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사회생활은 그렇게 끝이 났다.
스물넷, 아니 스물다섯이던가. 이십대 중반의 나는 꽤 용감했다. 학기 말 다들 취업준비를 할 때 나는 글쓰기 아카데미를 찾아 다녔다. 그때는 글쓰는 게 세상 무엇보다 재밌고, 중요했었다. 방송작가 아카데미, 동화작가 글쓰기교실, 스토리텔링 등등 글맛에 취해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열심히 읽고 또 썼다. 라디오작가를 꿈꿨지만 현실은 방송국 영상 프리뷰 알바를 하는 중이었고, 우연한 계기로 모바일게임 스토리 보조작가도 하는 중이었다. 그때는 그런 게 참 좋았다. 좋아하는 걸 하기 위해 열심히 찾아보고, 기회가 되면 덥석 잡아 뭐든 해보는 게. 그리고 대안언론사 기자가 됐다. 기자라니.. 작가 등단 만큼이나 황당한 진로가 아닐 수 없다.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어쨌든 기자가 됐다. 나의 첫 명함은, 취재기자였다.
어쨌든, 기자가 됐다
그때 나이 스물넷. 대안언론사 신참내기 기자의 하루는 참으로 고달펐다.
육하원칙에 의해서 글을 쓰는 게 왜 그렇게 어려운건지, 보도자료를 읽고 또 읽었다. 좋아하는 주간지 기자의 기사는 모두 필사를 했다. 그러면서 기사형 문장을 익혔다. 힘을 빼고 글을 쓰는 게 어려웠고, 주관적 시선 없이 객관적으로 문장을 풀어내는 게 숙제였다. 심층기사는 더 난제였다. 그 무겁고 어려운 내용을 누구나 읽기쉽게 풀어쓴다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너도 짬이 되면 다 하게 된다"는 선배의 말이 야속했다.
기사 말미 바이라인에 내 이름 석자가 나왔을때,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컸다. 나의 문장이 누군가에게 뉴스가 된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이름 석자가 부끄럽지 않고 싶었다. 같은 사안을 다룬 다른 기사들을 살펴봤다. 문장을 매끄럽게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단어를 선택하는지에 따라, 글이 주는 힘이 달라졌다. 내가 쓰는 단어의 한계를 실감하며, 국어사전을 정말 열심히 뒤졌다. 공부만이 답이었으므로. 그렇게 태를 갖춰나갔다.
그러다 처음 혼자 현장에 나가게 됐다. 한 면을 할애하는 중요한 인터뷰를 해오라는 미션이었다.
"제가요?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못할 건 또 뭔가(못하겠다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신문사 선배들은 최소 10살 이상 차이나는 대선배들이었고, 이건 나의 첫 미션이었다. 인터뷰까지 주어진 시간은 이틀.
인터뷰이에 대한 모든 정보를 찾아 분석했다. 처음엔 간단한 프로필을 만들었고, 그 사람에 대한 궁금증을 1차로 뽑아 정리했다. 다른 기사에서 다룬 질문들은 우선 배제했다. 같은 질문을 던지면, 같은 답변이 나올 수 밖에 없으므로. 사안이 큰 것들은 되도록 구체적으로 질문을 쪼갰다. 대의를 이야기하더라도, 구체적으로 답변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A4용지 2장 분량의 질의서를 최종 정리해서 편집장님께 갔다.
"잘 했네. 잘 하고 와." 다행히 인터뷰는 무사히 끝났고, 일주일의 고통 끝에 기사를 출고했다. 얼마나 읽고 또 고쳤는지, 최종 출고 때는 기사를 모두 외울 지경이었다. 잘하고 싶단 욕심에 수십개의 버전의 기사를 쓰고 또 썼다.
