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밥심

가족의 기억-가톨릭문학신인상 수상작, 한식문화진흥 공모작

by 류재숙 Monica Shim

엄마는 항상 배가 고팠다. 할머니가 매끼 분량의 쌀을 뒤주에서 퍼주면 그걸로 밥을 짓곤 했다. 시어른, 시동생 시누이, 엄마의 다섯 아이들 그리고 가게에서 일하는 직공 아제들 서넛까지, 거의 열일곱 식구 밥을 해대려면 가마솥 가득 밥을 지어야 했다. 어려운 살림이라 보리쌀을 먼저 그득히 앉히고 그 위에 귀한 쌀을 조금 올려 짓는 밥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의 밥을 위에서 푸고 나면 남은 쌀밥과 보리밥을 휘섞어 식구들 밥을 펐다.


누룽지가 섞인 맨바닥이 엄마의 몫이었다. 그나마도 한창 먹을 나이인 20대 아제들이 “형수님, 밥 좀 더 주이소!” 하면 엄마의 밥그릇은 반도 남지 않았다. 빈혈로 엄마는 자주 어지러웠고 쓰러지기도 했다. 인심 좋은 할머니는 식구들 먹을 게 없어도 지나는 거지나 어려운 이웃이 오면 쌀을 퍼주곤 했다. 며느리 배곯는 건 안중에 없으셨나 보다.


길 건너 골목 아랜 국시 파는 점빵이 있었다. 매일 국시 기계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시를 연신 뽑아냈고 가늘고 긴 국시 가락이 점빵 앞 긴 대나무 장대 위에서 햇살과 바람에 마르고 있었다. 새벽같이 뽑은 국시는 한나절이 지나면 꼬득꼬득 말라 하얗고 가느다란 마른국시로 변했다. 국시집 아줌마는 그 긴 국시를 가위로 쑥덕쑥덕 잘라 진열장에 넣느라 바빴다. 물국시는 뽀얀 밀가루를 덮어쓴 채 유리 진열장 안에 돌돌 말려 있었다.

자주 엄마 심부름으로 국시집에 들러 마른국시나 물국시를 사러 갔었다. 머리와 얼굴에 항상 밀가루를 허옇게 묻히고 사는 국시집 아저씨는 물 국시를 봉투에 담을 때 콩가루를 듬뿍 얹어주곤 했다. 마른 국시를 사갈 땐 종이에 돌돌 말아 싸주곤 부서지지 않게 잘 들고 가라 당부를 했다. 행여 국시가 부서질 새라 조심스레 안고 종종걸음으로 오곤 했다.


친구들과 한참 놀다 배가 꺼질 때면 말리는 국시 가락 뒤에 숨어 가끔 간식처럼 그 짭짤한 국시를 몰래 떼먹곤 했다. 주인장은 그런 우리를 보면서도 별달리 혼내질 않았다. 우리 집 점심 메뉴는 국시나 수제비일 때가 많았다. 비싼 쌀을 덜 먹는 방법이었다. 어른이 되어서까지 한 참을 물국시나 수제비를 싫어했는데 거의 매일 먹다시피 한 그때 물려버린 건지도 모른다.


엄마는 점심엔 자주 커다란 양푼에 밥을 푸고 열무와 고추장을 잔뜩 넣고 비벼 주었다. 우리 다섯 남매를 불러 모으곤 밥을 먹을 땐 항상 “모두들 뎀벼라!” 하고 말했다. 마치 땅따먹기를 하듯 양푼이 밥에 돌진 해 머리를 맞대고 숟가락으로 선을 그어 제 몫을 정하곤 숟가락 싸움을 하며 깔깔대며 먹었다. 더 어릴 적엔 엄마가 밥을 한 숟가락씩 떠서 제비 새끼들처럼 딱 벌린 우리 다섯 입에 차례로 쏙쏙 넣어 주곤 했다. 가끔 계란 프라이가 비빔밥 위에 오를 때면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소고깃국은 명절이나 생일날이 아니면 보기 힘들었다. 고기를 사 오라고 심부름을 시킬 때면 엄마는 언제나 “아저씨한테 기름 많이 얹어 달라꼬 해레이.” 하고 당부했다. 정육점 주인은 조그만 소고기 덩이에 배나 되는 크기의 기름 덩어리를 뚝 잘라 얹어주곤 했다. 오래간만에 먹는 고깃국은 기름이 둥둥 떠야 고깃국 같았다. 그땐 고기가 국에 발을 담갔다 지나 만 가도 그리 맛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밥에 김치와 된장만 있어도 맛나게 드셨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에 김장김치를 쭉 찢어 올려 한입 가득 물고 된장찌개를 한 숟가락 푹 떠서 드시는데 서걱서걱 김치 씹는 소리가 그리 맛나게 들릴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저녁을 드실 때면 우린 아버지 옆에 붙어 앉아 한 숟가락 더 먹곤 했다. 그리 맛난 밥을 아버지는 언제나 다 들지 않고 꼭 남기셨다. 제대로 못 먹는 아내를 위한 배려였단 걸 나중에야 알았다. 아직도 아버지는 그때 습관이 남아 밥을 그릇 한 귀퉁이에 남기신다.


