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에 컴백하며...
이것은 일종의 의식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쭈~욱 다시 들어보고
앞면&뒷면&모서리&내부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사진을 찍고
당근에 전체 상태를 상세하게 적어 올리고
구매자를 만나 전해주는 것까지...!
이것은 오랫동안 소장하고 있던
CD, 카세트테이프, LP 를 보내주는 일종의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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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의식을 요즘 즐기고 있다.
몇 년 전 지금 살고 있는 집이 모아타운(가로주택정비사업)으로 지정이 되면서
설마 했는데 최근 조합설립인가까지 마쳤다.
빠르다.
부정도 해보고 짜증도 내보고 화도 내보며 거부했지만
진행이 매우 빠르다.
일반 재개발, 재건축이라면 5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모를 일이지만
모아타운인 점을 고려해 봐도 빠르다.
옆구역이 벌써 통합심의를 통과하고 감정평가까지 들어간 거 보면
우리 구역도 이사 나가야 할 시점이 금방 다가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어찌 됐든
언젠가는 이사를 나가야 할 터이니 미리 한번 집안을 둘어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미 짐정리가 꽤 되어 있어서 무엇을 더 줄일 수 있을까...
쳐다보던 중에
건드릴 생각이 없던 이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사할 때마다 열어보지도 않고 갖고만 다니던 추억상자들!
그렇다.
이것들을 보내지 않고서는 짐이 줄 것 같지 않았다.
지난 몇 년 전 부모님 두 분이 다 돌아가시고 사시던 집을 빼야 했던 날.
큰 언니는 소장할 물건들을 나르느라 바빴고
작은 언니는 본인의 이사때문에 바빴고
나만...
부모님 집의 짐이 전부 나가는 걸 지키고 있어야 했었을 때
다짐했었다.
내 짐은 꼭 내가 살아있을 때 내가 정리해야지...!
라고.
꽤 많이 정리하면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추억상자들을 보니 난 아직도 너무 많은 걸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열어본 추억상자들 중 가장 많은 부피를 차지하고 있던 건
오래된 CD, 카세트테이프, LP
이것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부피가 줄 것 같지 않았다.
조금 더 나이가 들면 정리할 에너지도 없겠다 싶어서 당장 준비를 시작했다.
음......이것들을 판매하려면 일단 들어봐야 한다.
먼저 CD와 카세트테이프를 동시에 플레이할 수 있는 기기를 구매했다.
(음......짐이 더 늘었다...턴테이블도 구매해야 하는데)
판매를 알아보려고 네이버의 전문 카페 두 군데를 가입했다.
(음......카페를 둘러보다가 소장욕구가 더 늘어날 수 있는 단점이 있는데)
준비를 마치고 카페를 둘러봤지만 판매를 위한 진입장벽은 높았다.
단지 판매만을 위해 카페활동을 하는 거는 나도 양심에 찔려서
거기서는 정보만 얻기로 했다.
중고나라도 가입했지만 왠지 이쪽은 께름칙했다.
결국 당근으로 돌아왔다.
한동안 활동하지 않던 당근으로 다시 돌아왔다.
오랜 CD, 카세트테이프 등을 싸게 한 번에 파는 분들도 많았지만
일단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앞서 이야기했듯 나만의 의식을 치루는데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가격설정이었다.
싸게 처분하듯이 팔고 싶지 않았고
(되팔이에게 갈 가능성도 있다...)
나한테 소중한 물건이라고 비싸게 팔아서도 안되니
중요한 건 가격이었다.
정말 원하는 사람들이 가져갈만한 합리적인 가격.
당근에서도 이 세계는 다르다.
다른 물품은 저렴한 게 최고라 웬만하면 필요한 사람들이 알아서 사가지만
이 물건들은 일부 사람들에게만 구매욕구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것들의 가치를 알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그래서 그들이 가져갈 수 있는 합리적인 가격으로 정말 꼼꼼하게 중고가격을 서치해서 가격을 책정했고
나만의 의식을 치르며 하나씩 판매를 시작했다.
처음엔 반응이 하나도 없었다.
한동안 진짜 너무 없었다.
역시 당근은 그저 싼 게 최고인 건가... 판매처를 옮겨야 하나...
고민을 하던 차
드디어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반응이 오기 시작하자 하나씩 새로운 주인들이 나타났다.
"이광조의 사랑을 잃어버린 나" tape는 나이 지긋하신 분이 워크맨까지 들고 와서 이리저리 듣고
음질을 확인 후 괜찮다며 가져가셨다.
(들으시는 동안 잔뜩 긴장했지만 오히려 좋았다... 그만큼 이 tape를 아껴주실 분이니까!)
"세상에서 가장 여유로운 음악"이라는 CD는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나신 분이
세상이 너무 각박해서 이 음악을 들으면서 여유를 찾으려고요~~~
라는 말을 남기며 마음씨 좋은 미소와 함께 바람같이 CD를 가지고 떠나셨다.
5CD 중 3번 CD가 없어 싸게 내놓았던 "쿠바 음악" CD 4개는 본인한테 1,2번 CD가 없어 구매하시는 거라며 전부 쿨거래로 가져가셨다. 중복되는 게 있는데도 말이다!
필요한 분이 가져가셨으니 덕분에 보내는 내 마음도 기뻤다.
"M.C The Max 3집"은 여성분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젊은 남성 청년이 나타났는데
CD 좀 모으시나 봐요~라고 물었더니
아~ M.C The Max 노래를 좋아해서요~~~라는 세상 기쁜 대답을 해주고 쿨하게 떠났다.
물론 아직도 진상은 있다.
올리자마자 대뜸 내가 직거래로 사 줄 테니 깎아달라~는 어이없는 채팅이 올 때도 있지만
"당근"은 살아있었다.
하나씩 제자리를... 아니 새로운 주인을 알아서 잘 찾아가는 게 너무도 신기하고 뿌듯한 요즘이다.
아직 본게임은 시작도 안 했기에
들어봐야 할 음악이 많이 남아 있는 게 너무나 설레는 요즘이다.
지금도 거실에서는 다음 번에 보내줄 CD가 플레이되고 있다.
오랜만에 울려 퍼지는 그 시절의 노랫소리가 집안의 공기를 바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