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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랑의 책읽기 Apr 28. 2020

전체주의 국가의 끝판왕

[1984], 조지 오웰


"Big brother is watching you"
너무 많이 들어서 마치 읽은 것 같았던 [1984]를 드디어 보았다.
보고 난 직후 첫 소감: [블랙 미러] 의 원형이 여기 있었구나! :)
[블랙 미러]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느꼈던 찜찜함은 [1984]에 비하면 상쾌한 탄산수였다.


2014년 Penguin book에서 새 판본으로 나온 [1984]의 "검열" 표지. 몇 년이 지난 후 표지가 "덜 검열된 것 같이" 변했다는 제보들이 올라왔다.


유럽과 미국인들에게 1930-40년대는 말 그대로 ‘혼돈과 공포’의 시대였을 것이다. 유럽 전역에서 전체주의 정권들—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이 속속 등장하고, 나치와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세계를 정복하기 직전까지 가고, 핵폭탄과 함께 전쟁이 끝나고, 하지만 여전히 전체주의 국가들의 불씨는 남아있고. 


1949년에 출판된 [1984]가 그리는 질문은 명확하다. 전체주의 국가들이 완벽하게 대중을 지배하는 세계는 어떠할까.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전체주의Totalitarianism 는 “반대집단을 금지하고, 국가와 국가의 주장에 반대하는 개인을 제압하고, 개개인의 사적-공적 삶을 극도로 관리하는 정치체제”이다. 완벽한 형태의 권위주의, 또는 극단적 형태의 집단주의라고 볼 수 있겠다.


Tutto nello Stato, niente al di fuori dello Stato, nulla contro lo Stato.
(모든 것은 국가에 있으며, 국가 외에는 어떤 것도 없으며, 국가에 반대하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베니토 무솔리니


앞으로 얘기할 내용은 어쩔 수 없이 스포일러 잔뜩.



전체주의국가의 외부적 통제: 국가가 정보권력을 독점한다.


성공한 전체주의 국가의 모습은 어떨까? 국가가 완벽하게 개인의 자유를 통제하려면 어떤 조치가 필요할까? [1984] 는 이 질문에 대한 정교한 해답이다.


첫번째 필요조건: 국가가 정보권력을 독점한다. 개인은 감시당하는 것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채로 국가에 감시당하고, 국가는 매우 제한된 (그리고 거의 모두 거짓인) 정보만 개인에게 제공한다.


주인공인 윈스턴이 살고 있는 곳은 런던인데, 이미 오래 전에 <오세아니아> 라는 전체주의 국가의 일부분이 되었다. 오세아니아가 언제 수립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심지어 현재 날짜가 1984년인지도 윈스턴은 정확하게 모른다. 날짜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대신, 당의 슬로건은 눈에 보이는 곳에 항상 자리한다.


> 윈스턴이 서 있는 곳에서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당의 세 가지 슬로건이 멋진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제1부-1)


윈스턴이 하고 있는 일은 정보권력의 독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의 업무는 과거의 신문기사, 연설문 등의 자료를 상부의 지시에 맞게 수정(!)하는 것이다. 하루는 그에게, 위에서 “무인”(unperson: 국가에 의해 숙청당해 세상에서 사라진 자)이라고 주장하는 당 고위 책임자와 관련한 모든 기사를 삭제하게 된다. 


> 연설문을 반역자나 사상범에 대한 상투적인 비난으로 바꿀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너무 빤한 것이고 전선에서 거둔 승리나 제9차 3개년 계획의 초과 달성에 대한 기쁜 소식으로 바꾸는 것은 기록이 아주 복잡해질 수 있었다. 상상력을 동원해 완전히 조작할 필요가 있었다. (제1부-4)


윈스턴의 작업으로, 그에 관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고,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완전히 망각한다. (이렇게 숙청당한 사람의 기록을 지워해는 것은 실제로 소련에서 자주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몇 년 전 읽은  어떤 책에서, 조선일보 기자인 저자가 역사적 사실에 대한 100% 허구 기사를 예시로 들은 뒤 “이렇게 디테일 넘치게 쓰는 것이 좋은 글이다”라고 주장했던 것이 생각났다. 거짓을 사실처럼 디테일넘치게 쓰는 행위는 정보권력독점의 최종 목적이다. 


[1984]에서 또 하나의 명문.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제1부-3)


박근혜정부시절 역사교과서 논쟁이 생각나는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반지성주의, 극단적으로 반과학주의는 이러한 정보권력독점과 합이 잘 맞는다.


> [골드스타인의 책 중] 오늘날 오세아니아에는 옛날 방식의 과학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신어에는 과학이라는 단어가 없다. 과거의 모든 과학적 업적이 기초하고 있는 사고의 경험적 방식은 영사의 가장 기본적 원리와 매치된다. 그리고 심지어 기술의 발전도 그 결과가 어떤 면에서 인간 자유를 감소시키는 데 사용될 수 있을 때에만 행해진다. (제2부-9)



전체주의국가의 내부적 통제: 당은 개인의 행동을 조종하려 갖은 노력을 다한다.


하지만 정보권력의 독점은 전면적 통제의 시작점일 뿐이고, 궁극적인 목표는 개인 “행동”의 통제이다 (“자유는 예속”). 이를 위해서 개인은 각종 이데올로기에 의해 세뇌당해야 한다. 항상 국가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기 위해서, 개인은 자신의 기억을 실시간으로 통제하며 논리에 맞지 않는 것을 맞다고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1984]에서 이중사고Doublethink 라고 부르는 행위이다.


