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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랑의 책읽기 Aug 31. 2020

아렌트의 '작업': 세계 만들기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4장 '작업'



[인간의 조건] 3장 ‘노동’ 에 이어서 4장 ‘작업’ 읽기. 5장 '활동'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 숨고르기를 하는 느낌이었다. 


이 글에서 인용한 두 권의 책:

1.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이진우 옮김, 한길사 (2019년 제2개정판)

2.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을 읽는 시간], 나카마사 마사키, 김경원 옮김, 아르테


'작업'으로 만들어진 사물은 세계에 들어가 객관성을 가진다.


아렌트에게 ‘노동’과 ‘작업’을 구분하는 기준은 “세계 안에서 지속하는 사물을 만들어내는 것인지”의 여부이다. 노동은 단순히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쓰이기 때문에, 세계를 바꾸지 못한다. 아렌트의 ‘노동’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는 인간은 동물과 별다른 점이 없다. 반면, 작업은 내구성을 가지는 사물을 세상에 내놓는다. 한 번 세상에 놓여진 사물은 ‘세계’를 변화시키며, 인간 생명의 부조리함으로부터 벗어난 ‘인위적 객관성’을 확보한다. 


> 사물들에게 그것을 생산하고 사용하는 인간으로부터의 상대적 독자성과 ‘객관성’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 지속성이다. 객관성으로 인해 사물들은 적어도 잠시나마 생산자이자 사용자인 인간의 탐욕스러운 욕구와 필요에 ‘저항하여’ 지속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세계의 사물은 인간의 삶을 안정시키는 기능을 하며 (…) 달리 말해, 인간의 주관성에 대립하는 것은 손대지 않은 자연의 숭고한 무관심이기보다 인위적 세계의 객관성이다. [아렌트, 230-231]


‘사물’을 건축물로, ‘세계’를 도시로 치환하면 이해가 쉽다. 읽으면서 계속 느끼는 바이지만, 한나 아렌트는 건축가와 도시계획자들이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사상가이다. 김진애가 MIT에서 도시학 박사과정을 보낼 때, 많은 수업에서 한나 아렌트의 글이 리딩 리스트에 있었다고 한다. 한나 아렌트가 젊었을 때 친밀하게 교류한 건축가가 있는지 궁금해진다.



작업은 사물을 만들어내고, 사물은 세계에 속한다. 한나 아렌트는 사물이 세계에 속하는 순간, “사물의 원형” 즉 “이데아” 역시 세계에 존재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활동적 삶의 위계 안에서 제작이 가지는 중요성은, 그 형상을 통해 제작과정을 주도하는 이미지나 모델이 제작에 선행할 뿐만 아니라 제품이 완성된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렌트, 235] 한 건물이 만들어지면, 그 건물이 지향했던 목적 또한 세계에 존재하게 되고, 그 목적은 건물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우리의 기억을 통해서, 또는 그 목적을 이어받은 다른 사물에 의해서—세계에 남게 된다. 


> 개개의 사물은 마모되어 없어진다 해도 그것을 산출한 이데아적인 것이 영속적으로 존재함으로써 ‘세계’는 존속합니다. 이데아로 인해 존속 가능한 세계이기 때문에 물질적인 제약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마사키, 265]


한나 아렌트가 최근의 ‘디지털 사회’를 보면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하다. 디지털 세계에서 만들어진 사물은 마모되지 않고, 영구히 세계에 존재한다. 디지털 세계 인간들의 모든 기록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축적된다. 이 세계는 아렌트가 바라는 형태의 세계일까.



세계는 "더 나은 세계"를 만들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작업이라는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라는 까다로운 질문에 답해야 한다. ‘노동하는 동물’은 단지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지만, ‘작업인’ 즉 ‘호모 파베르’는 이를 넘어서 ‘세계’에 공헌한다. 그런데 이 세계를 만들어서 인간이 얻는 것이 뭘까? 


공리주의자들은 이 질문에 “인간 효용의 최대화” 라는 간결한 답변을 한다. 하지만 아렌트는 공리주의자들을 매우 경계하고, '효용’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세계를 좀 더 ‘유용’하게, 더 ‘효율적’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렇게 발전한 세계는 다시 무엇인가를 또 (더 효율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아렌트의 말에 따르면 유의미성을 무시하고 유용성만 중시하는 공리주의는 “수단과 목적의 끝없는 연쇄에 빠진다”. 


> 우수한 호모 파베르의 철학이라 할 수 있는 일관된 공리주의의 문제점은 이론적으로 유용성과 유의미성의 구별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적 무능력이라고 진단할 수 있다.  (…) 고트홀트 레싱Gotthold Lessing이 동시대의 공리주의 철학자에게 제기했던 질문, “사용의 사용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없는 것은 명백하다. 공리주의에서 당혹스러운 것은 목적과 수단의 범주, 즉 유용성의 범주 자체를 정당화하는 원리에 도달하지 못한 채, 수단과 목적의 끝없는 연쇄에 빠진다는 사실이다. [아렌트, 249]


‘호모 파베르’ 는 ‘노동하는 동물’보다는 한 단계 더 진보한 인간상이지만, 이를 이상적 인간상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세계의 의미를 보지 못하고, 유용성으로만 보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이는 전편에서 말했던 ‘재산’과 ‘부’의 차이와 관련이 있다. 나의 소유물을 숫자로만 인식하는 것이 내 삶에 무슨 소용인가.


