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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가 프리만 Nov 25. 2023

"너만 파리 구경 다니냐?"…이기적 남편의 최후

[마흔에 파리가 좋아질 줄이야] 우리집은 엘베없는 4층- 1편

"오빠는 일한다고 가끔  파리 시내에 나간다 치자, 나랑 수수는 그럼 거기서 뭐하고 살아?"      


아 그렇습니까. 아내의 말 한 마디에 나는 합죽이가 됐다. 수수는 우리 딸의 아명이다. 연수 3개월 동안 파리 외곽 조용한 동네에서 머물자는 나의 뇌피셜은 그렇게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그럼 어디서 3개월을 지낼까요. 밤마다 대화가 오갔고, 조건을 다음 몇 가지로 압축할 수 있었다.


1. 파리 시내 안전한 지역에 집을 잡는다.

2. 햇빛이 잘 들어와야 한다.

3. 욕조가 있어야 한다.

4. 요리를 할 수 있는 풀 세팅이 돼 있어야 한다.

5. '걸어서' 파리를 즐길 수 있어야 하는 곳이어야 한다.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파리 외곽에 집을 잡자는 '명분'은 '현지 체험'이었다. 파리 시내야 배낭여행으로도 와봤고, 앞으로도 언제든 여행을 올 수 있지 않은가. 진짜 파리지앙들이 사는 마을에는 언제 머물러 볼 것인가. 잔디가 넓게 깔린 마을에서 아이와 함께, 마음씨 좋은 프랑스 사람들과 조금씩 말도 하며, 하하호호 살아보자.


명분과 '현실'은 다르다. 실제로는 금전적인 이유가 컸다. 파리 시내 치안을 고려한다면 1~16구 사이에서 집을 잡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그 중에도 피해야 할 동네들이 좀 있었다). 좀 괜찮은 동네들의 경우 에어비앤비로 검색해보면 월세가 400만~500만원을 훌쩍 넘었다. 에어비앤비는 '슈퍼호스트' 집만 간다는 게 나름의 철칙이었어서, 더욱 비싼 집만 보게 됐다.

그래서 뫼동(Meudon), 끌라마흐(Clamart), 이시(Issy), 꾸흐부와(Courbevoie), 라 갸헨느-꼴롱브(La Garenne-Colombes), 뱅센느(Vincennes) 등 외곽에 치안 좋은 곳으로 알려진 지역들을 검색해보고 아내에게 보고한 것이다. 그 중에는 가격 좋고, 평가가 높고, 동화 속에 나올 법한 그림같은 집도 있었지만, 아내의 "나와 니 딸래미는 거기서 뭘 하냐" 한 마디에 모두 백지화했다.


결혼생활 9년을 하고, 자식을 낳은지 5년이 됐지만, 무심결에 '나'만 생각하는 건 잘 고쳐지지 않는다. 돌이켜 보건대, 파리 외곽 지역에 집을 잡은 평행세계를 생각하면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일한다는 핑계로 샹젤리제든 콩코드광장이든 세느강이든 파리 시내를 마음껏 거닐다 온 나와, 뫼동의 집에서 아이와 하루종일 지지고 볶은 아내가 저녁 무렵에 마주한다면 죄인이 누구인지는 분명할 수밖에 없다. 잠재적 죄인이 될 수는 없었다. 이래서 가족 회의가 필요한 걸지도 모른다.     


파리 시내에 집을 잡아야 했다. 내가 일을 하러가도 아내와 딸이 세느강에서 놀 수 있고, 미술관과 박물관들을 신나게 다닐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 '햇빛이 잘 들어오는 집'은 아내와 내가 결혼할 때부터 세운 보금자리의 기본 값이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햇빛이 잘 들어오는 집에서만 살 생각이다. 욕조는 아이가 워낙 뜨거운 물 목욕을 좋아한다. 잠자기 전 목욕을 하며 와인 한 잔을 하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개인적인 바람도 반영했다. 요리는 먹는 문제니 당연히 풀 세팅이 필요했다.


나름 조건이 깐깐했던 만큼, 이런 '슈퍼호스트 집'을 파리 시내에 구하는 건 도저히 예산이 안 맞았다. 에어비앤비가 아니라 현지 프랑스 교민 및 학생 커뮤니티도 뒤졌다. 모두 허탕이었다. 3개월을 살기 위해 현지 부동산까지 접촉해야 하나. 아 그런데 프랑스어는 한 마디도 못하는데.


고민 끝에 에어비앤비 '슈퍼호스트' 조건을 버리기로 했다. 슈퍼호스트는 아니어도 일관되게 좋은 평가가 있는 집을 찾자. 단 한 번이라도 뭔가 컴플레인 비슷한 게 나온 곳은 제외하자. 방문자 평가가 너무 적은 곳들이나 평점이 4.5점 아래인 곳, 사진이 너무 적은 곳도 모두 제외하자. 그러다 보니 월세 300만원대 집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차피 머무는 시간은 3개월. 숙소 선정의 중요성이 8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개월에 월세로 1000만원 이상을 지불해도 좋다. 근성있게 보유해온 애플과 테슬라 주식을 모두 팔아치워도 좋다. 3개월 이후 한국에 복귀했을 때 다소 궁핍해도 좋다. 가족 모두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서라면 파리 시내에 집을 잡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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