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정말 누구신가요?
남편이 약속한 2년이 다 되어갔다. 군산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정을 주지 않았다. 늘 가는 마트와 도서관에 회원가입도 하지 않았다. 곧 돌아갈 사람이 개인정보를 쉽게 남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소심한 성격에 먼저 다가가지도 못했지만 이웃들을 사귀지도 않았다. 외로움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분노가 되기도 했다.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는 날들이 며칠씩 이어지기도 했다. 지독한 우울감이 감싸고 있었지만 그때는 인정하지 않았다.
너무 슬픈 어느 날 신을 신었다. 사람이 그리웠다. 고작 백 미터 앞 도서관 영유아 놀이방이 내 외출의 종착지였다.
"애기 몇 개월이에요?"
비슷한 개월 수의 아기 엄마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주희 언니는 옆 동네에 살고 있었고 두 살 위였다. 광주에서 와서 지인이 거의 없어 심심하다고 친하게 지내자고 했다. 우리는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주희 언니를 다시 만난 건 해가 바뀌고 겨울이 끝나갈 무렵 3월 어느 날이었다.
문자로 안부를 묻기만 하다가 언니는 자기가 다니는 문화센터에 새 학기부터 같이 다니자고 했다. 양말로 인형을 만드는 건데 재미도 있지만 사람들과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 보면 한결 기운이 난다고 했다. 바느질에는 영 소질이 없던 나는 몇 번 거절하다가 용기를 냈다. 한 번 구경은 가보자 싶었다. 검은색 소나타를 몰고 언니가 우리 동네로 왔다.
자그마한 문화센터에는 수납정리반, 리본공예반, 양말공예반, 종이공예반 등이 있었다. 한 달에 한번 중고책 장터도 열리고, 특별 강좌나 이벤트들도 있었다. 센터 직원들도 선생님도 다들 정감이 갔다. 햇살이 환하게 드는 교실에서 양말에 바느질을 했다. 만들고 싶은 인형을 고르고 필요한 재료 패키지를 선생님께 구입했다. 집에 있던 십자수 실과 바늘을 쓰면 된다고 해서 다행이었다. 바느질은 삐뚤삐뚤했지만 내가 가질 인형이니 괜찮았다. 선생님과 언니와 다른 수강생들과 나누는 수다가 힘이었다.
언니는 일주일에 두 번 나를 실어 날랐다. 차가 있으니 좀 돌아가더라도 나를 태워가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참 고마운 사람이었다. 운전을 하는 여자가 멋있어 보인 게 20대 때 인라인 동호회에서 만났던 수진 언니 뒤로 두 번 째였다. 그렇게 봄이 무르익어 가고 내 삶에도 봄이 왔다. 양말인형 3개도 집 한 구석을 차지했다.
두 달여의 수업이 끝나갈 무렵 센터 게시판에 미술 테라피 홍보물이 붙어있었다. 일 년에 한 번씩 한시적으로 열리는 특별강좌의 수강생을 모집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 우울감이 많이 나아졌다고 믿고 있었기에 나의 필요가 아닌, 배움의 열의로 강연이 궁금하다 믿었다. 망설이던 내게 주희 언니도 마침 관심이 있던 분야라며 덜컥 신청을 했다.
미술 테라피 선생님은 인천에서 10년 넘게 사회복지사로 활동을 하며 상담을 해온 실력자였다. 현장에서 닦은 수많은 경험과 자신의 솔직한 이야기가 녹아드는 강연은 재미와 감동 그 자체였다. 그림으로 심리를 알아보고 이야기를 나눈 한 달이 금세 지나갔다. 이제 뭔가 좀 알아가려는데 끝나다니 아쉬움이 너무 컸다. 4회 차 강연이다 보니 센터에서도 수강생들의 이런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개인적으로 수업을 더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언니와 나는 선생님의 재능기부로 거의 무료에 가깝게 수업을 이어가게 되었다. 뚜벅이인 나를 위해 오전에는 빈집이 되는 우리 집에서. 매일 오전 10시에 만나 2시간씩 이야기를 나눴다. 원가족에 대한 이해부터 나 자신과 아이들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의 매일 눈물바다가 되었고 그렇게 조금씩 나를 찾아가게 되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은 조심스레 성경 이야기를 꺼냈다. 주희 언니와 선생님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나는 무교였지만 양가 어르신들은 불교신자였다. 가끔 주희 언니가 교회 관련 이야기를 꺼내긴 했지만 흘려듣기 일쑤였다. 종교 자체에 관심도 없었고 한국기독교 사회에 반감이 많기도 했다. 그런데 선생님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좋은 인문학 서적이기도 한 성경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어보자는 거였다. 믿음과는 별개로.
한 번쯤은 제대로 읽어봐야지 하던 차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두 번의 자살시도에도 불구하고 지금 같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힘이 기독교였던 선생님의 마음도 진실되게 다가왔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5월의 끝을 함께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한 구절 한 구절마다 의문을 품고 꼬치꼬치 논리적으로 따져 묻는 나에게 답해주지 못한 선생님은 포기란 걸 했다. 표면적으론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 더 이상 수업을 하지 못한단 거였지만. 그렇게 흐지부지 미술 테러피에서 시작된 수업은 끝이 났다. 자연스레 주희 언니와도 조금씩 멀어져 갔다.
2016년 나는 여전히 군산에 살고 있었다. 마트에 회원가입을 했고 도서관 회원증도 있었다. 온갖 포인트카드가 지갑에 가득했다. 가끔 주희 언니와 선생님 생각이 났다.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할 수 있게 했던 그 수업이 고마웠다. 집 앞 도서관 영유아 놀이터에는 가지 않았지만 독서모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날도 실컷 토론을 마치고 회원들과 카페에서 수다를 떨었다. 책수다에 이어 삶의 수다를 말이다.
아직도 그 날의 수다 속 놀라움을 잊을 수가 없다. 당황스러움, 공포, 바보 같은 자신에 대한 한탄, 믿기지 않는 현실, 배신감, 오만가지 감정이 함께 떠오른다. 선생님과 주희 언니는 나를 포섭하기 위한 신천지 신도들이었다. 철저한 계획하에 시나리오를 짜고 일대일 맞춤 포섭을 위한 장기전을 펼치는 그들의 마수에 결국 걸려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회원들은 위로를 했다.
5년이 지난 지금도 믿기지가 않는다. 순수한 호의로 나에게 다가와서 내가 가장 힘들 때 내게 큰 위로가 되었던 주희 언니의 마음이 거짓이었다는 게. 만약 언니가 홀로 외로이 살고자 투쟁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는 무리의 일원이라면 이제는 내가 도와주고 싶다. 그 길에서 내려설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