>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가 당의 슬로건이다. 그러나 과거는 그 본질이 바뀔 수 있음에도 결코 바뀐 적이 없었다. 지금 진실한 것은 영원히 진실한 것이 된다. 이것은 극히 간단한 것이다. 필요한 것은 자신의 기억을 끊임없이 지배하는 것뿐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현실 통제>라 불렀고 신어로는 이중 사고이다. (제1부-3)


> 당이 본질적 행위는 완전히 정직하게 수행되는 확고한 목적을 가지고 의식적 사기를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중 사고는 영사INGSOC의 핵심이 된다. 거짓말을 진실로 믿으면서 의도적인 거짓말을 하고, 불필요한 사실을 잊어버렸다가 그것이 다시 필요할 때 꼭 필요한 기간 동안만 망각으로부터 다시 기억해 내고, 객관적 현실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동시에 부정한 현실을 고려하는 것 등 모든 것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제2부-9)


언어에 대한 고찰도 매우 흥미롭다. 오세아니아는 자국의 언어를 끊임없이 “축소”시켜나간다. 사고를 제한시키기 위해서는 사고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언어를 제한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자유라는 개념을 사라지게 하려면 “자유”라는 말 자체를 지워버리면 된다. 전체주의 국가에게 대중의 “무지는 힘”이 된다.


> 자유라는 개념도 사라졌는데 <자유는 예속>이라는 슬로건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어? 사상적 분위기도 확 바뀌게 될 거야. 사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그런 사상은 존재하지 ,않게>되지. 정통주의라는 것은 사고하지 않는 것을 뜻해.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거지. 정통주의는 곧 무의식이야. (제1부-5)


생물학적 욕망 역시 통제해야 한다. 


> 당원들은 일하거나 식사를 하거나 잠을 자지 않을 때에는 일종의 단체 오락에 참가해야 했다. 고독의 기미가 보이는 일을 하거나 심지어 혼자 산책하는 것도 언제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것을 신어로 <독생ownlife> 이라 불렀다. (제1부-8)


> (줄리아) 행진을 하고 고함을 지르고 깃발을 흔드는 이 모든 것들이 단순히 성행위의 왜곡된 형태들이지요. 우리가 내면적으로 행복하다면 빅 브러더, 3개년 계획, 2분 증오와 같은 빌어먹을 썩은 것들에 대해 왜 흥분하겠어요?
…윈스턴은 그녀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금욕과 정치적 열정 사이에는 직접적이고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강력한 본능을 한쪽으로 몰아 추진력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당이 당원들에게 요구하는 공포, 증오, 광적 맹신을 어떻게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제2부-3)


마지막으로, 당의 요구를 지키지 않는 개인에게는 무자비한 폭력을 가한다. 


> (오브라이언) “두리가 밤낮으로 투쟁해서 얻어야만 하는 권력, 그 진정한 권력은 사물에 대한 권력이 아니고 인간에 대한 권력이지…..다른 사람에 대해 자신의 권력을 어떻게 행사할 수 있지?”
(윈스턴) “그 자에게 고통을 주면 되잖아요.”
(오브라이언) “그렇지. 고통을 주면 되지. 복종만으로 충분하지 않아….권력이란 고통과 굴욕을 가하는 데 있어. 권력은 인간 정신을 산산조각 내 우리가 선택한 새로운 모양으로 다시 짜 맞추는 데 있는 거야. 자, 이제 우리가 어떤 세계를 창조하려는지 좀 알 것 같은가? 그것은 구개혁론자들이 상상했던 그런 어리석은 향락주의적 유토피아와 정반대의 것이지. 다시 말해 공포와 배신과 고문이 난무하는 세계, 짓밟고 짓밟히는 세계, 스스로 세련되면 될수록 <더> 무자비해지는 세계지. (제3장-3)

전체주의는 부자연스러운 사회시스템이다. 


[1984]에서 그리고 있는 전체주의 디스토피아를 읽으면서 드는 역설적 생각: 전체주의란 참으로 부자연스러운 사회시스템이다. 생각해보면, 한 국가가 수많은 개인의 다양한 욕망과 사고를 획일화하는 것이 절대로 쉬운 작업은 아니다. [1984]의 오세아니아에서도 윈스턴처럼 자유로운 행동을 갈망하는 개인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 [윈스턴의 일기에서] 미래를 향해, 과거를 향해, 자고가 장롭고 인간들이 서로 다르고 혼자서 살지 않는 시대에—진실이 존재하고 한번 이루어진 일이 없어질 수 없는 시대를 향해. 획일성의 시대로부터, 고독의 시대로부터, 빅 브러더의 시대로부터, 이중 사고의 시대로부터—축복이 있기를! (제1부-2)


결국 “나보다 국가를 우선시해야 한다”라는 집단주의가 강력한 윤리의식으로 작동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선 위협적인 적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전쟁은 평화”). 적이 존재해야 집단이 나에게 주는 효용이 극대화된다. 

하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조건은 경제적 빈곤이다. 풍요로운 사회에서는 개인들의 “잉여 사고”가 늘어날 수 밖에 없고, 아주 약한 계기만 있어도 이는 정치적 자각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 [골드스타인의 책 중] 결국 계층 사회는 빈곤과 무지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제2부-9)


조만간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읽어봐야겠다. 두 개의 서로 다른 디스토피아가 21세기 현재와 얼마나 가까운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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