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지겨울 때가 있다. 엄마의 사랑과 관심이 나에게만 쏠리기를 원하던 아이들도 자라면 그 지극한 관심이 지긋지긋할 때가 온다. 죽을 만큼 사랑해 결혼한 부부도 어느 날 서로가 진절머리 나는 날이 있고 매일 들여다보는 스마트폰과 컴퓨터도 눈이 시린 날이 있다. 이 길만이 내가 살길이라 여겼던 일도, 성공을 향해 앞으로만 달리던 인생도 문득 돌아보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방향을 잃을 때가 있다.
그럴 땐 그 지극한 사랑을 잠시 내려놓아 본다. 세상과의 인연의 끈을 끊임없이 이어가던 스마트폰과 컴퓨터도 잠시 꺼두고 거닐어 본다. 꽃이 다가오고 자연이 다가와 세상엔 사람과의 인연만이 전부가 아님을 속삭인다. 내 언저리에 있을 때 시시콜콜 부족해만 보이던 자식도 멀리 떠나 사니 잔소리보다 격려의 말이 나온다. 깍두기 씹는 소리조차 듣기 싫던 남편도 한 달여 한국행으로 떨어져 지내보니 그 소리가 그립더한 친구 말도 떠오른다.
시험을 앞두고 밤을 새며 쉬지 않고 공부하는 것보다 책을 덮고 잠시 잠을 청하면 뇌가 알아서 요약정리를 해줘 능률이 더 오른다고 한다. 직장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 일을 잠시 한쪽으로 밀쳐두었다가 다시 접하면 신기하게도 해결책이 나오는 걸 경험하곤 했다.
소중한 것 일수록 중요한 것일수록 집착하고 매달리기보다 가끔 거리를 둠도 좋으리라. 잠시 떠나 있는 동안 해묵은 집착과 갈등으로 쌓여가던 마음 잔은 비워지고 그 빈 곳으로 새로운 사랑과 아이디어가 스멀스멀 비집고 들어와 온전히 자리함을 경험하리라.
이 낯선 바이러스로 인해 그동안 집착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경험을 해본다. 사랑 내려놓기 연습을 해본다. 매일 출퇴근하던 직장도, 분을 다투며 살던 일상도, 지인과의 만남도, 열정을 쏟던 취미생활도, 밖으로만 향하던 내 시선도, 모두 내려놓고 나니 다른 것을 바라보는 여유가 자리한다.
너무 가까워 오히려 더 소원했던 가족을, 잡초가 자라던 내 정원을, 언젠가 읽으리라 미뤄두었던 책들을, 바쁘다 안부조차 지나치던 내 이웃을, 오랜 시간 들여다보지 않았던 나의 내면을, 먼지가 쌓이던 일기장을, 바라봐 주고 보살피고 먼지를 털어내고 느끼고 만져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동안 무엇을 위해 서로 메시지를 쉼 없이 주고받고,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 열을 올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물건을 사재고, 정보를 교환하며, 아침마다 차려입고 밖으로 나가고, 마치 하루라도 쳐지면 안 될 듯 그리 살아왔는가.
나의 마음 잔은 무엇으로 채워지고 있었던가. 갈 길만 가느라 주위에 눈감아 버리고 놓아 버리고 산 것은 무엇일까. 혹여 나도 모르게 너무 먼 길을 와 버린 건 아닐까. 할퀴고 상처 내고 지나간 자리는 또 얼마일까. 편리함을 좇느라 내가 망쳐버린 지구의 부분은 얼마만큼 일까. 인생의 산행에서 뒤처지는 이웃에게 발걸음 속도를 맞추고 함께 손잡고 가는 노력을 몇 번이나 해왔던가.
고해소 앞에 가서야 내가 주위에 범한 죄를 돌아보듯 이렇게 일상이 멈춰 선 다음에야 나의 저지름을 돌아보게 되는 이 어리석음이 아프다. 양심 한 귀퉁이에 달라붙어 나를 들볶던 그 죄악을 고해소에 내려놓고 다시 시작하는 마음의 홀가분함은 고해성사를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그래서 감사하다. 넘치기 전에 비울 수 있음이, 너무 멀리 가기 전에 돌아보게 함이, 더 황폐해지기 전에 어그러진 관계를 다독일 수 있음이, 자연에 대한 막역한 미안함을 구체적 실천으로 보답하자 마음먹음이.
잠시 멀리 두는 내 모든 일상과 집착들은 이 시간이 지나면 과연 무엇으로 대체되어 있을까. 예전 모습으로 당연한 듯 돌아가진 말자. 이젠 집착하기 전에 떠나보자. 높은 곳에 자주 오르자. 세상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인간의 갈등이 하찮은 것임을 깨닫자. 별을 더 자주 보자. 내가 우주에 속해 있음을 잊지 말자. ‘사랑도 리필이 필요해요’ 란 광고 문구를 자주 떠올리자. 내 주위에 리필이 필요한 곳이 어디인지 자주 살펴보자.
‘당신이 나의 혼에 자비롭게 심어준 사람의 힘으로
나는 일할 수 있고 또 많은 것을 배우려고 합니다.
당신에게서 빛과 힘이 나오고
당신에게로 사랑과 감사가 흘러갑니다.‘
-발도르프 학교의 아침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