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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charlie Jul 18. 2019

두 개의 죽음에 담긴 시대상

<쓰리 빌보드>, <죄 많은 소녀>

 많은 영화가 죽음에 대해 다뤘다. 뉴스에서 접하는 사건 사고 속의 불특정 다수의 죽음과 달리 영화 속 죽음은 일상 속에서 벌어진 가족 혹은 친구의 죽음이기에 그 파장은 크다. 그 가운데 죄책감이라는 굴레를 통해서 미국적, 한국적 정서와 시대상을 잘 반영한 <쓰리 빌보드>와 <죄 많은 소녀>을 선택했다.

     <쓰리 빌보드> 속 죽음은 잔인한 강간살인이다. 딸을 잃은 엄마 밀드레드는 범인이 잡히지 않자 외딴 도로 광고판에 경찰서장 월러비를 상대로 수사 의지를 묻는 내용의 광고로 압박한다. 어려운 수사상황을 인지하면서도 이토록 범인 검거에 매달리는 이유는 따로 있다. 사건이 일어난 날 차를 빌려달라는 딸의 부탁을 거절했던, 모진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어 그 말이 씨가 되어버린 죄책감 때문이다. 죄책감은 분노를 넘어 폭력으로 표출된다. 영화는 죄책감과 증오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죽어가는 동안 강간을 당했는데’, ‘아직도 범인을 못 잡았네요?’, ‘월러비 서장,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란 세 개 광고판의 물음에 월러비는 편지로 대답을 대신한다. 암으로 인해 고통만 있을 시한부 인생 대신 자살을 선택한 월러비는 죽기 전 가족과 사랑을 나누고, 밀드레드에게 나름의 노력을 했음을 알리고 미안함을 전한다. 개인적 증오에 사로 잡혀있던 딕슨을 편지로 깨우친다. 사랑과 희망을 통해 죄책감과 증오에서 밀드레드와 딕슨이 벗어나길 바란 숭고한 선택이다.

     <죄 많은 소녀>의 죽음은 10대 여고생의 자살이다. 경민이 자살한 날,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영희는 자살을 부추긴 가해자로 지목된다. 결백을 주장하는 영희는 교실 안 아이들 세계와 학교 밖 어른 세계 모두에게서 외면받는다. 거짓말, 의심, 왜곡 등 진실은 말을 통해서 일그러진다. 영희는 말이 온전히 전달되지 못함을 깨닫고 목소리를 버리는 행동을 통해 결백을 주장한다. 경민과 영희 사이를 질투해 거짓말을 하던 아이, 영희에 대한 거짓 소문을 내던 아이, 집단으로 영희에게 린치를 가하던 아이 모두 죄책감에 각자의 방법으로 용서를 구한다. 영희에게 용서받지 못한 자들은 어른이다. 담임 선생님은 본인의 안위 만을 걱정하며 사건의 진실보다는 수습에 열중한다. 경민의 어머니는 직장생활로 소홀했던 딸에 대한 죄책감보다는 영희를 원망의 대상으로 삼고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목소리를 잃은 영희와 소통하고 연대하는 아이들의 모습과 오로지 말로써 대면해야 하는 어른과의 관계는 그래서 더욱 대조적이다.

     두 영화의 죽음은 닮았지만 다르다. 딸을 잃은 어머니라는 공통점이 있는 반면에 가해자의 존재는 다르다. 존재하지만 잡히지 않는 가해자와 애초에 존재하지 않지만 만들어지는 가해자라는 점에서 그 차이가 있다. 결말의 분위기는 이 차이로 인해 명백히 갈린다. <쓰리 빌보드>는 내재적으로 폭력이 만연한 미국 사회를 그리고 있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조차 안전하지 않은 강간과 살인, 일상적인 폭력과 차별 그리고 거친 언어는 서부시대의 무법지대를 떠오르게 한다. 반목하던 밀드레드와 딕슨이 비로소 서로 이해하고 증오를 거둔 후 나누는 ‘어떻게 할 것인지 가면서 생각해보자.’라는 대화는 동부에서 서부로 향한 문명 전파의 역사 속 겪었을 고민과 닮아있다. 폭력적인 세상에 살더라도 증오가 해답이 아닌 사랑과 희망의 가능성을 엿본다. <죄 많은 소녀>는 명확한 사실 확인 없이 혐오와 증오로 인한 마녀사냥이 만연한 한국사회를 그리지만, 그 내면은 더욱 우울하다. 청소년기에도 만연한 자살 충동의 사회, 영화는 자살 원인에 대해 굳이 설명할 필요 없다는 듯 영희를 내세워 얘기한다. “경민이가 이유를 말해줬는데, 그게 너무 이해가 되어서, 도저히 말릴 수가 없었어요.” 그들은 서로 공감하지만, 설명하더라도 공감하지 못할 어른과의 세대단절이 더욱 암울하게 한다.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는 아이들의 슬프고 가슴 아픈 발버둥과 어른을 겨냥한 복수의 연대는 가슴을 무겁게 누른다.

     <쓰리 빌보드> 속 사랑과 희망에 대한 기대가 이뤄졌을지, <죄 많은 소녀> 속 영희가 어떤 선택을 했을지 모두 명확하지 않다. 두 영화가 던져놓은 열린 결말은 관객이 현실 속 고민 끝에 저마다의 해답을 찾을 것이다. 시대의 고민을 다룬 것만으로 두 영화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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