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의 딜레마.

서른셋, 이렇게 살아도 괜찮겠죠?

by Monochrome blues

인생의 가장 찬란한 시기가 서른세 살에 오길 기도했다. 인간은 삼백 살까지 살 수 없으니, 서른셋이 ‘3’이란 숫자를 가장 많이 품는 나이라서다. 그냥 ‘3’이 좋아 그랬으면 했다. 어릴 때부터 이상하리만치 ‘3’에 집착했다. 행운의 숫자는 ‘7’이 아니라 무조건 ‘3’이었지. 삼각형만큼은 이쁘게 그리기 위해 정성 들였고, 아기돼지 삼 형제는 셋째가 주인공인 덕에 최고로 애정 하는 동화였다. 꽤나 적당해서 좋아할 수밖에 없는 숫자다. 밸런스가 좋지. ‘1’은 부담스럽고 ‘2’는 안타까운데 ‘3’은 딱 좋다. 적당히 겸손하고 욕심 챙기기에 나쁘지 않다. 그래서일까, 어릴 땐 2월 달력에 몇 개 모자란 숫자가 다음 달에 채워졌음 했던 적도 있다. 그랬다면 생일의 모든 숫자가 3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대통합을 이뤘을 수도 있으니깐. 3월이 33일까지 라면 어머니께 며칠 더 있는 한이 있더라도 생일을 미뤘을 거다. (당신께선 뱃속에 꼼짝 않고 버티던 아들 때문에 엄청 고생하셨단다. 그래서 사실 이 얘기를 보신다면 등짝 한 대 정도론 끝나지 않을 거다.)


어렸을 땐 얼른 서른세 살이 되었으면 했다. 그 나이 때는 모든 순간이 최고로 빛날 거라 믿었다. 지루하고 아쉬우며, 찌질한 나날들은 ‘33’이란 이상적 숫자 앞에서 이별할 줄 알았다. 잘 나가는 회사에서 중요한 사람으로 살고 있을 거다. 아니면 한의사라던가 한의사 출신 뮤지션 같은 삶. 혹은 이름 자체가 브랜드인 생애여도 나쁘지 않겠지. 결혼도 서른세 살 즈음에 하고 싶었다. 치열하게 사랑하고 사랑받으면서 말이다. 십 대에 이런 얘기를 하면 어리단 소리를 들었고, 이십 대에는 늙는 게 뭐가 좋냔 소리를 들었다. 서른이 되면서부턴 이쪽에서 먼저 꺼낼 수 없는 얘기가 되었지. 진짜로 그 나이가 되어가고 있으니 구태여 말을 꺼낼 이유가 없었다. 몇 밤만 더 자면 진짜 서른셋이니깐.


26700018.JPG 밝고 찬란한 서른셋이길 바랐다.


2019년, 그토록 바라던 순간이 찾아왔다. 물론 현실은 기대했던 순간과 전혀 달랐다. 영화나 드라마 속 주인공이 아닌 탓이다. 여전히 똑같은 나날의 연속이다. 때때로 지루하고 아쉽다. 찌질함 만큼은 벗어던지고 싶었는데 몸에 너무 잘 받아 탈이다. 결국 그럭저럭, 그저 그런 일상이다. 적당한 회사에서 조용히 일한다. 서른세 살에 하는 결혼은 영 힘들어 보인다. 결혼에 대한 의지는 둘째 치고, 서른셋 3월 즈음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애초에 여자 친구가 없는데서부터 탈락인 거다. 백 번 봐줘 만 나이 서른세 살은 내년이라 해도, 이 공기 같은 삶이 드라마틱하게 바뀔 여지는 없다. 로또나 주식, 혹은 비트코인이 대박 났더래도 달라지지 않았을 거다. 지금보다 훨씬 여유롭게 살고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바랐던 반짝거림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나이는 누구나 똑같은 속도로 먹는다. 노력한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시간 자체는 똑같이 흐른다. 이 글의 당사자는 그냥 강물이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 보는 걸 택했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어른, 어쩌다 보니 서른셋이 되었다. 멍하니 소파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고 있자니, 형들을 나이로 놀리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삼십을 넘어가는 형들에게 맨날 ‘점점 더 멀어져 가시네요’라던가,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죠?’라고 놀렸다. 형들은 하나같이 울컥했지. ‘넌 언제까지 이십 대 일거 같지? 너 서른 되면 두고 보자. 그때 가서 광석이 형 노래 혼자 들으며 질질 짜지 말고’. 그럼 또 이쪽에선 한 술 더 떴다. ‘에이, 그래도 형들보단 늘 제가 어려요. 그리고 늘 말하잖아요. 전 얼른 서른셋이 되고 싶다고요.’ 이제 와서 밝히자면, 형들이 부러워서 그랬다. 지금 난 뭣도 아닌 이십 대인데 형들은 어른 냄새나는 서른이 되는 걸로 보였으니까. 그들의 속사정은 알 수 없으며, 지금이야 이십 대에는 뭘 해도 반짝반짝 빛나던 시절이라는 이야기를 어렴풋이 이해하지만. 그땐 몰랐다. 하긴, 이런 건 지나치고 나서 깨달아야 제 맛이지. 애초에 서른셋에 빛나고 싶거나 어른 냄새가 나고 싶었다면 좀 더 치열하고 열심히 살았어야 한다. 멋진 서른세 살 어른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거나, 작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을 수 없으니까.