> 모든 것은 반드시 유용성을 지녀야 하는, 즉 그 밖의 다른 것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야만 하는 호모 파베르의 세계에서, 의미 자체는 오직 최종 목적이나 ‘목적 자체’로만 나타날 수 있다. 이 ‘목적 자체’는 실제로 모든 목적에 적용되는 동어반복이거나 용어상 모순된다. 왜냐하면 목적이 달성되면 목적은 목적이기를 그치고 수단의 선택을 지도하고 정당화하며 수단을 생산하고 조직하는 능력을 잃기 때문이다. [아렌트, 250]


> [호모 파베르는] 결국 ‘목적-수단’이라는 관점으로밖에 사고할 수 없기 때문에 ‘세계’안에서 ‘유의미성’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억지로 생각하려고 해도 그로서는 ‘복적 자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에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생명 사이클 안에 흘러들어 운동하고 있는 ‘노동하는 동물’이 ‘수단’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서술합니다. [마사키, 288]


아렌트에 의하면 플라톤은 이미 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해법도 알고 있었다. 플라톤은 세계를 단지 사용하는 것 뿐만 아니라, ‘말하기, 행위하기, 사유하기’ 같이 세계를 경험하는 새로운 방법이 있다고 생각했다.


> 호모 파베르를 인간의 최고 가능성으로 간주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그리스인들이 의식했다는 것은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에 대한 유명한 논증에서 잘 드러난다. 프로타고라스는 겉보기에 자명한 것처럼 보이는 진술을 하고 있다. “인간은 모든 사용물건(chromata)의 척도이자 존재하는 것의 존재의 척도이고 존재하지 않는 것의 비존재의 척도다.” (전통과 표준 번역에서 그가 말했다고 하지만, 프로타고라스는 분명히 “인간이 만물의 척도다”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중요한 점은 플라톤이, 만일 인간이 사용을 위한 모든 사물의 척도가 된다면 인간은 사용자나 도구화하는 자가 되며, 세계와 관계를 맺는 말하는 자 행위하는 자, 사유하는 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즉시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아렌트, 253-254]


이 세계를 경험하는 새로운 방법은 바로 “정치행위”이다. 5장 ‘활동’에서 이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서술할 것 같다.



가치는 공공 영역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부’에 대한, 또 자본주의에 대한 아렌트의 평가를 미루어 볼 때, 아렌트는 교환시장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할 것 같다. 하지만 예상외로, 아렌트는 교환시장의 공공적 성격을 강조한다. 정치영역만큼은 아니지만, 시장에서도 공공의 활동은 이루어진다.


> 노동하는 동물의 사회생활은 무세계적이고 종족집단과 비슷하기 때문에 그들은 공적이고 세계적인 영역을 만들어 거기에 거주할 능력이 없다. 이런 노동하는 동물과는 달리, 호모 파베르는 정치영역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공론 영역을 충분히 가질 수 있다. 그의 공론 영역은 교환시장이다. 여기서 그는 자기 손의 생산품을 보여줄 수 있고 거기에 합당한 존경을 받을 수 있다. [아렌트, 256]


아렌트의 논중 중 인상적인 부분은 사물의’ 가치’를 오로치 공공의 관점에서만 파악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구분하고 이 둘의 어긋남을 논증의 중요 지점으로 삼았다. 그는 “공론 영역을 혐오했던 입장과 일치되게 초지일관 사용가치에서 교환가치로의 변화를 자본주의의 원죄로 생각했다”[아렌트, 262]. 하지만 아렌트에게는 “교환가치”가 유일한 사물의 가치이다. 


> 이 가치values는 오로지 공론 영역을 존중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사물은 이 영역에서 상품으로 나타나며 어떤 대상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노동도 생산도 자본도 이윤도 원료도 아니라, 단지 그리고 오로지 공론 영역이다. 이 영역에서 대상은 존중받거나 무시되거나 요구된다. 가치는 어떤 물건이 사적 영역에서는 소유할 수 없지만 공적으로 나타나는 순간 자동으로 획득되는 자질이다. [아렌트, 260]


마르크스는 교환가치를 자본주의의 원죄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대안, “모든 재화를 노동하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분배하는 사회주의에서 구체적인 모든 사물은 삶과 노동력의 재생산과정 안의 한 기능으로 변한다.” [아렌트, 262] 인간이 다시 노동하는 생명체로 돌아가는 것이다.


> 다시 말해 아렌트의 관점으로 보면 생명력으로서 ‘노동’의 재생산을 강조한 마르크스주의는 ‘작업’을 통해 ‘사물’에 객관적으로 부여하는 ‘worth’도, ‘시장=공적’ 영역에서 간주관저긍로 형성되는 ‘value’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생명체로서의 인간밖에는 관심이 없는 마르크스주의는 ‘사물’과 제대로 직면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마사키, 308]



[인간의 조건] 4장까지 아렌트는 이상적인 인간의 삶, 이상적인 세계의 모습을 서술하기 위해 “~는 아니다”라는 부정문을 계속 사용해왔다. 이제 5장 ‘활동’에서는 ‘이것이다’라는 서술을 볼 수 있을까. 아렌트의 ‘정치적 인간’에 대한 서술이 기대된다.


> 마르크스는 (…) 정치적 동물이라는 인간에 대한 정의가 고대의 특징이라면 프랭클린이 내린 인간에 대한 정의, 즉 도구제작자는 ‘양키기질’, 즉 근대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고대가 호모파베르의 배제에 열중했던 것처럼 근대는 정치적 인간, 즉 행위하고 토론하는 인간을 공론 영역에서 배제하는 데 열중했다는 사실에서 마르크스의 말이 참임을 알 수 있다. [아렌트 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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