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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가 프리만 Nov 12. 2021

웁살라의 라면 한 봉지에 대하여

[그 도시에 대하여]⑥

스웨덴 웁살라, 2014년 6월


결혼을 한 후 신혼의 단꿈에 빠져 살던 어느 날. 건강검진을 받았던 아내가 자신이 큰 병에 걸렸음을 알려왔다. 그때 그 감정을 몇 마디 단어로 표현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지금도 이 첫 문단을 몇 번을 쓰고 지우고 있는지 모르겠다. 활자로 옮기기 엄두가 안 나올 정도로 잔인한 순간.


다행히 수술만 잘 받으면 완쾌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렇게 결혼을 한 후 두 달만에 아내는 수술대에 올랐다. 떠들썩한 TV 예능이 나오던 수술 대기실. 거기서 몇 시간을 기다린 끝에 아내가 창백해진 얼굴로 나왔다. 그때의 아내 얼굴을 잊을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이 공포와도 같았던 순간을 치유할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6월 스톡홀름의 하늘은 파란색이었다. 파란 바탕에 노란 십자가. 스웨덴의 국기 색깔이 이 나라에 참으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아내가 회복될 때쯤 스웨덴을 방문할 일이 운이 좋게도 생겼고, 그 파란 하늘 아래에서 우리는 잔인했던 수술의 상처를 잊을 수 있었다. 


스웨덴 스톡홀름 방문이 우리 부부에게 두 번째 신혼여행 격으로 기억되는 이유다. 고마운 도시 스톡홀름. 유쾌한 기억이 많다. 일일이 문자로 풀어낼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문제는 급하게 결정된 방문이어서 '주말' 호텔을 구하기 어려웠던 것에 있다. 우리가 평일에 묵으려고 예약한 가성비 호텔에는 남는 방이 없었다. 다른 호텔의 경우 혹독하고 혹독한 '북유럽 물가'가 적용돼 있었다. 


스톡홀름에서 약 30~40분 기차를 타고 가면 웁살라라는 도시가 있다는 점을 검색을 통해 알게 됐다. 어디서 들어본 '웁살라 대학교'가 있는 도시. 숙소 가격도 착했고, 주말에 스톡홀름에 꼭 있을 이유도 없어서 토~월요일에는 웁살라에 있기로 했다. 우리가 예약한 웁살라 호텔 방에는 콘도처럼 간단한 취사를 할 수 있게도 돼 있어 마음에 더 들었다.


웁살라는 피리스 강(이라기보다는 개천)이 흐르는 작은 도시였다. 역 앞에 큰 건물과 번화가가, 그리고 강 건너에 대학교 건물이 옹기종기 있는 곳이었다. 스톡홀름을 벗어나 주말이라도 북유럽의 소도시에 머물 수 있는 게 오히려 좋다고 생각했다. 


캠퍼스를 거닐고, 강의실들을 구경했으며, 대학교 앞 작은 교회에서 진행되는 결혼식 자리 한 구석에도 앉아봤다. 나는 서른이 되던 해에 아내를 처음 만났고, 아내가 서른이 되기 전에 결혼을 했다. 우리가 못해본 캠퍼스 커플이 된 것처럼 웁살라 대학교에서의 데이트를 즐겼다. 바다 같은 하늘색, 밤 11시가 넘어서까지 지속되던 백야가 이런 로맨틱한 분위기를 더 고조시켰던 것 같다.

얼떨결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구경했던 결혼식. 잘 살고 계시죠? 우리도 잘 삽니다.

그런데 이런 로맨틱한 분위기를 깨던 게 바로 '음식'이었다. 스톡홀름에서 첫 끼부터 우리 부부는 이곳이 만만한 곳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가격이 비싸도 맛있다면 문제가 없다. 그런데 가격이 비싼데 맛까지 없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스톡홀름에 도착하자마자 '북유럽 미트볼'을 먹어보겠다며 찾아간 식당. 미트볼은 오뚜기 3분요리 같은 맛에 3만원 가격이었다. 어딜 가도 맥주는 뭔가 김이 빠진, 2% 부족한 맛이었다. 감자튀김의 감자는 뭔가 질기다고 생각했다. 현지에서 만난 분이 맛집이라고 데려간 식당에서는 돼지고기 수육에 크림소스를 올린 게 나왔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맥도날드가 제일 맛있었다. 


웁살라의 로맨틱한 분위기를 음식이 망치는 걸 원하지 않았다. 다행히 첫끼를 먹었던 피자집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 로맨틱한 분위기의 정점을 찍자. 진짜 레알 트루 그란도시즌 맛집에서 스칸디나비아 음식의 정수를 느끼며 우리 제2 신혼여행의 정점을 찍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검색 끝에 피리스 강가에 위치한 평점이 꽤 높은 식당을 찾았다.