27090001.JPG 빨리 가려다 사고 납니다만.


가끔 동갑내기들과 우리 나이에 대한 얘기를 해보고 싶을 때가 있다. 공감을 받든, 유별난 애 취급을 받든 말이다. 근데 친구들 중 대부분은 이미 자리를 잡은 탓에 이런 대화를 나누기 애매하다. 어색하고 오글거린다. 그들은 이미 훌륭한 사회인이자 누군가의 남편 혹은 아내, 부모인데 반해 이쪽은 미운 오리 새끼니까. 이미 어른 냄새를 훌륭히 풍기고 있는 그들께선 또 나이 생각 안 하고 헛소리한다 구박할 거다. 틀린 말은 아니지. 생각해보면 걔네들에게 이 몸은 아픈 손가락 비슷한 애다. 이십 대 때는 공부 좀 하라고,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늘 혼냈으니까. 삶에 정답은 없다만, 서른 넘은 나이까지 와서 애아빠들에게 또 혼나고 싶진 않으니 물어보지 않을 작정이다.


저들을 제외하더라도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이름들이 몇몇 있긴 하다. 하지만 그들은 서른셋까지 걸어오던 도중 본의 아니게 다 잃어버렸다. 인생이 다 그렇듯 몇몇은 그쪽이 잘못하여, 또 누군가는 이쪽이 잘못하여 멀어졌다. 다시 보지 않을 사람처럼 싸우고 헤어지기도 했으며, 자신의 연애에 집중한 나머지 소홀해진 경우도 있다. 그냥 자연스레 연락 두절된 적도 있지. 그들이 딱이지만 쉽사리 연락해볼 자신이 없다. 이제 와서 몇 년 만에 ‘잘 지내...? 그냥 생각이 나서…’라며 연락할 순 없지 않은가? 그래 놓곤 ‘요새 우리 나이 어떻게 생각하니?’라며 어색하게 물어보기는 더더욱 말이다. 결국 대화로 풀어낼 방법을 찾지 못하여 이번 생의 서른셋에 대해 써보기로 했다. 자문자답 형식으로 말이다. 지극히 사적인 서른세 살의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당신들도 이렇게 살고 있거나 살아왔는지, 혹은 이런 생각을 품고 사는지 묻고 싶다.


어떻게 살고 계신가요?


2019년 11월, 서른셋의 끝물이다. 위에선 온갖 투정을 다 써놓았으나 객관적으로 나쁘진 않았다. 꿈꿔왔던 서른세 살과 달라서 그렇지, 적당하고 삼삼하다. 소소하지만 맛깔난다. ‘서른셋으로 삼삼하게’란 문장이 입에 붙는다. 써놓고 보니 마치 평양냉면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느낌이라 만족스럽기도 하고.


‘삼삼하다’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두 가지 뜻이 있다.

1. 음식 맛이 조금 싱거운 듯하면서 맛이 있다.
2. 사물이나 사람의 생김새나 됨됨이가 마음이 끌리게 그럴듯하다.


‘평양냉면이 삼삼하네’에서 말하는 삼삼함은 첫 번째 뜻일 거다. 사전 위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더라도 역시 이번 생은 삼삼한 게 맞다. 서른셋으로 삼삼하게 살고 있지. 근데 이 욕심 많은 친구는 두 번째 뜻도 갖고 싶다.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나, 이 역시 만족스러운 삼삼함이니까. 둘 중 어느 뜻이 더 어울릴지는 열린 결말로 두어보련다. ‘2019년, 서른세 살은 삼삼합니다.’라고 썼을 때, ‘삼삼하다’는 읽는 사람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도록 말이다.


형, 누나들처럼 어른 냄새가 나지도, 동생들처럼 자기주장 강하고 반짝반짝 빛나지도 않는다. 나는 그 어디에도 끼지 않는 삼삼한 맛의 서른셋. 평양냉면 같은 삶의 철없는 어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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