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타이중, 산책하기
긴 여행을 준비하던 중, 특가항공권에 매료되어 짧은 연휴맞이 여행을 다녀왔다. 지난해 초, 대만여행을 갈때만 하더라도 성수기에 급하게 가느라 왕복항공권이 60만원 정도였는데, 이번엔 20만원 중반대다. 하하.
항공권 가격만으로도 벌써 즐겁게 여행을 다녀온 기분도 잠깐, 여행기간 중에 태풍영향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에 얼마나 마음 쫄려 했던지... 더구나 정확하다는 구글날씨로는 여행기간 내내 비였다.
잠깐 흔들리긴 했지만, 비오면 그 나름대로 재미가 있을거란 생각에 짐을 챙겨 예정대로 여행을 떠났다.
대만여행은 이번이 2번째. 타이페이는 지난 여행때 가봤으니 이번엔 다른 곳을 가보고 싶었다.
관광지보다는 한 지역에 머물며 그곳의 일상을 누비는 생활여행을 선호하고, 문화예술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곳을 찾다보니 발견하게 된 타이중 (Taichung). 타이페이와 가오슝에 이어 3번째 도시로 손꼽히는 곳이지만 타이중 주변 관광지를 당일치기로 다녀오기 위해 거점처럼 스치는 곳이기도 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며칠 묵기로 결정하고, 떠났다.
타이페이 타오위안 공항에서 내려 타이중까지는 U버스로 이동하기로 했다. 소요시간 등을 고려해 MRT와 고민했으나 환승하는데 부담을 느껴 버스를 탔다. 그렇게 2시간 남짓 달려 도착. 다행스럽게도 숙소는 타이중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도보로 5분 거리.
타이중의 첫 인상은, 멋진 기차역으로 완벽해졌다. 이 도시, 이렇게 나를 설레게 하다니. 여전히 손편지와 손글씨가 더 좋은 아날로그 인간인지라 나는 이렇게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것이 무엇보다 좋다. 과거엔 잘 몰랐던 건축물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도, 시대가 너무 급변하다보니, 도시의 옛 이야기들이 여전히 묻어나오는 건축을 살피게 된다. 여전히 잘 알진 못하지만, 그 시대에 만들어진 건축물이 어떤 영향을 받고, 오랜 세월 변화를 거쳐 현대에 어떤 형태와 성질을 유지하는 지 보는 것이 나름 재미있다.
같은 의미로, 도시재생 프로젝트 또한 흥미롭다. 핵심은 옛 공간에 차곡히 쌓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현대인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들려주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건축이든, 프로그램이든, 그것이 상품이 됐든 '공간에서 파생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빠진 공간은 그 자체로 매력을 잃게 된다. 인스턴트식품처럼 잠깐은 흥미를 끌 순 있지만, 오래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을 잃게 되는 것과 같다.
다시 여행이야기로 돌아와, 타이중은 여러모로 재미난 여행지였다. 타이중은 작은 소도시답게 외곽으로 나가지 않는 이상 걷거나 버스, 택시를 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대중교통을 탈때 이용하는 이지카드를 구매하면, 10km 이내에선 버스비가 모두 무료란 사실. 여행객들이 찾는 곳 대부분은 10km 내에 있는 지라, 버스시간만 잘 맞추면 교통비를 절감하며 여행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 구글지도가 있는 한, 어떤 대중교통도 어렵지 않다. 친절한 구글은 출발지와 도착지를 입력하면, 도착예정시간과 버스를 알려주고, 탑승한 버스의 내릴 역이 되면 알려주기도 한다. (못하는게 뭐지, 구글? :D)
숙소에 짐을 풀고, 주변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무작정 거리로 나왔다. 여행지에 도착하면 우선 숙소를 중심으로 걷고 걷고 또 걷는다. 지도를 보지 않고, 발길 닿는대로 걸으며 낯선 지역과 눈맞춤하며 인사를 한다.
'있는 동안 잘 부탁해!' 거리 곳곳을 거닐며 인사를 건네고, 지역의 분위기를 살핀다.
동네골목여행이다. 지도를 보지 않고, 발길닿는 대로 걷다가 끌리는 곳에 들어가 식사를 하고, 지역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그렇게 거닐다보면 그 지역 특유의 인상이 생긴다. 어딘가 특별한 관광지를 가는 것은 이후에 해도 충분하니까, 낯선 이방인이 이 여행지에서 친해지는 건 그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니까. 낯섦의 경계를 조금 지워가면, 막연한 불안감도 덜 수 있다.
나는 느슨한 여행이 좋다. 빽빽하게 여행일정표를 짜지도, 꼭 어딜 가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행 컨디션은 그날의 날씨와 기분에 따라 정한다. 그래서 같은 지역을 몇 번 여행해도, 매번 다른 여행을 하는 것처럼 새로울 수 있는 까닭은 그날그날에 따라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번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곳은 타이중 국립가극원인 국립오페라극장이었다.
한 편의 오폐라처럼, 선율이 살아있는 타이중 국립가극원
2016년 개관한 국립가극원은 타이중의 랜드마크로 손꼽힌다. 일본 건축가인 도요 이토가 설계했고, 곡선미가 살아있는 아름다운 건축물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런 건축물이나 전시를 볼 때는, 아는 만큼 보이므로 꼭 가이드를 신청하는 게 좋다.
타이중 국립가극원 역시 한국어 버전의 음성가이드를 제공하고 있었다. 대만달러로 TWD120원(한국돈 4400원)이면, 건축물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들으며 공간투어를 할 수 있다. 막연히 아름다운 건축물에서 그치지 않고, 건축물이 왜 곡선으로 이루어져있는지 각 층, 장소별로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어 참으로 좋았다. 음성가이드를 들으며 건축물 곳곳을 살펴보고, 내려올 땐 오롯이 공간을 감상하며 한 번더 둘러볼 수 있어 좋았다. 어느 것하나 정형화 되어있지 않는 공간은 특별한 영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타이중은 확실히 타이페이와는 또 다른 인상이다. 타이페이가 화려한 맛의 도시라면, 타이중은 산책의 도시이다. 도시의 산책자에게 더할나위 없는 여행지임에 분명하다.
산책의 도시, 타이중
여행하는 내내 마지막 날을 제외하곤 날이 좋았다.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의 타이중은 여행 내내 이토록 맑은 날씨를 선보였다. 마음이 복잡다단할 때 급하게 떠났던 여행이었던지라, 행여나 여행지를 온전히 느끼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도 했었는데 모두 기우였다.
일기예보처럼 비가 잔뜩 낄거같았던 여행지와 속 시끄러웠던 내 마음은 모두 내려놓고 마음껏 보고, 듣고, 먹고, 느낄 수 있었다. 낯섦의 생경한 느낌이 때때로 필요한 순간들이 온다. 익숙함에 무뎌지는 기분과 감정이 나를 잠식해올 때, 생경한 느낌에 발끝까지 쭈뼛대는 느낌이 좋다. 세상엔 이토록 호기심 가득한 것들이 많은데, 나는 무엇하여 이토록 조바심을 내는지.
태풍은 다행히 대만을 비켜갔고, 비행기 연착없이 제때 집으로 잘 돌아왔다.
그리고 준비하던 긴 여행은 잠시 보류하기로 했다. 떠나면 그만이지만, 나를 좀 더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나저나 이 직장인의 습관은 언제 사라지려나. 늦게자고, 늦게 일어나는 게으름뱅이가 되고 싶은데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새벽 늦게 잠들어도 언제나 같은 시간에 눈이 떠진다. 몸이 기억하는 시간은 참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