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스키니진을 버렸다.
겨울 옷을 가지러 본가에 갔다가 옷장에 가득 쌓여 있는 옷들을 정리하던 차였다. 따뜻한 바지가 어디 없나 살피다가 옷장 구석에서 후줄근한 검정 바지들을 발견했다. 딱 보기에도 스무 살 초반에 입었을 것 같은 바지들. 안 그래도 얄쌍한 다리에 딱 달라붙는 바지들을 하나둘 입어 봤다. 스무 살 땐 이런 걸 잘도 입고 다녔었는데, 그때 신었던 닥터 마틴은 어디에 있는지, 피가 안 통하는 다리를 응시하며 온갖 추억에 휩싸였다가 냉큼 바지를 벗었다. 이젠 이 녀석들도 놓아줄 때였다.
시월엔 부산과 제주에 다녀왔다. 칠월 이후 분주해진 머리를 식히고 싶었다. 온종일 카페에 앉아 일하다, 함께 갔던 친구와 밤이면 종종 이야기를 나눴다. 그중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인생은 롤러코스터 같아.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도 있는 법이지. 우리는 지금 한없이 바닥을 향해 치닫고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걱정하지 마, 결국은 그 반동으로 정상을 향해 치달을 테니까. 친구는 고개를 주억이며 막걸리를 비웠다. 체코에서 온 주제에 맥주나 와인은 손도 안 대고 막걸리라니, 그녀의 취향과 식성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지만 나름 재미있는 여행이었다. 일주일 내내 비건 음식점은 조금 힘들기도 했지만.
첫 책을 쓰고 블로그에 일상에 관한 이야기를 올린 기억이 없다. 무언가를 올려봤자 소식 전달이거나 홍보 위주였고, 일상보다는 책이나 공간 따위를 기록하는 작업들에 불과했다. 은유 작가의 글쓰기의 최전선을 읽으며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조금은 힘을 빼도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는 것은 어떤 성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한 작업이 될 수도 있지만, 나를 반짝이게 하는 순간이 될 수도 있을 터였다. 반짝이기 위해 다시 글을 쓴다. 나른한 주말 오전 모니터 앞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글을 쓸 수 있는 이 순간이 참 행복하다는 걸 왜 나는 잊고 있었을까.
부침이 있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지만, 사실 나는 참 잘 지내고 있다. 다들, 잘 지내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