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엄마는 저의 온 우주 같은 존재였어요. 머나먼 땅 기댈 곳 하나 없는 곳에 이민 와 가족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준 아빠 감사해요.”
남편의 60회 생일. 요즘은 회갑연은 잘하지 않는 시대지만 인생의 중반전을 넘어서는 우리 집 가장을 위해 작은 축하연을 열었다. 코로나 사태로 지인들과의 축하연 대신 가족끼리 조촐히 가진 생일잔치였다. 아이들은 편지와 케이크를 준비하고 난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고 각자 준비한 선물을 나누었다. 딸아이가 아빠를 위해 준비한 긴 편지를 낭독하는 동안 우리 가족의 지난 20년간의 미국이민생활 시간들을 회상하며 눈물샘이 터졌다.
대학에서 만나 연애하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30여 년이 흘렀다. 열심히 데이트 신청을 하며 어째 손이라도 한번 잡아보려 애쓰던 대학 선배와 결혼해 딸 아들을 낳고 이리 오래 함께 할 줄이야. 이젠 서로가 세상 누구보다 가장 많은 세월을 함께 보낸 사람이 되었다.
예전엔 환갑이면 허연 수염 할아버지가 되어 이웃에 떡을 돌리고 했다는데 요즘은 세월이 좋아 환갑 나이에도 예전 40대로 밖에 안보이니 회갑연이란 게 영 어색하다. 하긴 얄궂은 바이러스로 인해 집콕 생활을 하느라 염색을 하지 않아 남편도 머리가 허연 할아버지 같긴 했다.
연고 하나 없는 낯선 타국으로의 이민을 남편이 갑자기 결정했을 때 맏아들 맏며느리로서 해선 안될 일 같아 난 반대표부터 던졌다. 일방적인 남편의 결정에 이민을 굳이 가야 하는 이유를 물으며 혼자되신 시어머님과 아직도 독립하지 못한 시동생들의 뒷일은 누가 다 감당할 거며 맏이가 이민 간다면 무슨 소리를 들을 건지 알지 않느냐며 몇 년을 버텼다.
어느 날 남편은 술을 한잔 하며 조용히 자기가 왜 이민을 가고 싶은지 털어놓았다. 그 이유에 더 이상 그에게 반대만 할 순 없었다. 남편은 친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이 땅에서 즐거운 일이 있어도 맘껏 웃을 수 없었고, 맏이로서 줄줄이 책임져야 하는 동생들과 집안일이 가끔 너무 힘겹게 느껴진다고, 회사도 지위가 올라가니 자기가 지키고픈 엔지니어 자리보다 관리를 맡아야 하는 한국 회사의 관행이 버텨내기 힘겹다고, 끝까지 엔지니어로 남을 수 있고 엔지니어를 제대로 대접해 주는 외국에서 꿈을 펼쳐보고 싶다고, 몸이 멀리 있더라도 맏이로서의 임무는 충실할 거라고 조용히 읊조렸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29살 어린 나이에 집안을 다 책임지는 젊은 호주가 되어버린 남편. 그동안 제대로 의논할 상대조차 없이 혼자 온갖 집안 대소사를 결정지어야 했고, 아래로 줄줄이 책임져야 하는 동생들에 혼자되신 새어머님까지 긴 시간 동안 챙겨 온 사람. 한 분뿐인 작은 아버님조차 남편에게 기대는 입장이었으니 그 무게가 오죽했으랴. 29살이란 나이는 부모에게서 벗어나 맘껏 제 갈길 펼치는 아직도 어린 나이이지 않은가. 남편의 힘든 어깨를 누구보다 잘 아는 나였다.
어릴 적 엄마를 잃은 남편 앞에서 엄마란 단어는 민감했다. 친정엄마가 그리울 때도 남편에게 차마 떼쓰며 말할 수가 없었다. 유행하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엄마가 군 복무하는 아들을 방문하는 방송이 있었다. ‘엄마가 보고플 때 엄마 사진 꺼내 놓고..’ 노래로 시작되는 그 방송이 나올 때면 난 행여 남편이 들을 새라 얼른 채널을 돌려버리곤 했다. 군대서 엄마의 방문을 한 번도 받을 수 없었던 그의 마음이 아플까 봐. 엄마가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결혼 후 채 2년도 안돼서 누구보다 의지하고 친구같이 사이좋던 아버님까지 잃었으니 그 상실감을 누가 다 이해할 수 있었을까. 아내가 옆에서 아무리 챙겨준들 부모의 빈자리를 어찌 다 채울 수 있으랴.
