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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규 Jun 18. 2021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도착하지 않았다

Lisbon, Portugal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도착하지 않았다. 숨죽이고 기다렸던 시간들이 허무하게 지나갔다. 나는 이내 기대를 저버리고 홀로 길을 나섰다. 그래도 리스본은 내가 가장 애정하는 도시였다. 


처음 리스본에 가게 된 이유는 사실 간단했다. 언덕과 바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풍경이 있다는 이유 하나였다. 일곱 개 언덕의 도시로 불리는 리스본은 도시를 굽어볼 수 있는 언덕들에 중심부를 내주고 있었다. 도시 곳곳엔 전망대 Mirador가 있었고, 나는 종종 가쁜 숨을 쉬며 그곳들에 오르곤 했다. 상업지대의 전망대, 관광지의 전망대, 성당 아래의 전망대, 인공 엘리베이터 구조물의 전망대, 동네 놀이터 앞의 전망대와 노상 카페가 가득한 거리의 전망대, 다양한 전망대는 언덕들의 한 편에서 도시를 지켰다. 그곳에 올라야만 일상의 풍경이 제대로 보이는 듯했다.


나는 사실 언덕과 바다를 사랑했다. 내가 지나온 대부분의 도시는 언덕을 끼고 있었는데, 꼭 그곳에 올라 도시를 두 눈에 담아야만 했다. 나는 서울의 얕은 산들을 좋아했고, 프라하의 언덕들, 프라이부르크의 높은 구릉의 포도밭을 사랑했다. 내가 제일 흠모했던 언덕은 리우데자네이루의 언덕이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풍경이라 폭력적일 수도 있지만, 리우의 언덕엔 '삶'이 있었다. 헐벗은 언덕을 오르는 파벨라 favela의 가난의 풍경은 슬프지만 동시에 매혹적이었다. 리스본의 언덕은 제국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듯했다. 해상강국 포르투갈은 제국으로서 실패했고, 독재의 여운이 여전히 남아 찬란했던 타일들을 헐벗게 하고 있었다.


리스본은 참 매력적인 도시였다. 언덕들 위로 치솟은 건물들에선 대항해시대의 흔적이 보이는 듯했고, 크고 작은 골목들에는 여전히 낡은 트램이 다니고 있었다. 기실 그녀를 리스본에서 기다렸던 까닭도, 내가 리스본을 홀로 네 번이나 찾은 까닭도 그 언덕 사이의 골목들에 있었다. 리스본은 두 눈을 딱 감고 길을 잃기에 좋은 도시였다. 이슬람과 가톨릭의 만남에 도취하여 있다가도, 예쁜 타일들을 따라 높은 언덕만 찾으면 도시가 보였다. 아, 이쯤이구나, 하고 다시 길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꼭 요란한 사건만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이 되는 건 아니다. 실제로 운명이 결정되는 드라마틱한 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할 수 있다.' 리스본을 배경으로 한 한 영화가 내게 건네는 한 문구는 기실 내게 리스본을 여행하는 데 지침이 되기도 했다. 나는 도착하지 않는 그녀를 기다리며 종종 길을 잃었다. 호시우 광장 앞의 카페에 앉아 혼자 맥주를 홀짝이고, 메르카도 다 리베이라 Mercado da Ribeira에서 커다란 석화 다섯 개를 앞에 두고 와인을 마시기도 했다. 상 조르제 성 Castelo de Sao Jorge에 일찌감치 들어가 그늘이 잘 드는 성곽 위에 앉아 오후 내 책을 읽고, 바이샤 Baixa 지구의 클럽에서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시기도 했다.


기실 요란한 사건들만이 여행을 결정짓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내게 여행이란,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한 이야기들에서 시작되었다. 그녀가 프라하를 지나 독일쯤에서 기차를 놓쳤을 때 나는 어느새 친구를 여럿 만들어 두고 있었다. 우리는 리스본이 한눈에 보이는 루프톱의 카페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거나, 중국식 식당에서 해산물 요리를 먹기도 했고, 클럽들과 술집들이 가득한 바리오 알토 Barrio Alto 지구에서 춤을 추기도 했다. 그 역동적인 밤과 낮은 여전히 내게 선명하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도착하지 않는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더욱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음은.


'우리가 지나온 생의 특정한 장소로 갈 때 우리 자신을 향한 여행도 시작된다.' 그녀가 불현듯 생의 환희에 의문을 품었을 때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당도하지 못했던 리스본으로 향하라고, 그곳에서 다시 당신을 향한 여행을 시작하라고.



뒷모습, 내가 만났던 도시와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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