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진형 인터뷰: 아이브매거진 (2)
어제에 이어서 주진형의 인터뷰를 기록.
https://www.youtube.com/watch?v=fZj279JzyNo
주진형이 평생을 두고 고민해온 문제가 ‘재벌개혁’이다. 이 인터뷰에서 그는 한국 재벌시스템의 문제점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재벌시스템 그 이후’에 대한 고민을 빼놓지 않고, 자신 역시 해답을 찾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얘기한다.
인터뷰 초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양립 가능한가?”라는 윤여준의 추상적인 질문에, 주진형은 단호하게 “양립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주진형이 생각하는 해답은 ‘제대로 된 경쟁정책’이다.
서두에 그가 꺼내는 경쟁의 본질에 대한 통찰은 너무 정확해서, ‘이 단순한 얘기를 내가 왜 이제서야 처음 듣게 된 거지’ 싶을 정도.
> (주진형) “경쟁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가능하면 불공정하게 경쟁하고 싶게 되어있어요. 누구든지. 자기에게 유리한 방법으로…. 상호배타적이고 상호배제적인 것이죠. 배제할 수 있는 경쟁을 모두가 원해요. 그래서 경쟁이 사회적으로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배제하지 않는 방법이 되도록 끊임없이 규칙을 집행하는 룰메이커가 필요해요. (2:47)
주진형의 경쟁정책에 대한 생각은 이전 포스팅에 썼던 Tim Wu의 그것과 맥이 같다. 사적 이득을 추구하는 시장참여자들의 행위가 공적 이득으로 이어지려면, 상대방이 배제되지 않게 끊임없이 노력하는 제3의 룰메이커가 필요하다. 시장은 정글이 아니라 정원이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완전경쟁시장”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끊임없이 가꾸어주어야 하는 정원같은 것이다.
반면 한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다른 모든 분야의 시스템이 그러하듯) 제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한 관료들이 사라진 상태이다.
> 그런데 한국은 [경쟁과 관련한 규칙을] 관료의 자의적인 개입에만 의존해왔지, 그것을 제도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개방을 한 후] 자본주의의 힘이 점점 세졌지요…. 강한 국가, 약한 사회에서 경제자유화가 이루어진 후로는 모두 뒤죽박죽이 되어버렸지요” (3:15)
윤여준의 ‘public company’ 이야기는 기억해 둘 만 하다. 한국 사람들은 아직 “공적 주체”라는 개념이 익숙하지 않다.
> (윤여준) “미국에서 회사가 상장을 하면 그것을 ‘public company’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공적기업이라는 뜻인데, 우리는 상장을 한 그 큰 회사들의 총수들이 전횡을 하잖아요? 철저한 사기업인 것이죠. 경영도 소유도 세습하면서. 왜 우리는 그렇게 미국의 제도를 수입하기 좋아하면서, 돼 이런 건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요?” (6:12)
최근 한국 사회에서 혁신과 활력이 돌았던 분야는 IT이다. 기존 재벌 시스템과 독립적으로 자라난 거의 유일한 산업분야라고 볼 수 있다. ‘왜 한국에서 IT 스타트업이 활성화되었는가’에 대한 주진형의 통찰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시장지배자가 휘청할 때, 사회에 새로운 활력이 생긴다.
> (주진형) 이 사람들이 언제 생겼냐? IMF 위기 때문에 문이 열렸어요. 이 사람들이 이전까지 재벌기업을 다니던 사람들이에요. 그러다가, 경제위기 터지고, 정부에서 벤처에 돈 많이 끌어다 주고, 그래서 기업에 있던 사람들이 뛰쳐나와서 창업을 한 거죠. 그 중에 몇 명이 성공을 한 것이고. Technology shock과 경제위기 쇼크가 겹치면서 잠깐 대기업이 모든 것을 쥐고 있던 컨트롤이 잠깐 약해진 거죠. 재벌들이 기존 포트폴리오 정리를 하고 있는 동안 문이 열렸어요….그 뒤에 경제는 안정화를 찾아서, 재벌이 다시 컨트롤을 가지고 나서는 막힌 것이죠. (42:00)
재벌. 한국의 경쟁정책의 현실을 얘기할 때 재벌시스템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주진형은 우선 ‘재벌개혁’이라는 거대한 덩어리를 잘게 나누어서 논의가 샛길로 빠지지 않도록 한다.
> (주진형) 세가지로 개념적으로 나누어봐야 합니다. 대기업과, 대기업군과, 대기업군을 소수의 사람들이 세습에 의해서 컨트롤하는 것…..대기업군에 의한 경제력집중에 대한 문제가 총수를 없앤다고 같이 없어질 것 같지는 않아요. (12:20)
> (주진형) “만약에 일본처럼 적어도 도둑질을 하지 않는 대기업중심체제로 가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이냐? 우리나라 개혁세력의 가장 큰 고민거리가 거기 있다고 봐요.” (9:33)
세 개의 층위.
1. 대기업: 하나의 industry를 소수의 기업이 독과점하는 것. 예) 가전시장 (삼성-LG), 맥주시장 (하이트진로), 자동차시장 (현대자동차).
2. 대기업군: 여러 개의 industry에 걸쳐 대기업들이 연합을 형성하는 것. 예) 삼성전자-삼성건설-삼성생명. 그 밖의 수 많은 XX그룹.
3. 대기업군을 소수의 사람들이 세습지배하는 행위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불법행위). 예) 이재용.
한국-일본-미국-독일의 상황이 제각기 다르다. 한국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1)-(2)-(3)의 현상이 모두 존재한다. 일본은 (주진형에 의하면) (1)-(2)만 있고 (3)은 없다. 미국은 (Tim Wu에 의하면) (1)은 강하고 (최근에 더 강해지는 중), (2)-(3)은 존재하지 않는다. 독일은 (아마도) 세 층위가 다 약한 시장구조를 가진다.
현재 한국의 (“적폐청산” 흐름에 맞추는) 재벌개혁논의는 주로 (3)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일단 재벌이 법을 어기는 것만큼은 막아야 하지 않느냐. 물론 옳은 얘기다. 하지만 위에서 얘기했던 제대로 된 경쟁시스템을 위해서는 (1)과 (2)에 대한 냉철한 고찰이 필요하다. Tim Wu의 신랄한 미국경쟁체제 비판은 오로지 (1)에 관한 것이었다. 주진형이 재벌해체를 “결과로만 보면 바람직하다” (11:25) 라고 보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하지만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주진형이 굳게 믿는 것처럼 재벌해체가 결과로만 봤을때는 바람직할까? 예를 들어, 장하준은 정반대로 "재벌을 이용"하면 한국경제를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얘기한다. 재벌독점구조는 정부주도의 경제성장정책에 아주 적합한 시장시스템이다. 소수의 재벌은 암묵적인 합의를 통해 국가정부가 제시하는 아젠다에 동참할 수 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좋게 말하면 협상, 나쁘게 말하면 부패가 수반된다). 그런데 모든 기업이 개별화된다면 국가가 이를 컨트롤하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만약 재벌이 모두 해체된 후, 각 회사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중국자본이 이를 인수하는 것이 반복된다면?
국가가 소수의 재벌과 Bargaining을 통해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느냐, 아니면 철저하게 제도화된 시스템에 의해 결정되느냐 하는 답안지가 놓여있다. 쉽지 않은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