그런 저런 연유로 미국으로의 이민이 진행되었다. 남편은 미국 회사에 인터뷰를 보고 합격해 두곤 떠나기 전 몇 년을 가족들을 위해 흩어진 산소를 모두 이장해 한 곳에 모으고 어머님과 아직 미혼인 동생들까지 여분의 생활비를 준비해준 후에야 미련 많던 한국 땅을 뜰 수가 있었다.
연고 하나 없는 이국 땅에 가족들을 데리고 와선 얼마나 두려웠을까. 또 다른 책임감이 그의 어깨에 무겁게 얹어졌을 터이다. 가끔 미국에 출장 와서 버틴 영어와, 미국회사 정식 직원이 되어 현지인처럼 쓰는 영어는 판이하게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미국에 도착한 다음 날 출근해서 참석한 첫 회의부터 당황스러웠다. 사정봐주지 않는 빠른 영어로 진행되는 회의내용을 제대로 다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은 잘못 알아들은 영어로 엉뚱한 프로그램을 짜는 바람에 처음부터 다시 짜야했다며 늦은 시각 퇴근해 와선 한 숨 짓던 그였다.
미국 온 지 일 년이 되던 날 남편은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영어 때문이라 했다. 회의고 뭐고 온통 사정 봐주지 않는 빠른 영어가 자기를 옥죄고 있다고. 기술적인 면에선 자신이 있지만 영어는 단시간에 도저히 따라잡기 어려울 것 같다고. 그래서 아직도 사표를 보류하고 있는 한국 회사에 더 늦기 전에 재합류하는 게 나을 것 같다했다.
이민을 결정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을 고민하고 갈등했던가. 그렇게 아내를 힘들게 해가며 어렵게 결정한 이민을 이제와서 단번에 돌이킨다니 한숨부터 나왔다. 한번 든 칼은 무라도 잘라야 하지 않냐고 겨우 일 년 만에 그것도 이유가 영어 때문이라면 자존심이 허락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회사에선 한창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데 남편이 떠난다니 월급이 부족해 그러는 줄 알고 연봉을 올려줄 테니 남아 달라 사정하질 않는가. 생각지도 않게 연봉이 뛰는 바람에 남편은 마음을 돌렸다. 끝까지 버텨보고 결정하겠다며.
그 후 우리 네 가족에겐 영어극복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매주 한 보따리씩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와 가족 리딩 타임에 머리를 맞대어 읽었고 저녁엔 온 가족이 아이들 선생님이 열어준 영어 수업에 참석하고 전자사전으로 각자 단어장을 채워갔다. 유치원생인 막내 아이 수준의 동화책부터 시작한 책 읽기는 점차 고학년 수준으로 실력이 올랐다. 남편은 종일 근무하고 돌아와선 책과 단어와 씨름하며 화장실에서도 단어장을 외워댔다. 하나를 시작하면 끝을 볼 때까지 파고드는 남편의 성격이 십분 발휘되는 나날이었다. 그러는 사이 그럭저럭 집도 마련하고 가끔 여행도 다니고 미국 생활에 안착해 갔다.
올해는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건너온 지 20년째가 되는 해이기도 하다. 돌아보니 좋은 시간뿐 아니라 힘들고 외로운 시간도 많았다. 그동안 남편은 직장에서 인정받는 전문 엔지니어로 자리 잡았고 아이들은 잘 자라 독립했으며 나도 공부해 원하던 직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한번 뽑아 든 칼로 무뿐 아니라 이제 큰 나무도 벨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의 완벽하리 만큼 꼼꼼한 성격은 옆사람을 가끔 힘들게도 하지만 그 성격이 아니었으면 이 험난한 타국에서의 생활을 버텨낼 수 없었으리라.
새벽녘 일어나 잠든 남편을 바라본다. 이제 염색해주지 않으면 반 백발이 되어버린 이 남자, 잘생긴 그 모습은 어디 가고 깊어진 주름만 남은 이 남자, 빼곡하던 머리숱이 속 알 머리가 훤해져 버린 이 남자, 멀고 먼 나라에 살면서 친모가 아니어도 어머님 생활비 꼬박꼬박 대고, 동생들 뒤치다꺼리까지 묵묵히 챙겨 온 이 남자, 가족을 부양하느라 쉼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이 남자, 큰 나무가 되어 가족들이 그 그늘에서 쉬게 하고 싶다던 이 남자, 어느덧 육십갑자를 한 번 돌아 환갑이란 나이를 맞아버린 이 남자.
그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보고 손을 잡아 본다. 주어진 삶에 그저 충실해 온 한 남자의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딸에게 온 우주 같은 존재였다는 아빠의 자리를 지금까지 열심히 지켜온 그의 시간에 찬사와 경의를 보낸다. 당신은 나에게도 모든 식구들에게도 온 우주였고 큰 나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