백야의 햇빛이 쏟아지는 가운데 식당의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뭘 시키지. 일단 생맥주 한 잔씩. 오 맛이 나쁘지 않다. 그리고 메뉴판을 보니 여긴 해산물 전문점인가 보다. 일단 실패할 확률이 낮은 홍합 요리와 이 집의 시그니처 메뉴인 듯한, 해산물 모둠 요리 같은 것을 시켰다. 홍합이 3만원, 해산물 모둠이 5만원 정도 했던 거 같다. 메뉴의 사진을 보니 게살도 있고 새우도 있고, 뭔가 럭셔리해 보였다. 


먼저 나온 홍합 요리. 빵 몇 쪽과 홍합이 나왔다. 홍합은 포장마차 홍합탕 맛이다. 물론 양은.. 그건 말하기 싫습니다. 홍합 몇 점에 바게트 3쪽이 나왔는데 3만원을 받아갔다. 그래..그래도 아는 맛이니까. 우리에겐 북유럽 해산물 모둠이 남았지 않은가. 

3만 원..

북유럽 해산물 모둠이 나온 즉시, 그 외관을 보자마자 나는 그 맛을 알 수 있었다. 이건 이맛도 저맛도 아닌 맛이 분명했다. 딱 봐도 맛없게 생긴 새우 몇 마리가 올라가 있었고, 딱 봐도 푸석푸석해 보이는 게살 몇 점이 올라가 있었으며 딱 봐도 밍밍할 거 같은 조갯살들이 있었다. 저건 을왕리에 가면 쓰게다씨로도 안 나올 거 같았다. 


그 북유럽 해산물 모둠의 압권은 밑에 깔려있는 채소였다. 이건 분명 김치 씻은 맛인데 김치는 아닌 그런 채소들이 깔려있었다. 새우와 게살과 조갯살을 씻은 김치와 같이 먹었다는 말은 내가 그 어디서도 듣지를 못 했다. 그 위에 해초 비슷한 것과 사워크림이 올라가 있는 것은 요즘 말로 '킹받는' 일이었다. 사워크림이 온몸으로 "나 5만원짜리 고오급 메뉴야"라고 외치는 듯했다.


아내와 식당을 서둘러 나와 스칸디나비아의 음식 문화에 대해 맹비난을 하며 백야 아래의 피리스 강가를 산책했다. 음식과 다르게 도시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한참을 걸어도 질리는 게 없었다. 이 아름다운 하늘 아래, 도시 골목 사이에 맛있는 음식이 없다는 점이 웃기게 다가왔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배가 고팠다. 식당에서 10만원을 넘게 쓴 거 같은데 배가 고팠다. 편의점에서 이것저것을 사다가 발견한 라면. 'Samyang Ramen'이라고 적힌 게 아닌가. 오오 메이드 인 고려... 


그런데 포장지가 뭔가 삼양라면 스럽지가 않았다. 주황색이 아닌 하늘색 포장지. 라면 사진도 벌건색이 아니라 흰색이었다. 치킨 맛이라고? 아 이건 또 뭐지. 그래도 일단 사보자. 메이드 인 고려 라면이 아닌가. 그렇게 황급히 삼양라면 한 봉지를 사서 숙소로 갔다. 


콘도처럼 취사가 가능한 호텔 덕을 봤다. 건더기 스프도 없고, 국물이 벌건색도 아닌 삼양라면을 아내와 나는 너무나도 맛있게 나눠먹었다. 심지어 라면 물 조절에 실패해 '한강 라면'이 됐는데도 맛있었다. 스웨덴에서 가장 맛있게 먹은 게 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삼양라면이요"라고 답할 수 있다.

저래 보여도 스웨덴에서 제일 맛있었던 음식

추억의 의미는 반드시 근사한 것에만 남지 않는다. '치유'의 땅 스웨덴 방문에서 아내와 내가 아직도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은 10만원짜리 맛없는 식사와 삼양라면 한 봉지의 기막힌 대비다. "그때 웁살라에서 그 라면 정말 맛있었는데" 이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그 치유를, 그 추억을,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모두가 경험이고 추억이었던 것이다. 


2019년에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3국 출장을 가게 됐다. 공식적 출장이어서 그렇게도 좋은 식당을 많이 다녔다. 그리고 "파란 하늘은 너무나도 예쁘지만 음식으로 뭘 해도 안 되는 동네"라는 생각을 굳히게 됐다.


스칸디나비아 출장에서 돌아온 후 아내에게 "이번에 스테이크도 많이 먹고 좋은 식당도 많이 갔어"라고 말했다. 아내는 "어때? 맛있었어?"라고 물었다. 나는 "아니 그때 삼양라면이 더 맛있었어"라고 답했다.

이게 뭐라고 또 이렇게 사진이 많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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