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왕의 남자>, 이준익 감독
<왕의 남자> 속 사건은 괴리된 인간들의 충돌이다. 영화 속 주요 인물들을 그러한 괴리로 이끌어 가는 것은 다른 인물이나 관계가 아니라, '궁궐'과 '세계'라는 틀이다. 어떤 작품은 어긋난 인간들이 서로의 결함을 아름답게 채워나가는 것을 그리지만 <왕의 남자>는 틀에 맞지 않는 자들의 맞닿음에서 피어나는 불꽃놀이를 그린다. 그 불꽃은 화려하지도 강렬하지도 않다. 그저 처량할 뿐.
<왕의 남자>는 공길과 장생의 이야기가 아니라, 공길과 장생, 그리고 연산군의 이야기이다. 연산군을 빼면 공길과 장생은 연인이 되지만 연산군이 들어가는 순간 그 둘은 부부의 관계가 된다. 연산군이 장생에게 갖는 감정은 단순한 질투가 아니라 인정할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다. 이렇게 맞춰놓고 나면, <왕의 남자>는 아주 전형적인 삼각 관계의 서사로 압축된다.
6인의 부모
영화는 연산군에게 세 쌍의 부모를 준다. 첫째는 친부인 선왕(성종)과 친모 폐비 윤씨이다. 그들은 온전치 않다. 선왕은 친모를 죽였고, 선왕이 정한 법도는 여전히 연산군의 목을 조인다. (역사 속)연산군은 평생 친부를 혐오했고, 친모를 그리워하나 희미한 기억만 가진 채 왕위에 올랐다. 그들은 연산군에게 그저 그림자로만 존재한다. 부재는 존재보다 더욱 큰 고통이다. 또한 그들은 연산군에게 끔찍한 짐을 남겼다. 바로 '궁궐'이라는 집과 '왕'이라는 자리다.
공길과 장생이 궁에 들어오기 전까지, 친부모의 부재를 대신하던 이들은 내시 처선과 후궁 장녹수이다. 그들은 궁궐에 어울리는 인물들이다. 조선에서 궁에 상주할 수 있는 얼마 없는 계층이 내시와 후궁이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온전치 않다. 처선은 성기가 없는 환관이고 녹수는 모성을 이해할 수 없는 여자이다. 처선에게는 아버지와 내시의 역할이 혼재하고, 녹수에게는 어머니와 후궁의 역할이 혼재한다. 그들은 궁궐의 법도 안에 살고 있으며 그 한계가 결국 그들을 막아선다. 왕의 하급자인 처선은 왕의 잘못을 제지할 힘이 없다. 공길에게 남자가 맞나며 그의 옷을 벗기려 하는 장면에서 드러나는 녹수의 질투는 그녀가 끝내 연산군에게 사랑을 주기보다, 그의 사랑을 쟁취하여야 생존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암시이다. 이들의 역할적 한계는 그 둘 사이의 역학에서 드러난다. 처선과 녹수는 극을 통틀어 단 한 번도 서로 대화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둘은 서로 분리된 두 남녀일뿐 진정으로 부모의 역할을 대체할 수 없다. 물론 그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 처선은 아들의 즐거움과 훈육을 위해 광대를 궁으로 불러들인다. 녹수는 아들에게 젖을 먹이고, 공길과 결별한 그가 자궁으로 돌아오도록 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가 모두 연산군의 몰락으로 이어졌다는 길이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마지막 부모는 장생과 공길이다. 둘은 천한 광대이다. 자궁이 없는 어머니 공길, 눈이 먼 아버지 장생. 그들도 온전치 못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들은 궁궐 밖에서, 연산군을 옭아매는 틀 밖에서 온 부모다. 공길은 연산군과 인형극을 하며 과거의 상처를 치유한다. 악행을 일삼는 연산군을 안타까워하며 보듬어주는 것도 공길이다. 장생은 연산군을 대신해 그의 적인 대신들을 성토하고, 후에는 연산군을 꾸짖는다. 장생과 공길은 왕의 부모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도리어 가장 본질적인 부모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연산은 결국 아버지의 눈을 뽑고 자궁이 없는 어머니를 떠나보낸다. 결여된 여섯은 온전한 둘을 대체할 수 없었다.
