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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chrome blues Nov 19. 2015

흑백필름 이야기_#1.

지금 내게 없는 것들을 추억하며.

  인천과 경기도를 구분 짓는 바닷가 한 켠에는 할아버지의 생가가 위치하고 있다. 나의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형제들께서 나고 자라셨을 그 곳은,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세월이 무색하리만큼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서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생가는 시간을 초월하여 할아버지를 추억하는 공간으로 남았다. 과거의 할아버지께서도 그곳을 통해 점점 더 멀어져만 가는 당신과 당신의 어머니의 시간을 추억하셨을 것처럼. 이렇듯 사람은 머리 위에 쌓이는 세월이 점점 깊어질수록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추억하는 공간을 필연적으로 가지게 된다. 단 한번의 스침에 태양처럼 강렬하게 다가와 뇌리에 박혀버리게 되는 경우로도, 할아버지의 생가처럼 수많은 시간들이 그 위에 포개져 그 무언가를 형상화되는 경우로도.


누군가의 전봇대.

  

  바쁘고 힘들다는 핑계로 학교 앞에 나와 살기 전까지, 대학 시절 나는 집이 지방이라 인천에 계신 할아버지 댁에 살면서 통학했다. 그래서 학교까지 가려면 지하철을 타고 나와 노량진에서 마을 버스를 한번 갈아타야 했다. 매일 이른 아침 출근하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는 지하철에서 옆 사람의 등과 등이 마주하다 노량진에 다다르면 이미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육교를 건넜다. 그리고 고개를 넘어 학교로 향하는 만원 버스에 다시 몸을 구겨 넣었다. 그러다 해가 저물면 어김없이 테이프 되감듯 지나온 길 그대로 다시 인천으로 넘어가 왕복 세시간의 긴 하루를 마감했다. 그 긴 시간들 중에서도 짧은 환승 문턱에 만나 스쳐 지나듯 노량진이었지만 그 짧은 길이 가지는 냄새와 분위기는 내 대학 시절과 함께였다. 어쩌면 매일 매일이 같지만 달랐던 대학교 안에서의 시간의 무게와 달리 노량진은 늘 딱 그만큼 정량으로 켜켜이 쌓여 내 기억에 더 남는지도 모르겠다. 


늦은 저녁, 언제나 기다리던 인천행 급행 열차.


  이런 내 추억속 노량진의 모습이 현실과 다른 모습이 되어버린 것은 얼마 전, 노량진 육교가 철거된다는 뉴스 기사 몇 줄에서였다. 안전상의 이유란다. 종종 육교를 건너다 빈혈이라도 걸린 듯 울렁거리던 것이 육교가 흔들려 그랬던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 기사 이후로 노량진은 내 기억 속에서부터 무언가 낯설어져 버렸다. 마치 늘 가던 길만 가다가 빗물에 길이 끊겨 세상이 두 동강나버린 현실에 어찌할 바 모르는 개미 행렬의 ‘일개미1’처럼. 그래도 다행히 당장 육교를 철거하는 것이 아니란다. 얼마 간의 여유를두고 공사를 시작한다 하여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번 들러 대학 시절을 담아낼 시간 정도는 가질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참 간사하게도 그대로 고이 접어 이런 저런 핑계 사이에 꽂아두었고, 마지막을보지 못한 채로 오늘이 되었다. 당장의 감정에서 벗어나니 막상 또 그만큼의 감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 나는 벼르고 벼르다 기어이 카메라 필름을 충무로에 맡겼다. 늘 디지털방식의 구형 RF 카메라만 쓰다 무언가에 홀린 듯 손에 넣은 필름 카메라는 찍을 때만 하더라도 지금찍은 순간을 확인하지 못한다는 감성에 설레었지만, 막상 현상을 맡기자니 여간 수고로운 것이 아니었다. 흑백 필름이라 동네 사진관에서는 현상이 되질 않는 점도 그 수고로움에 한 손 보태었다. 그런데 찍은 지 반년은 되어 무엇이 담겨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그 필름 속에서 지금은 달라졌을 내 추억 속의노량진이 그대로 멈추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반가움 반에 그리움 반을 더하자 그제서야 그 당시의, 그 육교가 있을 시절의 노량진이 그리워졌다. 엄청난 후회와 함께, 감흥이 없었단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필름으로 남은 노량진 육교.


  추억에 관한 그리움은 부재에서부터 시작한다. 있을 때는 차일피일 미루다 없어진 뒤에야 다시는 되돌리지 못할 후회를 시작으로 그리움이 찾아온다. 원래 있던 곳에 있지 못할 영원한 부재를 깨닫는 순간, 그리움이 시작되고야 마는 것이다. 다시는 찾지 못할 곳의 공간으로, 이제는 볼 수 없는 누군가의 이름으로, 내 곁에서 떠난 것을 깨달은 뒤에야 비로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그리움의 자각과 후회는 이제는 정말 깨달았고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 다짐하지만 언제나 또 다른 이름의 그리움으로 나에게 몰려들고야 만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모든 그리움은 언제나 추억으로 두질 못하고 되돌리고싶은가 보다. 단 한번만이라도, 한 순간 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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