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 부름을 받고 어느새 어엿한 혼산러(혼자 산타는 사람)가 되....... 기는 아직 이르지! 등산화며 스틱이며 등산가방이며 등산용품이라고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던 초보자였으니...... 무작정 나 홀로 도봉산 등산 이후 날씨는 여전히 좋았으며 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나를 부르는 듯했다. 얼른 오라고, 빨리 오라고! 무언의 환청까지 들리는 듯했으니 어쩌면 정말 산과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 아닐까 싶은 정도였다. 소위 산좀 타는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산이 나를 부른다고 하지 않던가. 그 말이 사실이었음을 실감하는 나날이었다. 직장생활만 아니었다면 평일이라도 당장 산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직장인이기에 산을 탈 수 있는 주말만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여전히 반듯한 등산장비는 구비하지 못했지만 그런 것들이야 차차 준비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등산은 장비 빨, 템빨이라는 말이 있다지만 이제 막 등산을 시작한 초보자에게 장비 빨은 어찌 보면 사치일지니 등산 의지 충만 플러스 젊은 신체(비록 체력은 저질이지만)만 준비되어 있다면 어느 산이든 달려갈 준비가 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다음 산행지는 집 근처의 수락산으로 정하게 되었다. 물론 등산화 대신 낡은 운동화를 신었고, 등산가방 대신 대학교 때 샀던 백팩을 둘러멘 채였다. 아무렴 어떤가, 이미 마음만큼은 전문 등산가 못지않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길치에게는 치명적인 등산이라는 취미
등산 의지 충만했던 내가 간과했던 나의 치명적 단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내가 심각한 길치라는 것이다. 해외에서도 구글 지도를 켜놓고도 목적지로 향하는 방향도 잡지 못해 같은자리를 몇 번이나 뺑 그르르 돌기 일쑤였고, 지하철을 타도 목적지의 반대방향으로 타서 한참 뒤에야 눈치채기가 부지기수였다. 그랬던 내가 호기롭게 혼자 등산을 하기로 맘먹었으니 어찌 보면 험난한 등산길이 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등산길에 오르기 전 검색창에 "수락산 등산코스"를 치고 여러 후기들을 탐독하며 '아 정상까지는 이렇게 쭉 올라가면 되겠구나~?' 생각하다가도 막상 등산로에 진입하면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내 멋대로 세운 등산 제1원칙: 하나. 사람 많은 길을 따라갈 것, 둘. 이정표에서 정상 방향을 향해 무작정 올라갈 것. 물론 이 원칙은 어디까지나 내 멋대로 였기 때문에 시행착오는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역시나... 아니나 다를까 분명 사람 많은 길을 따라왔으나 어느 시점에서부터 사람이 점점 줄어들더니 인적이 드문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으며 이정표에 분명 정상 방향이라서 그 방향으로 갔으나 사람은 점점 보이지 않고 나만 외로이 길을 걷게 되었다. 사람 소리보다 새소리 바스락대는 낙엽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길은 점점 '이 길이 과연 등산로가 맞나?'싶을 정도로 가파르거나 커다란 바윗길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나 홀로 고군분투하며 낭떠러지 같은 커다란 바위 앞에 당도했을 무렵 산악회 회원님들로 보이는 어르신 세분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등산화는 무조건 캠프ㅇㅇ이야, 꼭 기억해!
앞은 낭떠러지 같은 거대한 바위요, 뒤는 돌아가는 길 뿐이니....... 위로 오르려면 이 낭떠러지 같은 바위를 올라야만 하나니. 멍하니 그 커다란 바윗길을 바라보고 있는데 인기척이 들리더니 산악회 분들로 보이는 어르신 세분이 말을 걸어왔다.
"아가씨, 혼자 왔어요?"
"네, 하하하....... 근데 저 바위로 올라가는 길밖엔 없나요?"
"응, 저기로 올라가야지~"
도저히 올라갈 엄두가 안 나서 망설이고 있는 찰나 산악회 어르신들 중에서 딱 봐도 등산 경력 수십 년의 범상치 않아 보이는 어르신께서 혼자 왔으면 도와줄 테니 같이 올라가자고 말씀하셨다. 순간 천군만마를 얻은 듯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드디어 살았구나 싶은 안도감이 몰려왔다. 괜히 정상에 오르겠다고 무리해서 바위를 올랐다가 미끄러져 떨어지는 장면이 계속해서 리플레이되었기 때문이다. 이분들과 함께라면 나도 정상에 오를 수 있을 것만 같다는 희망찬 기운이 샘솟았다. 딱 봤을 때에도 경사가 장난이 아니었는데 막상 바위에 오르니 그 경사가 더 급격하게 다가왔다. 내 낡은 운동화가 이 경사를 버텨줄지 의심스러워서 한발 내딛기가 망설여지는데 다행히 어르신께서 로프 같은 것을 건네주며 잡고 올라오라고 해주셨다. 그 로프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같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로프를 잡고 급경사의 바위를 오르는데 그 와중에 다른 어르신께서 사진을 찍어주시겠다며 포즈를 잡아보라고 하셔서 정신없는 와중에 스마일 포즈에 손가락 브이까지 하며 인증사진을 찍었다. 덕분에 그때의 기억이 핸드폰 사진첩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수락산 주봉 정상에 오를 때까지 끝까지 에스코트해주신 어르신들께서 내 신발을 보더니 등산하는 자세가 안되어있다며 따끔하게 혼을 내시며, 한국산은 바위 지형이 많으니 꼭 접지력이 좋은 캠프ㅇㅇ 등산화를 사서 신으라고 조언해주셨다. 처음 들어보는 브랜드명이라 알겠다 하고 집에 와서 찾아보니 나름 등산 마니아층에서는 유명한 등산화 브랜드였다. 그 이후 어르신의 조언대로 그 브랜드의 등산화를 구매하게 되었다. 어르신 말씀대로 바위에 착착 달라붙는 게 안정감 있고 좋았다. 역시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떨어지는 법! 우연한 산에서의 인연이었지만 덕분에 무사히 정상에도 오를 수 있었고 등산화 팁까지 얻을 수 있었으니 이런 인연이 바로 귀인이 아니겠는가. 감사하게도 정상에서는 아이스크림(메로ㅇ)까지 사주셔서 등산으로 인한 갈증을 말끔히 씻어버릴 수 있었다. 산이 아니었다면 어디서 이런 인연을 만날 수 있을까? 나 홀로 등산이 결코 외롭지 않았던 진귀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