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by 몽유

눈가로 스며드는 빗방울이 미지근한 날이 있다. 오래 입지도 않았는데, 축 늘어진 셔츠의 목깃처럼 예상하지 못한 부끄러운 모양새로 내 속을 낱낱이 드러내는 날이 있다. 그런 날에는 우스꽝스럽게도 나는 첫사랑의 그녀를 만났던 그날을 떠올리곤 한다. 어쩌면 그렇게도 어리숙할 수가 있었던 것일까. 그것이 닮은 날이다. 어리숙함은 곧 순수함이라는 말이 있던데, 일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단지 일면일 뿐이지만 말이다.

어떤 우연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마치 무슨 운명씩이나 되는 것처럼 너와 나는 그 시간에 그곳을 지나게 되었을까. 그래서, 그토록 향긋한 봄 중의 하늘빛 아래에서 갑작스러운 여우비를 만나고 노란 우산 속에서 동그랗게 젖은 어깨를 훔쳐보게 되었을까.


가끔은, 아주 드물게는 아니더라도 잠깐씩 쉬었다 가야 한다. 그것이 꽤나 괜찮은 쉼으로 생각될 때가 있다. 마음속에서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는 어떤 걱정이라도 고요히 잠재워야 한다. 손가락 사이를 꿈틀거리며 빠져나가려는 일체의 관심을 애써 움켜쥘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할 수 있을 때에만 가질 수 있는 여유라는 것이 있는 거다.

축축하게 두 눈을 적시는 물안개 짙은 바다에서도 걱정과 두려움만이 앞서가며 마냥 머릿속을 어지럽히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토록 짙은 물안개가 온전히 나의 세상을 에워싸고 있는 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군데군데 틈을 만들어 길을 내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 브런치 북에서는 사람을 이야기하려 한다. 처음에는 지금껏 내 삶에서 그리움으로 남은 사람을 말하려고 했다. 이 사람들을 쭈욱 나열해 보았더니 어처구니없게도 막연하게 예상했던 수치보다 너무 적은 사람들만이 눈에 아른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아무래도 내가 잘못 살아온 것인가 하는 의구심에 빠지는 것이 싫어 조금은 뻔뻔스러워 지기로 한다.


꼭 그리움만이 아닌, 갑작스러운 봄비 속에서 마주친 너도 써보기로 한다. 하얀색과 검은색으로만 입혀진 찻집에서 나눴던 조금은 유치하고, 조금은 수수했던 이야기도 담고 있다. 뉘엿뉘엿 느릿하게 해가 넘어가는 석양을 뒤로한 작은 텐트에 나란히 앉아 어깨에 기대어 잠들었던 포근함도 있다. 그날밤 저수지 방둑 위로 쏟아져 내리는 그토록 수많은 별을 보며 괜스레 소환당한 윤동주시인의 애처로움도 이야기해야 하겠다. 한여름의 지리산과 차가운 겨울 아침 얼어붙은 계곡물에 손을 담갔던 이야기는 여전히 차갑다. 아쉬움은 그대로 내버려 두면 나중에 무엇이 되던 기억 속에 남을 것인데, 그것도 끄집어내어 보겠다.


그러고 보면 머릿속 어딘가에 꼭꼭 처박혀 있는 해묵은 기억들을 괜스레 건드는 것이 아닐까. 다시 또 그 모든 장면들에 숨어있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뿐만 아니라 부끄러운 지난날들을 고백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아직 시작도 전인데 벌써부터 저기 가슴속 어느 한 구석에서는 낯이 빨갛게 물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뜬금없이 가슴속에서 불쑥불쑥 솟아오르며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이 정체불명의 낯선 감정은 꼭 풀어헤쳐야 하겠다.


keyword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