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규, [경제적 영역에서의 예외 - 정치의 복원]
최정규 교수의 좋은 글. 근대 시장자유주의를 알고 싶은 (더 정확하게는, 시장자유주의가 불편한) 사람들의 “baseline”이 되어주는 글.
현대 경제학의 세계에는 ‘정치적 영역’이 없다. 아바 레르너가 “경제적 거래는 이미 해결된 정치적 문제”라고 말할 때, 이는 경제학이 ‘이미 계약이 성립된 사회’를 가정하고, 따라서 폭력과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다룬다는 얘기이다. 한나 아렌트가 얘기하는 ‘공적 영역’이 사라진 세상이다.
> 한나 아렌트가 지적했듯이, 근대에 들어서면서 모든 공동체는 단순히 노동과 작업의 영역, 즉 생물학적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일들이 이루어지는 영역에 의해 지배되고, 사회라는 것은 먹고살기 위해서는 상호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 말고는 어떠한 공적인 의미도 갖지 않는 것으로 변모했으며, 공적 영역이란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 올바른 살므이 방향을 찾아나가는 행위와 언행의 장소가 아니라 단순한 행정 영역으로 변했다면, 그 모습을 경제학만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학문이 또 있을까? 다시 말하면 경제학이란 어떠한 가식도 어떻나 주저함도 없이 근대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는 학문이다. [300]
이 ‘자유주의’라는 괴물은 무엇인가? 최정규 교수가 자유주의를 분석하는 방식은 내 취향을 저격한다. 그는 말한다. 자유주의가 불편한가? 흥분하지 말고, 그들의 생각이 어떠한지 천천히 탑을 쌓아나가자. 그러면서 그 탑의 허점을 찾아보도록 하자.
자유주의의 매트릭스 설계자들은 집단의 폭력으로부터 해방된 개인을 만들고 싶어한다. 왜? 타인에게 가하는 폭력이 최소화된 사회를 만들고 싶은 열망, 혹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창의력을 최대화하고 싶은 마음 등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신과 집단으로부터 분리된 개인이 열심히 살아갈 동력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상가들은 ‘이기심’이라는 동력을 중요시했다.
> 사회라는 힘에 이끌려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수동적 인간들이 능동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내적 동력이 확보되어야 했다. 어찌 보면 자기애 혹은 이기심을 능가할 만한 강력한 동력은 없었다. [307]
이기심이 원동력이 되는 개인들을 상호교류하는 사회 시스템으로 ‘시장’만큼 적당한 것은 없다. 폭력이나 강제로부터 자유로운, 계약에 근거한 시장은 심지어 ‘도덕적’ 인간을 만들어줄 수 있다.
> 시장이 경제적으로만이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더욱 세련된 주체를 만들어낸다는 주장은 근대 형성 시기 몽테스키외, 볼테르, 그리고 애덤 스미스 등에게서 나타나는데, 이러한 주장을 가리켜 ‘달콤한 상업doux commerce’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둘째, 특히 충돌의 문제와 관련해서, 설계자는 모든 새인들 간의 관계가 시장에서의 가격을 통해 매개되는 경우 그들 사이에서의 충돌을 막아낼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312]
시장은 깨끗하다. 시장 안에서 개인들은 소유권을 보장받으며 잘 정리된 계약을 통해 상호간의 이익을 증진시킨다. 무엇보다 시장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지배적 권력집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종교로부터,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개인들이 시장을 통해 상호작용하는 세계. 자유주의자들의 이상적 세계이다.
> 자유주의적 근대 속에서는 ‘정치’가 설 영역이 없다. 우선 우화 속에는 루소가 그리던 공공선을 위해 공적 영역에 참여하고 연대함으로써 일반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도 없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하던 옳은 삶의 내용을 구성하기 위한 그래서 시민적 덕성을 실형하기 위한 소통과 실천의 정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 이전 사회에서 억압으로부터의 “정치적 해방은 어떤 보편적 내용의 등장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라고 한 마르크스의 언급은 우리가 재구성한 근대의 성립 과정을 너무도 정확히 표현해준다. [314]
이 완벽해보이는 세계에 어떤 허점이 있을까? 자본주의하에서 노동자가 착취당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에 맞서, 자유주의자들은 "완전경쟁 시장에서 누가 누구를 고용하는지는 정말 중요하지 않다. 자본이 노동을 고용해서 문제가 된다면, 노동자가 자본을 빌리게 해보자” (폴 사뮤엘슨)이라고 말한다. 결국 시장이 우리를 구원할 것인가?
최정규 교수는 노동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이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 노동이 자본의 소유자에게 고용될 때는 노동 능력뿐 아니라 노동자도 따라가야 한다는 데 있다. (…) 자본의 소유자가 노동을 고용한 경우 생산 현장에서 자본 소유자의 의사결정에 따라 노동자를 지휘하게 되는 것은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자유주의가 그토록 거부했던 인간의 인간에 대한 권력행사의 가능성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318]
결국 문제는 노동시장이다. 그런데 자유주의자들은“하지만 계약을 제대로 성립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는 반론을 펼칠 것이다. 이에 대해 최정규 교수는 “모든 계약은 불완전하다”라는 당연한 명제를 꺼낸다. [도덕경제학]에서도 얘기하듯이 완전계약은 허상에 불과하다. 결국 불완전한 계약 하에서 자본가와 노동자 간에는 권력구조가 형성될 수 밖에 없다. 자유주의자들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정치는 사라지지 않는다.
> 자본 소유자에게 생산의 공간은 외부의 간섭을 배제할 권리가 있는 ‘사적 공간’이다. (…) 소유권과 [노동자의] 인권이 갈등하는 곳에서 우리의 설계자라면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줘야 할까? 현실의 자유주의는 소유권의 편을 들어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절대 군주들에 대항했던 바로 그 논리로 기업 내 고용주의 권력을 문제 삼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을까? 로버트 달Robert A. Dahl이 말했든 “근대 기업에서 재산권이 노동자들의 민주적 권리보다 우월해야”하는 이유는 없다. 이것이 자유주의적 이상으로 만들어진 근대 매트릭스 내에서도 여전히 정치를 이야기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이유다. [320-321]
여기서부터는 전적으로 나의 가설. 내가 생각하는 시장자유주의의 허점은 다음과 같다. “승자들이 체제를 바꿀 수 있다는 것”. 자유주의자들의 암묵적인 신념은, “완전경쟁시장”이라는 규칙을 한 번 만들면 그 규칙은 영원불멸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매우 다르다. 한 자본가가 시장을 장악하며 big player가 되는 순간, 그는 사회의 규칙을 슬그머니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20세기말-21세기초에 슬금슬금 비경쟁적으로 변한 미국의 시장들이 대표적인 예.
사실 체제규칙의 내생적 변화는 어떤 종류의 ‘이상적 체제’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 국가들이 붕괴한 큰 이유 중 하나도 결국 관료사회의 부패 아닐까.
‘이상적 체제’하에서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이 ‘시스템이 잘 돌아가고 있다’라는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다. 시장이 모든 갈등을 해결해준다고 믿으면, 대중들은 ‘정치행위’에서 관심이 멀어진다. 그만큼 승자가 야금야금 체제를 바꾸기가 쉬워진다. 나는 최근 50년간 미국에서 시장이 독과점화되는 반면 유럽에서는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지 않은것이 바로 시민들의 ‘정치의식 부재’에 있다고 생각한다. 밀튼 프리드먼이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매력적인 주장을 펼칠 때, 미국은 그만큼 ‘시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회’로 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