 고점에 진입한 투자자들은 주가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참담한 손실을 떠안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같은 개인 투자자들은 이러한 광기의 심리 극장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로버트 실러의 이론을 역으로 이용한다면, 우리는 군중심리에 휩쓸리지 않는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현명한 투자자라면 주가가 급등락 할 때 그 원인이 ‘펀더멘털’의 변화인지, 아니면 일시적인 ‘내러티브’의 전염인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유 없이 주가가 급등할 때, 그것이 단지 재미있는 이야기와 미인대회식 투기 심리에 의한 것임을 인지한다면 우리는 추격 매수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시장이 비합리적인 공포에 질려 우량한 기업의 주식을 투매할 때, 이를 저가 매수의 기회로 삼는 역발상 투자가 가능해집니다. 내러티브가 지배하는 단기적인 소음 속에서 중심을 잡는 것, 그것이 바로 투기의 유혹을 이겨내고 투자의 본질을 지키는 길입니다.






광기의 파도 위에서 중심을 잡는 법

내러티브를 읽되, 내러티브에 먹히지 말라

지금까지 로버트 실러의 《내러티브 경제학》과 케인즈의 통찰을 통해 태풍 노루와 노루페인트 급등 같은 황당한 테마주 현상의 이면을 살펴보았습니다. 주식 시장은 차가운 숫자의 세계인 동시에, 뜨거운 인간의 감정과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유기체입니다. 자연현상은 인간의 감정 휴리스틱을 자극하고, 미인대회식 눈치 게임을 유발하여 주가를 요동치게 만듭니다.

우리가 이러한 메커니즘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시장을 비웃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장의 광기로부터 내 자산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앞으로도 제2의 태풍 노루, 제3의 정치 테마주는 계속해서 등장할 것입니다. 그때마다 시장에는 그럴싸한 스토리가 퍼지고, FOMO와 공포가 투자자들을 시험에 들게 할 것입니다.

현명한 투자자는 내러티브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내러티브의 속성을 꿰뚫어 보는 사람입니다. 모두가 이야기에 취해 달려갈 때, 잠시 멈춰 서서 “이것은 단지 전염되는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냉철함이 필요합니다. 불합리한 이유로 주가가 춤을 출 때, 군중과 반대편에 설 수 있는 용기야말로 소음 가득한 시장에서 살아남는 가장 확실한 무기가 될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내러티브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그 이야기는 사실인가요, 아니면 그저 전염된 감정인가요? 선택은 당신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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