궁궐 속 아이
왕이 되기 싫었던 한 아이는 공길의 인형극을 통해 동심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미 겉모습이 어른이 되어버린 연산군은 그 부조화를 버티지 못한다. 연산군에게는 연정과 모정이 같고, 사랑과 폭력이 동일하다. 녹수가 연산군에게 젖을 줄지 술을 줄지 묻는 장면을 돌아보라. 그 두 액체는 연산군에게 있어 구분되지 않는, 미충족된 구강기의 표출일 뿐이다.
영화 초반, 공길은 연극을 통해 노골적으로 녹수를 비유하며 등장한다. 그러나 연산군이 처음으로 공길을 따로 부른 밤, 인형극을 통해 공길은 녹수의 대체자가 아닌 새로운 모성의 자격을 얻는다. 아들은 놀아달라고 보채고 엄마는 자애롭게 인형놀이를 보여준다. 서로는 어쩌면 서로에게 최초일 모자 관계를 이룬다. 관객들은 모두 알고 있다. 그들이 여기서 멈추었어야 한다는 것을.
처선의 오판으로 인해 경극 마당이 열리고, 공길은 친모의 자리를 대체해버린다. 그런데 정말 경극이 그 도화선이었을까? 연산군 마음 속 친모의 부재는 마치 진공처럼 주변의 어떤 것이든 빨아들이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대체할 수 없는 것을 대체하게 된 공길은 폭주하는 연산군의 결핍을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 결핍의 종말점은 자기 파괴이다. 그는 자신을 낳은 어머니가 자신을 쏴 죽여주기를 은연 중에 바란다. 하지만 공길은 그를 낳지도, 죽이지도 못한다. 옆쪽 기둥에 활을 쏘고 기절한 공길에게 다가간 연산군은 아기처럼 두세번 머리를 박다가 갑작스럽고 처절하게 어른의 입맞춤을 한다. 여전히, 그는 그 둘을 구분하지 못한다.
평범한 아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성장 과정을 그는 얻지 못했다. 적절한 부모의 부재 때문이다. 어린 아이들이 좋아하는 대상을 괴롭히듯 그는 신명나게 북을 치다가 결국 그것을 찢어버린다. 말 몇 마디로 장생과 공길을 극악의 고통 속에 쉽게 몰아넣는다. 슬프게도 그것이 가능한 것은 그를 이루는 겉모습이 아이가 아니라 어른, 왕이기 때문이다. 그의 찢겨진 정체성은 공길의 모성을 몰아낸다. 극의 후반부, 연산군은 자신의 겉모습이 속한 궁궐 속 인물들에게 돌아가 가짜 어머니 녹수의 품에 안겨 가짜 아버지 처선을 애타고 섬뜩하게 부른다. 다시 한 번 나와 놀자며.
장씨들
남자는 아내의 사랑을 반드시 아이에게 빼앗긴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정해져있다. 그러나 사회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는 부부 관계 속에 있는 장생은, 연산군에게로 공길의 사랑이 향하는 것에 분노한다. 따져보면 장생 역시 모성과 연정을 혼동하고 있다. 연산군의 혼동이 성장 과정에서의 부재에서 온다면, 장생의 혼동은 공길의 성적 정체성에서 온다. 남성이 어떻게 어미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 이면에서, 남성이 연인은 될 수 있다는 어두운 승인을 그는 애써 무시한다.
영화에서 공길과 연산군은 어떠한 성적 관계도 맺지 않으나 장생은 언제나 그것을 의심한다. 그 관계를 의심하는 사람은 하나 더 있다. 바로 녹수이다. 장씨 성의 두 남녀는 연산군과 공길이 모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아 고통받는다. 첫 번째 인형극이 끝난 뒤 연산군과 공길이 보이는 태도는 그들의 오해를 더욱 강화한다. 두 사람에게 구원과 같던 인형극의 밤은, 다른 둘에게는 지옥과 같은 밤이 된다. 그들의 의심은 그들이 살고 있는 틀 안에서 정당하다.
이러한 괴리의 원인은 공길의 존재이다. 장씨 성의 두 남녀가 공길을 대하는 고통은 본질적으로 공길의 여성성, 즉 '여자보다 더 고운' 선과 태에서 온다. 사극이라는 배경에서 오는 수직관계를 제거하고 나면 공길, 연산군과 녹수, 장생의 관계도는 아름다운 여주인공을 중심에 둔 전형적인 남녀 하이틴 드라마와 다름 없다.
