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모든 것이 낯설어야 하는 문화기획자

우리의 시선은 누군가에겐 또 다른 시야가 된다.

by 한여름의수박

배낭여행에서 돌아와 진로를 고민하던 찰나에 대학원에 갔다. 공부에 대한 목마름이나 학구열에 불타 대학원을 선택한 건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걸 직업적으로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지, 나는 무지했고, 막연했다. 채용사이트를 살펴봐도, 내가 뭘 해야 선택해야 할지 잘 몰랐다. 직장이라는 게, 마음에 안든다고 쉽게 그만둘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그래서 도대체 뭘 잘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다.


기자를 그만뒀지만, 여전히 글을 쓰곤 싶고, 그렇다고 다시 기자로 돌아가곤 싶진 않아. 그러다 글쓰는 것 만큼 재미있던 이야기 만드는 걸 살려보고 싶었다. 이야기라는 게 꼭 글로 표현되는 건 아니니까, 이야기를 어떻게 표현하고 적용할 수 있을지. 배워보지 뭐. 그렇게 문화예술관련 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원 학비를 벌기 위해 틈틈히 크고작은 이야기를 만들고 썼다.


당시 스토리텔링이라는 개념이 문화분야 전반에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나는 운이 좋게도 여럿이 함께하는 큰 프로젝트에 스토리작가로 참여하였다. 장소기반 원형 스토리를 덧입히는 작업이었다. 설화를 살펴보고, 현대적을 각색하여, 누구나 읽기 쉽게 문장을 다듬고 또 다듬었다. 내가 만든 이야기가 뿌리내려 다른 사람들에게 읽혀지는 것은 참으로 두근거리고 설레는 작업이었다. 여럿이 협업하여 무언가를 도모하는 기쁨도 있었다.


여느 길과 다름없던 그 곳에, 그곳만을 위한 이야기를 심고, 방문객으로 하여금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주는 것. 나는 스토리작업을 통해 그 기쁨을 배웠다. 공간 안에 이야기를 넣는다는 것은 그곳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만들고, 그곳에서 특정한 행동(행위)를 할 수 있도록 일종의 가이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공간에 대한 화두를 던져주고, 저마다의 이야기(추억)을 만들 수 있도록 한다.


스토리작가로 참여한 후부터 어느 관광지를 가거나 관광지 소개를 꼼꼼히 읽게 된다. 오탈자를 보면 속이 상하고, 잘못된 정보를 보면 안타깝다. 관광 10선처럼 지역에서 화두로 내세우는 관광코스 역시 마찬가지, 관광 스토리를 유심히 읽다보면 지역에서 내세우는 관광 코드를 읽게 되고, 어떤 것을 유도하는 지 알게 된다. 그런 것들에 재미를 느껴 선택한 두번째 직업은 <문화기획자>였다.



첫 직업이었던 신문기자처럼, 직업을 간결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도 별반 다르진 않지만, 당시만 해도 문화기획자를 직업적으로 규정하기 어려웠다. 임금 적정선이 없다보니, 국비 사업별 부처마다 임금의 편차가 심했고, 업무 역시 광범위했다. 프로그램 기획과 현장 실무 운영, 보고서 작성 등 글쓰기와 현장성을 두루 갖춰야 했다. 회사는 주로 국비사업을 용역 받아 운영하는 회사였고, 동시에 자체 브랜드를 개발하기 위해 힘쓰고 있었다.


입사 후 첫 프로젝트는 중기청에서 시행하는 특성화시장육성사업이었다. 전통시장을 현대적으로 탈바꿈하는 하드웨어만으로는 승산이 없자, 정부는 전통시장에 문화적인 방식으로 색을 더해갔다. 그것은 주무부처에 따라 방식의 차이는 있을 뿐, 시장 안에 사람이 넘쳐나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평생을 시장에서 장사를 해오던 시장상인들이 변화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었다. 시장을 바라보는 상인들의 리마인드 교육을 시작으로 휴먼웨어에 초점을 맞췄다. 물건을 구매하는 소비자뿐 아니라 지역민, 관광객들을 유입할 수 있도록 놀꺼리, 먹꺼리, 볼꺼리들을 만들어갔다. 해당 프로젝트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커뮤니케이션이었다. 늘상하던 업무적 소통방식으론 상인들과 대화가 되지 않았다. 초반엔 그것이 몹시 버거웠다. '억울한' 일을 그렇게 몇 번 당하고 나니, 왜 저러실까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고나서, 나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나는 해당 프로젝트가 나의 일이고, 업무이기 때문에 늘상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한다. 그러나 지역상인들에게는 아니다. 모두 본업이 있고, 당장 이 프로젝트가 본인들에게 직접적인 혜택을 주는 것이 아니고, 열 가지 크고작은 일 중에 하나일 뿐이다. 나만큼 고민을 안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가 나와 다른거다."


