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몇 대째 맛을 지켜온 라멘집에서 가업을 물려받은 주인장이 혼자 주방을 지키며 리드미컬하게 움직인다.
면을 끓는 물에 넣고 타이머를 누르는 동시에 익혀진 다른 면을 꺼내탁탁 털어 물기를 뺀다. 뜨거운 물로 데워놓은 그릇에 푹 끓여진 육수국물한 국자와 면을 넣고 긴 젓가락으로 휘휘 젓는다. 한편에 삶아놓은 고기를 꺼내 어슷하게 썰어서 면 위에 얹고 숟가락을 꽂아 손님에게 내어준다.
요즘 내가 즐겨보는 것은 가업을 물려받은 장인이 달인의 경지에 오른 기술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류의 영상 콘텐츠들이다.
그 과정을 보고 있으면 쓸데없는 생각들은 사라지고 그들의 동작 하나하나를 눈으로 쫓으며 힐링하게 된다.
그러다 문득 부러운 감정이 생겨나는데, 그것은 수려한 그들의 기술보다는 '물려받을 수 있는 어떤 영역'이 있다는 점에서이다.
나름의 고민이 있었겠지만, 물려받을 무언가가 있다면 무얼 해야하는지에 대한 지난한 고민을 생략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시대착오적인 이런 생각에 잠기는 것은 요즘 다시 진로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탓이다.
40대에 진로고민을 한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진로고민은 나이에 상관없이 살아가는 동안 계속되어야 하고 계속할 수밖에 없다.
'진로'라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긴 여정에서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결정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직업 결정에만 국한되지 않는 전생애에 걸친 과정이다.
진로문제는 수학처럼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길을 찾아가는 여정과 닮아있기에 때로는 지금 나의 위치를 다시 확인해 보고 때로는 지도를 업데이트하며 여행길을 보다 풍성하게 만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뭘 먹고살 것인지, 어떤 직업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치열하게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충분하게 하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아가는듯하다.
나도 처음 비영리 사회적 기업에서 일을 시작할 무렵에는 인생의 사명과 목표, 진로와 커리어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하던 시기가 있었다. 내향적이고 스스로 생각을 많이 하는 성향때문일 수 있지만, 그 시기에는 거의 매일을 진로에 대한 고민을 했었던 것 같다. 시간을 들여 치열한 고민 끝에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현재의 조직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고민들은 점차 옅어지기 시작했다. 결혼과 출산으로 한 가정을 꾸리게 되면서 먼 미래에 대한 전망보다는 당장 오늘, 이번달을 버텨내기 위해 애쓸 수밖에 없었고 바쁜 일상과 생계를 위해 조금씩 현실과 타협하며 지내왔다.
그렇게 10년이 지나고 어느 순간 에너지가 소진되고 번아웃을 겪으며 잠시 멈춰서 인생의 방향과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은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살 것인가?"
가장 크고 우선이 되는 질문은 인생 전반에 대한 전망이다. 사명이라고 할 수도 있고 전생애에 걸쳐 이루고자 하는 삶의 목적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질문은 거창한 성취나 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누군가는 명확한 사명과 꿈을 지니고 살아가지만 누군가는 어렴풋한 방향성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기도 하는 법이다.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가, 주변사람들과 관계할 때 어떤 관점을 가지고 어떤 태도와 행동으로 대할 것인가로 구현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정체성에 대한 문제이며, 자기 자신의 자화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스스로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일상을 살아가고 나이를 먹고 주변사람들에게 기억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며 그 정체성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는 것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가 아버지세대(혹은 실제 아버지)에게 꼰대스런 말과 행동을 발견하고 반면교사로 삼으려다가도 그들과 같은 언행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며 흠칫 놀라는 부끄러움에 빠지지 않으려면, 자신의 정체성 목표를 자주 들여다봐야 한다.
오늘의 나는 어제보다 어떤 변화가 있었고 정체성 목표에 얼마나 다가가고 있는지를 점검하면서, 어떤 결과를 얻었는가 보다 얼마나 성장했는가에 집중하고 그 성장을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나는 누구이고, 어떤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어 할까?
세상의 많은 것들을 공부하고 탐구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 공부할 시간이 필요하다. 조직에서 사업계획 수립 워크숍을 진행하듯 스스로의 정체성목표 수립을 위해 집중하는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 볼 필요가 있다.
이때의 정체성이란 직업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생의 모든 영역에 관한 것이며, 필요에 따라서는 신체적, 정신적, 직장, 가정, 지인 및 네트워크, 사회 등 영역을 나누어 각각의 영역에서 어떤 정체성을 가지면 좋을지 목표를 세워보는 것도 좋다.
나의 경우에 정체성에 관하여 가장 먼저 정립한 목표는 자유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 자유한 상태를 보다 구체적으로 가다듬고 가꾸어서 생의 목표로 삼을 수 있도록 살펴보려고 한다.
자유한 사람이고 싶다.