이준익 감독은 이준기라는 걸출한 배우를 발굴해 공길이라는 인물에 설득력을 불어넣었다. 이준기의 외모와 연기는 연산군과 장생의 혼동을 쉽게 합리화함과 동시에, 동성애에 대한 관객의 장벽을 은근슬쩍 허물어버린다. 이는 안전하고 효과적인 선택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작은 아쉬움을 남긴다. 충분히 아름답다면 그럴 수도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충분히 아름답지 않다면, 그럴 수 없는 것인가? 그런데 사랑이 언제부터 설득력의 영역이었던가?
두 남자의 무대
장생과 연산군의 관계 사이의 팽팽한 긴장은 이중적이다. 연산군은 장생에게서 연적과 아버지를 동시에 본다. 어머니가 사랑하는 존재, 그리고 남자 대 남자로서의 경쟁심리. 왕좌 위 광대와, 놀이판 위 왕. 서로는 놀랍지만 고전적으로 서로의 자리를 갈구한다. 그리고 그 욕망의 이면에는 공길이 자리한다.
눈이 공길을 쫓더라도, 연산군이 즐기는 모든 연극의 주인공은 장생이다. 비록 공길이 꽃과 같이 필지언정 그 모든 장면은 장생이 주관한다. 장생은 모든 것이 억제된 궁궐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이 움직이는 존재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해 '내가 정말 왕이 맞느냐'고 애타게 묻는 연산군은 연극에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장생을 통해 본인의 억눌린 역동성을 해소한다. 궁궐이라는 미완의 자궁 속에서 몸부림치는 연산군에게 장생과 그의 무대는 바깥 세상에서 난입한 남성성이다.
장생은 궁궐 밖에서 온 자유로운 광대이지만 그 역시 광대극을 통해서만 자신의 억압을 해소할 수 있다. 장생을 억압하는 것은 권력이나 구조가 아니라 동성(공길)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라는, 내면적 굴레이기 때문이다. 광대극에서 장생은 공길에게 여성의 탈을 씌워 자신의 사랑을 정당화하고 해방한다. 그러므로 장생은 완전하게 연산군과 대립하지 않고, 오히려 동일시된다. 그들은 각자를 둘러싼 세계의 법도와 분열되어 고통 받고 있는 유사품들이다. 오직 광대극이라는 환상만이 그들을 구원한다.
그러나 동시에 장생의 광대극은 궁궐을 위협한다. 아이는 환상을 현실로 가져오려고 한다. 아버지와의 놀이가 끝나지 않으니 집에는 피가 낭자해진다. 여기서 궁궐이라는 자궁의 본질이 드러난다. 궁궐은 한 아이를 위한 곳이 아니라 권력과 구조의 지속성을 위한 곳이다. 궁궐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마치 면역계처럼 광대극을 제거하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사냥놀이를 빙자한 시도가 부적절하게 마무리되고 궁궐은 마침내 깨닫는다. 아이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이 불편한 면역 거부 반응을 해결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므로 <왕의 남자>에서 권력과 예술의 대립은 연산군과 장생의 교점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 대립은 점이 아닌 면에서, 궁궐과 광대극이 맞닿는 경계에서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왕의 남자> 속 중종반정은 마치 자궁이 스스로에 걸맞지 않은 고장난 생명을 몰아내는 아주 슬픈 낙태의 과정처럼 보인다. 영화의 이면에서 궁궐은 다시 정상화될 것이다. 광대극은 끝날 것이고, 궁궐에 걸맞는 어른이 불완전한 아이의 자리를 차지하였을 것이다.
영화의 끝, 어머니와 아버지가 줄 위에서 아들을 위한 마지막 공연이자 혼례를 벌이는 장면에서 그 아들이 짓는 표정의 통쾌함과 처연함은 언제나 모골을 송연하게 한다.
<왕의 남자>는 연산군이라는 한 아이를 두고 여섯 부모가 모두 실패하는 이야기이다. 이미 땅에 묻힌 생부와 생모에 더해, 궁 밖에서 온 두 부모는 반허공 줄 위에서 승천하고 궁 안에서 만난 두 부모는 그 지붕 아래에서 죽는다. 궁궐이 아니었다면 아이는 행복해질 수 있었을까? 그들의 결핍은 궁궐이 만든 것인가?
