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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치 Apr 26. 2024

롤러스케이트 타는 소녀

 어린 시절이 갑자기 생각났다. 정확히는 7살 색동유치원을 다니던 소녀가 생각났다. 소녀는 키가 컸고, 통통했다. 그날은 날씨가 화창했다. 그 소녀는 유치원에서 장기자랑을 하기 위해 예쁜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검은색 반 양말을 신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예쁜 원피스였다. 풍성한 하얀 천에 레이스가 돋보이는 원피스였다. 원피스를 입은 소녀는 나다. 나는 그 옷을 벗고 싶지 않았다.

 유치원이 끝나고 집에 와서 갑자기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싶었다.


하얀 원피스에 무릎보호대를 차고 호기롭게 롤러스케이트를 꺼내 들었다. 그 시절 나는 오랜 시간 집에 혼자 있었고, 그게 싫었던 것 같다. 장기자랑을 한다고 유치원 선생님이 예쁘게 머리도 해주고, 화장도 해줬었다. 그 모습을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아마 정확히는 “예쁘다, 우리 딸”이라는 말을 듣고 싶었겠지만 말이다.


 롤러스케이트를 썩 잘 타지 못했음에도 엄마를 만나러 30분 거리의 엄마 직장으로 향했다. 처음 시작은 정말 상쾌했다. 파란 하늘 둥둥 떠다니는 구름들이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보다 길은 험난했고, 자동차는 골목골목 가득해서 피해서 가는 게 힘들었다.


 안절부절못하면서도 ‘할 수 있어. 갈 수 있어.’라고 용기를 불어넣었고, 7살 소녀는 꿋꿋했으며, 해 낼 것이라고 자부했다. 소녀의 짧은 7년간의 삶은 자신의 능력을 판단하기에는 어설펐다. 자전거가 휙-하고 소녀의 옆을 지나갔고, 그만 앞으로 슬라이딩을 하며 넘어졌다.


고 넘어지며 손바닥과 종아리가 쓸렸다. 예쁜 치마에 검댕이 묻었다. 옆에 있던 늙은 트럭 옆으로 쓰러졌고, 하필 그 옆이 하수구였다. 이상한 냄새와 따끔따끔 거리고 축축한 아픔이 휘몰아쳤다. 원피스는 망가졌고, 무릎을 보호한다던 무릎보호대는 정말 무릎만 보호했고, 다른 곳은 보호해주지 못했다. 팔 한쪽에 피를 철철 흘리고, 손바닥은 쓰린데, 일어나야 했다.      


‘집으로 돌아갈까, 엄마에게 갈까?’ 고민했다.      


 엄마에게 가는 것을 선택했다. 엉망이 된 상태였지만 트럭을 잡고 일어났다.

마에게 가는 마지막 신호등 앞에 섰다. 하늘은 여전히 맑았고, 사람들은 나를 구경했다. 나는 롤러스케이트를 타서 키가 커져 있었고, 넘어지면서 온몸에 근육이 놀라 뻐근했다. 하얀 레이스에 눌어붙은 핏자국, 서러움, 줄줄 흘러내리는 검은 마스카라, 삐걱거리면서 타고 있는 롤러스케이트 그 무엇도 정상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결국에는 엄마를 만났고, 엄마를 보는 순간 눈물이 터졌다.      


 

여기까지가 나의 기억이다. 20년도 더 된 기억임에도 이렇게 선명하게 생각나는 기억은 별로 없다. 어린 시절 내가 얼마나 서로웠으면 지금도 그 서러운 감정이 내게 녹아있을까?


심지어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한 적도 없다.


보통 기억은 누군가와 추억하며 되새겨지고, 기억이 선명해지는데 나는 누구와도 이야기를 한적 없음에도 선명하다. 아마 강렬했기 때문이겠지.


7살 소녀에게 롤러스케이트는 도전이었고, 예쁜 원피스는 자랑이었고, 그날의 날씨는 시련이었다. 도전에 실패했고, 원피스는 망가졌다. 상처 났고, 눈물을 흘렸다. 그날의 시련은 맑은 날씨로 왔다. 돌이켜보면 비가 오고, 눈이 오고 하는 날보다 맑은 날이 더 많다. 따지고 보면 시련은 맑은 날에 올 확률이 더 크다. 날씨가 참 좋네요.라고 말하면 오늘도 시련은 오니까 즐겨요.라고 말하고 싶다. 7살 소녀가 꿋꿋이 롤러스케이트를 벗지 않고, 달린 것은 목표가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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