일상을 살아가는 순간마다 스스로 주도권을 가지고 보다 만족스러운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대단히 정의롭지는 못하더라도 스스로 부끄럽거나 후회할 만한 결정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 신념이나 사상적으로도 경제적이나 신체적으로도 자유한 사람이고 싶다.
"뭘 먹고살 것인가?"
요즘은 실제로 뭘 먹는지가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생계와 관련하여 뭘 먹고살지에 대한 질문은 모두에게 필수적이다. 정체성의 방향이 정립되었다면 생계를 이어갈 직업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
40대가 되면 직업에 관한 고민은 끝날 것 같지만, 조직에서 임원으로 승진하는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들은 커리어의 다음 스텝을 고려하게 된다. 최근에는 40대부터 명예퇴직 명단에 오른다고 하니 더욱 치열한 고민이 필요해졌다.
지금의 40대들은 그동안 업계에서 좌충우돌을 겪어가며 나름의 경험을 쌓아 이제야 비로소 어느 정도의 지위에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일해온 만큼, 혹은 그것보다 더 오랜 기간 일을 해야 하는 현실에 처했다.
과거보다 더 오래 일해야 하고 더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40대들은 어떤 일을 선택해야 할까?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초점을 맞춰 일을 선택하는 과정이 필요해 보인다.
인생 2막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시점에서 현실의 상황들 때문에스스로가 지향하는 삶의 방향과 정체성에 닿지 않은 일을 선택한다면 생각보다 오랜 기간 행복의 기회를 놓치게 되는 셈이다.
기존의 경험이나 쌓아온 커리어, 가족이나 인간관계, 사회적 지위와 체면 등 스스로의 기준이 아닌 다른 기준들 때문에 원치 않는 일을 선택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니체가 말했던 것처럼 '익숙한 것과 결별하고 보다 위험한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진짜 내가 원하는 일,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할 수 있기를 세상의 모든 40대와 나 스스로에게 바라본다.
이렇게 스스로의 정체성에 부합한 일을 찾기 위해서는 금전적인 보상보다 일의 다른 요소들을 더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할 수도 있다.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 난이도와 성취감, 사회적 가치와 의미, 함께하는 사람들, 자기 계발과 성장, 취향이나 선호 등 다양한 요소들을 살펴보아야 그 일이 자신이 원하는 일인지 선명해질 것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기존의 커리어를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이미 소속되어 있는 자리를 유지하면서도 스스로의 정체성을 담아내려는 시도는 가능하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담아 일하는 모습은 어떤 것인지 그려보고 조금씩 그 모습으로 자신을 변화시켜 가면 된다.
만일 자신이 디자이너라면 어떠한 디자이너가 될 것인지, 영업을 담당한다면 어떠한 영업인이 될 것인지, 비영리 활동가라면 어떤 활동가가 될 것인지 보다 구체화하고 그러한 모습이 될 수 있도록 변화하며 정체성을 지켜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더 많은 선택지를 갖추기 위해서 새롭게 등장하는 기술과 업에 대한 포용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존에 가지고 있는 전문성에 최근 대두되는 기술과 변화를 어떻게 접목할 수 있을지 살펴보며 융합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열어두는 사람에게는 기회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는 시대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어떤 일상을 살 것인가?
원대한 인생의 사명과 목표를 가지고 직업적 비전을 수립했다고 하더라도 결국 하루하루의 일상을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삶의 만족도와 행복감을 결정하게 된다.
일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습관을 결정해야 하는데, 일상의 순간마다 마주하는 소소한 작은 선택들을 자신의 정체성 목표에 맞추어 일치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스스로 전문성과 영향력을 갖춘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매 순간 타인과의 관계에서 배려있는 태도와 친절한 행동을 해야 한다. 부정적인 언행보다는 긍정적인 태도로 자신의 영향력을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삶의 방식을 자신의 인생목표와 일치시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정체성 목표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비건이나 귀촌과 같이 보다 자연 친화적인 삶의 태도를 선택할 것인가? 독서, 일기, 운동 등 매일의 루틴을 세팅할 것인가? 자본을 축적하고 경제적 자유를 즐기는 일상을 살고 싶은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서로 교류하는 것을 즐기는가? 가족들과 어떤 시간을 보낼 것인가?
우리가 매일의 일상을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고 스스로의 목표와 함께 일상을 살아가는 삶의 태도와 방식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반복되는 진로고민의 끝은 없다.
아마 앞으로도 고민은 계속될 것이고 뚜렷한 정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진로고민의 핵심은 '나'에 대한 이해인데, 40년을 살아봐도 아직 나를 잘 모르겠고, 이만큼을 살았어도 인생을 아직 모르겠는데 어쩌겠는가?
조금 희망적인 것은 예전만큼 미칠듯한 혼란에서는 벗어난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조금 더 나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확신도 가지게 되었다.
나의 선택이 옳은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선택한 길을 묵묵히 세심하게 신경 써서 애써서 걸어가다 보면 나의 선택에 후회와 불행이 조금은 덜 할 것이라는 것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