존경하는 허문영 평론가는 <왕의 남자>를 두 남자의 대립과, 그 사이에 낀 두 중재자의 한계로 해석했다. 장생과 연산군을 두 대립자로 세웠으며, 처선과 공길은 중재자로 작용했다고 본 것이다. 허문영의 시선에서도 여전히 공길은 대체 어머니이지만 그는 장생을 대체 아버지로 보지는 않은 듯하다. 즉 내 시선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셈인데, 나는 이 관점 차이조차 오이디푸스적 요소를 담고 있는 것 같아 흥미롭게 느낀다. 남자는 적인가, 아버지인가?
눈을 감다
비록 장생은 부정하지만, 본디 광대는 궁에서 '시키는대로 깝치는 꼭두각시'일 수 밖에 없다. 광대놀이 뿐이랴. 그들은 사냥놀이를 위해 동물 역할을 해야하고 녹수의 얕은 꾀로도 대역죄인이 된다. 장생은 거기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매번 그 중심으로 떨어진다. 광대극 속에서 가장 자유로운 장생이지만, 그 판은 언제나 남이 짜놓은 것이다. 눈을 뜨고 있는 한 장생은 자신을 억누르는 세계와 마주해야 한다.
그를 구원하기 위해서인지 극 중에는 장생과 공길의 맹인극이 두 번 나온다. 첫째는 극의 초반, 장생과 공길이 광대패에서 도망친 직후이고 다른 하나는 극의 하이라이트인 가장 마지막 장면이다. 두 번의 탈출, 장생과 공길은 눈을 감아야만 비로소 세계와 단절되고, 해방된다.
그런데 광대가 어찌 맹인일 수 있을까? 눈을 감은 둘은 서로에게조차 쉬이 닿지 못한다. 그러나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다"는 선언(첫번째 맹인극), 또 한 사람이 줄을 통해 전해지는 진동으로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의식(두번째 맹인극)을 통해 그들은 서로를 인지한다. 세계와 단절되더라도 인간의 관계는 남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하게 사랑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깊다. 어찌되었건, 눈 뜬 자들의 세상은 그들에게 너무 가혹하다. 눈을 잃은 장생은 줄 위에서 마지막 자유를 찾는다. 줄 아래에서 장생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세계는 눈을 뜨고 있는 자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왕과 광대의 메타포는 매우 흔하다. 아주 오랜 고전에서부터 <위대한 독재자>로, 또 이 영화 이후에도 <광해>가 또 한번 답습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닳고 닳은 권력과 해방의 은유를 과하게 사용하지 않는다. 거창한 구호를 외치는 대신 이준익 감독은 인물 안으로 파고든다. 이러한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배우들의 빛나는 연기이다. 왕의 자리에 앉은 채 울먹이는 이준기의 열연에서는 먹과 술이 섞인 끈적한 내음이 난다. 당시의 신드롬이나 모 석류음료 CF로만 기억되기에는 그의 연기가 너무나 뛰어났다. 감우성은 그러한 이준기를 맞대면하면서도 극을 끌어가는 진정한 주연으로서의 위력을 증명했다. 강성연의 녹수가 나오는 장면은 한없이 길게 이어지길 바라게 된다. 또 웃기지 못하면 죽을 위기의 광대극 시퀀스는 유해진, 정석용, 이승훈이라는 뛰어난 배우들에게 크게 의지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것이 정진영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직관적으로 전달되는 그의 눈빛과 표정만큼이나, 어쩌면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전신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중신들로부터 뛰쳐나올때의 걸음, 방 안에서 화살을 겨눌 때의 경직된 어깨, 인형극이나 공길과의 키스에서 보이는 칼 같은 몸의 리듬은 깊은 감탄을 자아낸다.
여러 장점들로 역대 세 번째 천만 관객을 달성한 수작이지만, 일견 어색해 보이는 부분도 발견된다. 궁궐 속의 광대가 얼마나 이질적인 존재인지 잘 드러나지 않고, 어느 순간부터 광대극 장면은 조마조마한 줄타기보다는 다음 장면을 위한 판소리처럼 느껴진다. 중신들의 정치적 움직임은 상투적이며 지루하다. 그러나 인물들에 맞춰진 조명 덕분에, 허술한 무대장치는 그림자 속에 숨겨진다.
이준익 감독의 어느 영화나 그렇듯 그는 자신이 창작해 낸 인물들을 참으로 사랑한다. 그는 이러한 처연한 불꽃놀이에서조차 도저히 그들을 허투루, 또 차갑게 내버리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의 깊은 사랑은 관객들로 전이되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날 때쯤엔 우리 모두가 그의 인물들을 사랑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