그렇게 인정하고, 정리하고 나니 억울했던 마음들이 조금이나마 가셨다. 나는 그 후 다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도 다름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깨달았다. 이렇게 노력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는거지? 이렇게까지 지역과 마을을 위해서 여럿이 고생하는데, 왜 협조하지 않는거지? 변화하는 게 싫은건가? 왜 또 말을 바꾸는거지? 그렇게 생각이 들때마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누군가에겐 이 일이 우선순위가 아닐 수 있음을, 참여만으로도 큰 행위 였음을, 처음부터 같은 속도로 내달릴 수 없음을, 누군가에게 우리는 협조자가 아니라 낯선 이방인임을, 고로 우리는 지역과 함께하는 파트너로서 호흡을 맞춰야 하는 것임을.


이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정말 다양한 업무를 했다. 수백명의 예술가와 함께한 퍼포먼스, 다수의 문화기획자가 참여한 행사, 작은 마을축제, 도시 브랜딩, 마을 컨설팅, 축제 홍보마케팅 등등. 익숙해질만하면 늘 새로운 일들이 주어졌다. 그때는 그게 힘들지만 재미있었다. 관련 논문을 찾아보고, 다른 사례를 검토하고, 그렇게 기획안을 쓰고, 현장을 발로 뛰고, 정말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을 만나고, 그것들을 잘 정리하고.


문화기획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낯설게 바라보기"이다. 우리에게 익숙하다고 해서 그것이 꼭 진부한 것이 아님을, 관점을 가지고 바라봐야 또 다른 시야가 생긴다는 것이다. 특히 지역의 오래된 것을 그저 옛것으로만 치부하고 말 것이 아니라, 어떻게 현대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할 것인지는 문화기획자의 관점이 중요하다. 우리가 바라보는 시선이 이곳을 찾는 방문객에게는 새로운 시야가 될 수 있음을 잊어버리면 안된다.


이십대의 나는 열정적이었다. 일을 배우는 재미도 있었고, 프로젝트가 잘 마무리됐을 때 성취감도 있었다. 동시에 너무 많은 프로젝트에 투입될 때는, 이렇게까지 날 쥐어짜야 되나 싶기도 했지만. 생각해보면 그때의 업무들이 일을 대하는 태도를 배우게했고, 일을 처리하는 나만의 스타일을 갖춰나가는 데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당시 회사 대표는 종종 우리에게 '스페셜리스트와 제너럴리스트'에 대해 말을 했다. 나만의 특별한 무기를 장착하고, 다방면에서 경험과 노하우를 갖춘 인재가 되는 것이 회사를 떠나서도 개인에게 몹시 중요한 것이라고. 그러면서 덧붙였다. 우리가 하는 일이 뭘까요? 본인도 아주 오랫동안 고민해오며 찾은 답은 "우리는 지역의 크고작은 문제를 발견하고, 문화를 통해 해결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나는 그말이 참 좋았다. 문화기획자란 뭘까? 일에 파묻혀 내가 왜 일을 하고 있는지 잊어버릴 때마다, 그때 대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프로젝트를 돌리다보면, 내가 일을 진두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일의 속도를 급하게 쫓아갈 때가 생긴다. 속도를 제어할 수 없고, 기계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상황들이 여러번 반복되자 일에 대한 회의감이 생겼다. 일을 하는 기계처럼 사는 것이 버거워, 회사와 오랜시간 이야길 나눴고, 제주로 내려가고 싶다는 나의 결정을 존중해줬다.


마지막 근무를 하던 날, 회사짐을 싸들고 나오는데 울컥 눈물이 났다. 나의 이십대여 안녕. 이곳에서 불태웠던 나의 청춘도 안녕. 즐거웠다. 정작 일을 할 때는 스스로 문화기획자로 말하는 게 쑥스러웠는데, 퇴사 후 프로필 정리를 하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이 일을 사랑하는 문화기획자였는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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