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모은다는 것은 사업에 있어 중요합니다. 오롯이 자신이 번 돈만으로 사업을 해야 한다면, 현재의 수많은 글로벌 기업이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수많은 제품과 서비스는 그저 상상 속에만 존재했을 게 분명합니다.
돈을 모은다는 것을 우리는 펀딩(Funding)이라고 합니다. 문명의 역사만큼 펀딩의 역사는 깊고, 따라서 가다듬어진 방식이 존재합니다. 주식(Equity), 채권(Debt), 혹은 메자닌 증권(Mazzanine Security)을 발행하는 것이죠. 그리고 각 증권은 수 십 가지의 종류가 있습니다. 다양한 조건이 해당 증권에 붙어 있어 다양한 경우에 대응합니다.
ICO(Initial Coin Offering)은 분명 변곡점입니다. 크라우드 펀딩이 확산되고 있는 시기에 ICO는 좀 더 쉽고, 좀 더 광범위하게 자금을 모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ICO는 블록체인 비즈니스라는 '핫한' 아이템과 엮이면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프로그램으로 짜인 규칙대로 진행되는 ICO는 나의 투자가 부지불식 간 희석되거나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를 사그라들게 했죠. (물론, 비즈니스가 아닌 투자 지분에 대한 경우에 한해서)
ICO가 등장함으로써 (물론 크라우드 펀딩에서도 가능은 했지만) 일반 대중은 새롭고(?) 트렌디한(!) 사업에 투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제 어마어마한 돈이 투자되었죠. 여기에 벤처캐피털(VC)이 등장합니다.
"VC가 독점하던 스타트업 투자 시장에 모두가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VC는 자본의 크기를 이용해 남들은 누리지 못했던 특혜를 누리고 있었던 것일까요?
사실 ICO가 투자의 중앙화를 허물었다는 말을 듣고 큰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마치 VC가 그동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특혜'를 누려왔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죠.
그런데 VC가 정말로 '정보의 비대칭'이나 '자본의 힘'으로 큰돈을 벌었다면, 수많은 기업과 자본가는 VC 사업에 발 벋고 나섰을 것입니다. 그들이야 말로 핵심 정보를 쥐고 있으며, 자본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VC는 하나의 블라인드 펀드를 통해 수 십 개의 회사에 투자합니다. 작게는 수 억 원에서 많게는 수 백억 원을 투자하죠. (수 백억 원의 경우는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VC 크기입니다) 그들은 수 십 개의 회사 가운데 단 몇 군데에서 거래한 규모의 투자 수익을 거둡니다. 동시에 나머지는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하게 되죠. 하나의 펀드는 그래서 결과적으로 수익률은 크지 않습니다. 2002년 이후 결성된 VC 펀드의 평균 수익률이 7%대라는 자료도 있습니다.
VC는 하나의 투자를 이루기 위해 무진장 노력합니다. 검토X100 이상의 품을 들이죠. 시간도 오래 걸립니다. 몇 주만에 투자 의사결정을 내리는 경우도 있지만, 몇 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VC는 정확히 어떤 일을 할까요? 제 생각엔 그들 업의 본질은 '분류와 선택'입니다. 범람하는 사업계획서와 스타트업 사이에 적격한 투자 대상을 찾아내는 것이 그들의 일입니다. 하나의 VC가 모든 산업을 살필 수 없는 노릇이니 그들은 집중할 수 있는 산업을 분류합니다. 분류된 산업에서 다시 기업을 선택하는 작업을 하게 됩니다. 이 과정은 VC 회사 차원일 수도 있고, VC 내 임직원마다의 스타일일 수도 있습니다.
ICO를 통해 블록체인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게 VC의 영역을 대체한다고 생각하면 위험합니다. 과연 많은 사람들이 VC만큼의 '분류와 선택 작업'을 하고 있을까요? 혹은 이를 실행할 능력이 될까요? 애석하게도 그렇진 않아 보입니다.
ICO에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1) 투자자 보호를 위한 장치가 전무하다
(2) 비즈니스가 극단적으로 초기 상황인 경우가 많다
(3) 실제 비즈니스가 개발되는 단계를 확인할 수 없다
위 특징으로 인해 사기(Scam) 세력이 진입하기 좋은 시장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먹튀'를 하더라도 '법적 제재'를 받을 가능성은 낮은 겁니다. VC도 항상 사기의 가능성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들 역시 투자만 받고, 실제 비즈니스의 성공에는 관심이 없는 창업자를 만나며, 그들에게 속기도 합니다. 짧은 기간 내에 마치 로또를 사는 기분으로 ICO에 참여를 한다는 것은 (기대감을 누릴 수 있겠지만) 수익률 측면에서 7% 이상을 기대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ICO가 사라질까요? 분명 ICO의 장점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VC가 큰 타격을 받을까요? 그들은 여전히 '분류와 선택' 작업을 할 것이고, ICO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접근을 할 것입니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VC는 펀드 약관 내 투자대상에 주식(Equity)에 더해 디지털 자산(Digital Asset)을 추가하고 있습니다. 즉, 코인과 토큰에도 투자하겠다는 것이죠. 우리나라에서는 ICO를 진행하는 회사의 주식에 투자하는 형태로 VC의 암호화폐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VC가 수많은 ICO 가운데 성공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들에 자금을 투입하겠다는 의미입니다.
VC는 ICO가 등장하더라도 그 입지는 줄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반 대중보다 강력한 중앙화된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ICO를 진행하는 팀은 VC를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대규모 자금을 유치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프로젝트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 투자자도 ICO에 대한 투자를 집행하기에 앞서 VC가 팀 혹은 프로젝트 자체에 투자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차례 검토가 이루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큰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VC는 ICO에 투자하기 시작했고, ICO는 VC를 레버리지로 활용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투자자는 VC가 참여한 ICO에 더 높은 점수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큰 사이클에서 성공적인 ICO가 탄생해야 이러한 선순환의 구조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만, 사기에 대한 인센티브가 조금이나마 줄어들고, 유망 ICO에 의미 있는 자금이 수혈되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