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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원다인 Apr 25. 2024

묵은 차를 활용하는 가장 향기로운 방법

완벽한 차 한잔을 위한 레서피

차를 즐기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악성재고(?) 문제를 경험하게 된다. 사람의 욕심이라는 게... 햇차가 나오면 맛보고 싶고, 맛보면 사야 하고... 무소유를 실천하신 법정스님도 '차 욕심은 어찌 못하겠어'라고 고백하셨던 것으로 위안을 삼을 따름이다.


매일매일 차를 마신다 해도 찬장 한켠에는 언제 샀는지, 무슨 종류인지도 모를, 끈덕지게 몇 년을 버텨내는 차 봉지가 있기 마련이다. 묵혀서 먹는 흑차, 백차류나 보관 기간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홍차류를 제외하고 나머지 차류, 특히 녹차는 조금만 오래되어도 본래의 맛과 향이 상한다. 녹차는 생산하자마자, 싱싱할 때 봄과 여름에, 늦어도 그해 겨울까지 소비하는 게 가장 현명하다 생각한다. 


차를 꾸준히 잘 마신다고 해도 내 취향에 맞지 않는, 가까운 이로부터 선물 받은 아무개 차는 영 손이 가지 않는다. 준 사람의 성의가 있어서 함부로 버리지도 못하고... 이를 활용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나 그 중 제일은 탈취제라고 예전에 소개했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정에서 묵은 차를 더 향기롭게 활용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단, 안전상의 문제로 가스가 아닌 전기레인지를 사용하는 경우에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준비물:

묵은 차: 어떤 차도 무방한데 떡차류는 잘게 부숴 줘야 해서 적합지 않다. 잎차가 좋다.

안 쓰는 스테인리스 냄비 또는 프라이팬: 코팅이 안된 스테인리스 제품이 좋다. 코팅 제품은 자칫 코팅이 타면서 안 좋은 냄새나 유해 가스 발생할 수 있다. 프라이팬에 기름때가 남아 있다면 물론 깨끗이 제거!

핫플레이트나 하이라이트 방식 전기레인지: 인덕션 방식은 잔열이 많이 남지 않아서 적합지 않을 듯하다


요즘 하이라이트 방식의 전기 레인지를 많이 사용한다. 예전에 쓰던 가스레인지가 전기레인지로 대체가 되고 있다. 전기레인지로 찻물을 끓여 보니 타이머를 사용하여 가열시간을 정할 수 있는 게 큰 장점이다. 단점이라면 아무래도 화력이 가스레인지 보다 약해서 물이 끓을 때까지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는 점인데 기다리지 않고 타이머를 사용하면 거의 의식할 수도 없는 단점이 되어 버린다. 이 보다 더 큰 단점은 물을 끓이고 난 뒤에도 레인지 화구에 열이 상당 시간 동안 남아 있어서 화상 등 안전사고의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이 신경 쓰여서 찻물을 끓이고 나서 비워낸 주전자를 잔열이 남아 있는 화구에 올려놓기도 했었다. 그러다 작은 사고를 겪었다.


빈 주전자를 잔열이 남아 있는 화구에 올려놓고 고요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주방에서 펑하며 터지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가보니 주방에 뭐가 터지거나 넘친 흔적은 없고 다만 빈 주전자가 옆으로 기울어 있는 것이었다. 주전자를 들어 올려서 바닥을 보니 놀랍게도 바닥이 부풀어 있었다. 스테인리스 주전자의 바닥이 이중으로 되어 있는데 그 사이에 수분이 침투하여 있다가 열을 받으니 폭발한 것이었다. 주전자의 사용설명서를 찾아보니 "내용물을 채우지 않은 채로 가열하지 마시오"라고 써져 있었다. 나원 참. 직접 불을 켜고 가열한 것도 아닌데. 찻물을 끓이고 난 빈 화구의 잔열이 이렇게까지 높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 사고가 계기가 되어서 전기레인지 화구의 잔열이 상당히 높고, 오래 감을 알게 되었고 이를 활용할 방안이 없을까 궁리를 하게 되었다. 물을 끓이고 나면 한참 동안 H(hot! 열주의)라는 경고 신호가 켜져 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잘 안 쓰는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에 묵은 차를 올려서 찻물을 끓이고 난 화구에 올려놓는 방법이다. 잔열로 찻잎이 데워지며 향을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실험 삼아 한참 묵은 골동(?) 녹차를 안 쓰는 프라이팬에 올려서 전기레인지에 놓아 보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향이 근사하게 났다. 한동안 은은한 차향이 두루 퍼지는데 마치 찻잎을 처음 덖을 때와 같은 분위기도 연출이 되었다. 찻물을 끓이고 난 잔열을 활용해 차를 마시는 분위기를 돋우는 효과를 낼 수 있다니! 찻잎을 가열하여 향을 내는 제품들이 시중에 있기는 하던데 찻물을 끓이고 난 잔열을 활용하고, 화상 사고 위험을 줄이고, 묵은 차를 활용하니 일석삼조라 안 할 수가 없다. 차 말고 다른 허브를 올려도 훌륭했다.


찻잎 대신 로즈마리 잎을 올렸다. H 는 화구에 열이 남아 있다는 신호


작가는 전기레인지 옆에 묵은 차나 허브를 올려놓은 프라이팬을 항상 비치해 놓고 찻물을 끓이거나 음식 조리를 한 후 가열된 화구에 올려준다. 음식 냄새를 제거하는 데에 차향이 효과적인 것은 상식이다. 찻자리를 갖는 동안 계속 차향을 즐기고 싶다면 전기레인지를 가장 약한 세기로 켜 놓는다(주의: 전기레인지마다 세기가 다르기 때문에 미리 세기를 파악하고 화재 가능성은 없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반복해서 사용하며 한참 향을 내다보면 차향도 점차 줄어들고 풀잎 타는 냄새가 점점 많이 나게 된다. 열이 높은 경우 살짝살짝 찻잎이 타기도 하는데 경험상 검게 될 정도로 타는 경우는 없었다. 차향이 거의 사라졌다 싶으면 찻잎을 버리고 다른 묵은 찻잎으로 교체를 해준다. 매일 사용을 해도 한 달 이상, 상당히 오랫동안 차향을 즐길 수 있었다. 자주 차를 즐기지는 않더라도 전기레인지가 있는 집이라면 한 번 시도해 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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