그리고 나는 릴레이 인터뷰 꼭지를 고정으로 맡았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그 사람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끄집어 내주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의 말을 곡해하지 않고, 기사로 잘 전달해주는 것. 그것이 나의 역할이었다. 지금의 마이너 감성도, 보고서 작업도, 글을 쓸때 엄격해지는 것도,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도. 생각해보면, 지금의 나는 이십대의 내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가장 많이 배운 건 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 우리는 언론에서 주목하지 않는 노동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게 일상이었고, 그게 어디든 찾아갔다. 절박한 누군가에겐 그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보탬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 당시 지역에선 사측의 부당한 해고에 맞선 해고노동자들의 농성이 한창이었다. 몇 달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 해고노동자들은 점점 극단의 선택을 했다. 농성 장소가 점점 더 높아졌고, 위태해졌고, 곡기를 끊었고, 그 세찬 바람에도 내려오지 않았다. 혹여나 잘못된 선택을 할까 싶어, 농성현장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 이야기에 귀기울여주지 않아요."
그들의 절박함을 세상이 몰라주는 게 미워, 기사를 쓰고 또 썼다. 그렇게라도 그들의 입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몇 번이고 기사를 쓰니, 사측에서 전화가 왔다. "우리 이야기도 좀 들어주셔야죠." 회사의 주장대로 회사사정은 좋지 못했다. 공장의 절반은 멈춰있었고, 일하는 근로자의 수도 줄어든지 오래였다. 본인들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항변했다. 돌아와 기사를 쓰는 데 몹시 힘들었다. 사측의 입장과 상황을 정리하고, 해고 노동자들의 요구를 정리하고.... 사실 정리되지 않았다. 중심잡기가 힘들었다.
"보고 들은 것, 그대로만 써. 너는 기자지, 해결사가 아냐."
해결사는 아니더라도, 대안을 제시해주고 싶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과 입장일수는 있어도 상황을 조금이나마 개선할 방안을 찾고 싶었다. 누군가의 절박한 목소리를 들어주는 것에서 그치고 싶지 않았다. 관련 전문가들에게 아무리 전화를 돌려봐도, "우선 지켜봅시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스물다섯. 스물다섯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지역의 숱한 언론사 중 가장 마이너한 언론사 막내기자의 기사는 세상의 울림은 커녕 목소리 조차 내기 쉽지 않았다. 아무리 외쳐도 메아리처럼 다시 돌아오는 현실이 못내 견디기 어려웠다. 감당하기 버거웠고, 도망치고 싶었다. '나는 기자도 아니야.' 패배감에 휩싸이자 자존감이 바닥쳤다. 선배들은 그러면서 크는 거라고, 조금더 버텨보라고 했지만 나는 끝내 도망치고 말았다. 그렇게 짧았던 2년 남짓의 기자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생각해보면, 치기 어린 마음이다. 입사 1,2년차의 새내기 기자가 할 수 있는 역할의 한계란 것이 분명한데 스스로 그걸 못견뎌했다. 그땐 돌아가는 방법을 몰랐다. 더 버텼더라면 다른 선택지가 생겼을까. 신문사를 그만두고, 장기 배낭여행을 떠난다고 했을 때 선배들은 모두 "너답다"고 말했다.
나는 그때 나를 잘 몰랐다. 첫 사회생활이었고, 그 중압감을 견디기 어려웠고, 일을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스스로의 한계치에 달했을 때, 나는 도망치듯 여행을 선택했다.
일을 그만두고, 한참 후에.
여행을 다녀오고서도 한참 후에.
선배가 그랬다. "나는 네가 기자 포기한 게 참 아깝다. 기자도 기잔데, 글 쓰는 건 포기하지 마라. 누군가의 이야기를 그렇게 공감하며 들어주는 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아냐." 아마 응원의 말이었겠지만, 그말이 참 따뜻하고 좋았다. 누군가의 이야기에 따뜻한 시선을 던지는 글을 쓰는 것, 나는 술에 취해 선배한테 그랬다. "아, 정말, 나도 내 글 쓰고 싶어요. 선배, 나 글쓰며 밥벌이 할 수 있을까요?"
스물넷, 그리고 스물다섯.
나의 첫 사회생활은 끝이 났고. 나는 6개월 배낭여행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