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비춰보고 싶다면

수선화

by 프리나freena

수선화

꽃시장에 들러 수선화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해마다 1월이 되면 비싼 값을 치르고서라도 수선화를 구입하곤 했다. 그리고 제주도에 갈 계획을 세웠다. 제주 수선화가 가득 피어있는 숲에 머물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여느 해처럼 수선화가 피어있는 제주도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올해는 제주도에 가는 대신 나의 집으로 수선화를 데려왔다. 1월의 수선화가 피어나는 맑은 호숫가를 대신할 수 있도록 집안의 먼지를 깨끗이 닦아 냈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소년 나르키소스가 찾아간 호숫가를 집 안에 만들기로 한 것이다. 나 자신을 들여다 보고 사랑에 빠지기 위한 준비였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나르키소스의 이야기는 지나친 자기애가 빚어낸 비극으로 알려져 있다.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버려 결국 물속에 빠져 죽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자리에 피어난 꽃이 수선화더라는 이야기는 ‘나르시시즘’이라는 자아도취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깊은 숲의 호숫가에서 홀로 자신의 얼굴을 비춰본 나르키소스가 되어 본 적이 있는가?


타인에게 비칠 내가 아닌, 오직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마음을 비춰본 일이 있는가? 그런 자신을 설레도록 사랑해 준 일이 있는가?


1월의 수선화를 마주 할 때면 아름다운 자신을 발견한 나르키소스의 맑은 호수를 내려다보는 기분이다. 자아도취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그런 나를 사랑해 주는 시간이다. 맑은 호수는 나르키소스가 자신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게 도와준 완벽한 거울이며 1월의 수선화는 나의 마음을 비춰주는 호수인 것이다.


꽃시장에서 데려온 수선화를 투명한 화기에 담았다. 살포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수선화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잠시 동작을 멈추고 수선화의 향기만 따라가 본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꽃의 향기가 나의 호흡을 따라 내 안으로 흘러들어온다. 지나가는 생각들은 흘려보내고 수선화의 노래를 따라 불러본다. 나의 이야기가 꽃의 이야기가 되어 간다. 나의 꽃명상 시간이다.



1월부터 3월까지 꽃을 구경하기 힘든 시기에 놀랄 만큼 향기로운 꽃을 피우는 수선화! 이 꽃은 제주도의 야생화이다. 말들의 먹이가 되고 농사에 방해가 되어 꽃봉오리를 맺은 채 무수히 뽑혀 나갔던 1월의 꽃이다. 안타깝게도 요즘은 야생으로 자라는 수선화를 구경하기란 쉽지 않다. 제대로 수선화를 구경한 것은 결국 수목원이었으니까. 추사 김정희의 기념관에 들러서 “그 많다던 수선화는 다 어디로 갔나요?” 라며 혼잣말로 툴툴거렸던 적이 있다. 아쉬운 마음에 제주의 수선화를 사랑했다던 선비의 집터를 거닐며 생각했다. 머나먼 섬으로 귀향을 온 조선의 선비는 가시덤불에 둘러싸인 집 주변에 피어있던 수선화의 향기를 따라 걸었을 것이며 그 길의 종착지는 자신의 마음 어디쯤이었을 거라고. 외부와 단절된 고독한 마음이 선비의 시와 글이 되었을 거라고.


18세기 무렵,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나라 영국에서도 수선화는 돌보지 않아도 잘 자라는 들꽃이었다. 노란 수선화 물결을 보게 된 시인은 외로움도 축복이었다고 노래했다. 조선의 선비에게도 서양의 시인에게도 수선화는 더 이상 흔한 꽃이 아니었다. 내면의 길로 안내한 깊은 깨달음을 안겨준 꽃이었다.


앞으로도 한동안 각자의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수선화가 다가오고 있다. 수선화를 보게 되면 매끈한 줄기를 쥐고 가볍게 흔들어 보자. 여러 개의 꽃들이 조롱조롱 매달린 꽃잎에서 마법처럼 향기가 쏟아질 것이다. 마치 성수를 적셔 뿌리는 순간 그 물방울에 닿으면 기적이 일어날 것처럼 말이다.


이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할 준비가 끝났다. 아름다운 꽃과 하나가 되었다. 그 어느 해보다 간절한 희망과 기대를 품어보는 새해 첫 달, 한 송이 수선화가 되고 맑은 호수도 되어 보자. 진정으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게 되어 아름답게 서로를 비추었으면 좋겠다.


[국제신문 2021.1월 아침숲길 칼럼 발행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