아버지의 퇴근이 늦은 날은 엄마는 스텐 밥그릇에 밥을 떠 뚜껑을 덮고 따뜻한 아랫목에 묻어 두고 아버지를 기다리셨다. 우린 아랫목에 옹기종기 모여 텔레비전을 보다가 발을 잘 못 뻗어 밥그릇을 차서 자주 엎어 뜨리곤 했다. 엄마에게 들키지 않으려 얼른 엎어진 밥을 그릇에 담고 시치미를 떼곤 했다. 어떨 땐 밥그릇이 엎어진 줄도 모르고 장난치다 밥풀이 온통 이불에 들러붙기도 했다. 솜이불엔 꾸덕꾸덕 마른 밥풀이 자주 붙어있었다. 엄마는 수건으로 밥그릇을 돌돌 말기도 하고 보자기로 꽁꽁 싸매기도 하며 갖은 방법으로 밥그릇을 보호했다. 나중에 밥그릇 넣는 보온 통이 따로 나와서야 안심을 할 수 있었다. 일하고 온 가장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고 싶은 엄마의 정성은 참으로 지극했다.


매일 아침 엄마는 출근 전인 아버지를 부엌으로 따로 조용히 불러 귀한 달걀에 식초 한 방울을 떨어뜨려 드리거나 따뜻한 우유에 꿀을 타 따로 드렸다. 그런 일은 우리 몰래 은밀히 이뤄지곤 했다. 다섯 아이들이 냄새라도 맡으면 자식들에게 홀랑 빼앗기고 말 것을 아는 엄마가 가장의 건강을 따로 챙기는 방법이었다. 아버지를 위한 특별한 챙김은 우리가 어릴 적부터 시작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젠 먹는 게 넘치는 세상인데도 엄마는 아버지만을 위한 보양식을 반드시 챙기신다.


은퇴한 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외출 전엔 예전과 다름없이 아버지 구두를 윤이 나게 닦아 현관에 내어 놓으신다. 아버지의 구두나 양복은 엄마의 정성으로 빛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난 지금도 남편의 구두를 닦을 땐 정성을 들이던 엄마를 떠올린다. 윤이 나는 구두를 신고 출근하는 남편은 장모님 덕인 줄 알아야 한다.


대가족을 챙기느라 언제나 한솥 그득한 밥과 들통으로 국을 끓여야 했던 엄마의 소원은 작은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이는 된장찌개였다. "니는 시집가믄 신랑이랑 이쁜 그릇에 이쁘게 담아 무래이. 엄마 맨추러 이래 멋없는 상 채리지 말고." 엄마는 소꿉장난 같은 아기자기한 살림을 꿈꾸곤 하셨다.


80이 다 된 엄마는 지금도 친척들이 오면 직접 밥을 차리신다. 간단히 밖에서 먹거나 시켜 먹자 해도 그럴 수 없다 한다. 자고로 입으로 들어가는 밥이란 정성이 녹아들어 가야 한다는 지론이다. 빵을 먹은 날도 꼭 밥을 따로 해 식구들을 먹였다. 사람은 밥심으로 사는 건데 밀가루 나부랭이로 때워선 힘을 쓸 수가 없다셨다. 가난한 그 시절 쌀밥을 배불리 못 먹인 아쉬움 때문인지 밥은 엄마의 신앙과 같았다. 엄마의 얼큰하고 감칠맛 나는 소고깃국에 방금 지은 밥을 말아 후후 불며 김치를 곁들이는 맛은 엄마 손에 자란 삼촌과 고모, 우리들에게 아직도 넘버원이다.


이젠 가락지도 잘 어울리지 않는 엄마의 거칠고 두툼해진 손을 잡아 본다. 이 손 안에서 다듬어지고 썰어지고 무쳐진 수많은 먹거리들. 엄마의 손에서 나온 밥심으로 우린 이렇게 잘 자랐다. 엄마가 그리도 식구들에게 먹이고 싶어 하던 소고기가 듬뿍 들어간 고깃국이 이젠 상위에 놓이건만 예전 고기가 발만 담그고 지나간 기름이 둥둥 뜨던 그 고깃국이, 그 시절이 가끔 그립다.


내 아이들에게 양푼에 밥을 비벼주곤 “모두들 뎀벼라!” 하며 양푼 밥에 숟가락으로 선을 긋다가 어느 사이 엄마를 닮아있는 나를 본다.



*사진출처: 클립아트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