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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스테라 Jun 24. 2023

조선족 이모님을 한국인으로 만들어 드리다.

(베이비시터 이모님의 국적취득)

국선전담 변호사가 되기 전의 이야기이다.     


그땐 아이가 어렸고, 법무법인에서 소속 변호사로 일하던 시절인데 야근도 종종 해야 했고 바빴다. 그래서 집에는 입주 베이비시터 이모님이 늘 계셨다.


 이 중 우리와 5년을 함께한 이모님이 계신다.   

  

우리 부부는 한국인 베이비시터와 조선족 베이비시터 모두 겪어보고는, 아이를 대하는 자세나 인품은 국적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 개인에게 달린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마지막 입주 베이비시터이자 우리와 5년을 함께 했던 이모님을 고용할 때에는 국적을 가리지 않고 면접을 보았다.

     

단, 조선족분들 중에는 나이를 속이는 분들이 있었는데, 외국인등록증에 기재된 것보다 열 살 이상 줄여서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


주로 “중국 호구부에 나이가 많게 잘못 기재되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럼 태어나기도 전에 누군가를 호구부에 올린다는 말인가?’     


어린아이들은 안아야 할 때도 많고 머리 감기고 목욕시킬 때도 힘이 필요하므로 나이가 아주 많으면 일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우리는 실제 나이를 파악하기 위해 연도별 띠를 검색한 자료를 가지고 면접을 보았다.    

 

"몇 년 생이세요?"라고 물었을 때는 나이를 속이려는 사람도 잘 대답한다. 미리 생각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몇 년생이라고 했을 때 "그럼 무슨 띠세요?"라고 물었을 때에는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면서 안면근육 마비증상을 보이시거나 어버버 하시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면접 준비와 상관없이 우리는 나이가 많은 이모님을 뽑게 되었다. 이모님은 원래 만나기로 정해져 있었던 인연처럼 자연스럽게 우리 집에 스며들었다.  

        


이모님의 딸은 한국인과 결혼해서 지방에서 살고 있었고, 이모님은 한국에서 오랫동안 일해서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이모님이 평일 저녁인데 집에 갔다가 다음날 아침에 오면 안 되느냐고 하셨다. 물어보니 남편 제삿날이라고 하셨다. 그러시라고 했다.    

 

이모님께 들은 사연은 이렇다.

이모님은 중국에서 오래전 이혼하고 한국에 나와서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모님은 지하철 계단을 올라가다가 어떤 아저씨가 숨을 거칠게 쉬면서 계단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아저씨에게 다가가 어디 아프시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아저씨는 “바로 위에 병원이 있는데 거기까지만 좀 바래다주세요.”라고 하셨다고 한다.


 이모님은 아저씨를 부축해서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는데 그 아저씨가 감사하니 나중에 밥 한번 사드리고 싶다고 해서 전화번호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 아저씨는 이혼 후 혼자 살고 있는 아저씨였는데 이모님과 아저씨는 연애기간을 거친 다음 결혼했다. 그런데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아저씨에게 암이 발병했고, 이모님은 일을 그만두고 남편의 암투병 간병을 시작했다.      


이모님의 남편은 결혼한 지 2년이 되기 전 암으로 사망하셨다. 이모님은 결혼 기간 내내 남편의 암투병 간병만 하다가 사별을 겪으신 것이었다.

  

우리나라 국적법에는 ‘대한민국 국민인 배우자와 혼인한 상태로 대한민국에 2년 이상 계속하여 주소가 있는 사람’은 간이 하게 귀화허가를 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이모님은 결혼한 지 2년이 되기 직전에 남편이 돌아가셔서 혼인 귀화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어렵다는 일반귀화를 신청해 두었는데 신청한 지 2년이 넘도록 출입국관리소에서는 아무 소식도 없다고 하셨다.   

  


이모님은 내가 아이를 혼내고 있으면     

말을 안 들으니까 애지,
말 잘 들으면 어른이게요..

라고 하시며 늘 아이 편을 드셨다.     


이모님은 아이를 데리고 문화센터를 다니고, 유아 체육관을 다니면서 외동인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했다. 놀이터나 유아체육관에서 만난 엄마들과도 교류하면서 아이가 친구와 놀이터나 레고방에서 함께 놀 수 있도록 약속을 잡아서 아이를 데리고 나가기도 하셨다.     


아이는 이모님을 할머니라고 부르며 잘 따랐고 이모님이 아이에게 잘해주신다는 것이 느껴졌다.   

  

현충일 공휴일 다음날 이모님께 어제 뭐 하고 쉬셨냐고 물어보니 남편이 있는 현충원에 다녀왔다고 하셨다. 남편이 월남전 상이군경이라서 생전에 보훈연금을 받고 있었다고.     


그 보훈연금은 이제 이모님이 받으시냐고 물어보니 이모님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면 배우자라도 유족연금을 받을 수 없대요.

라고 하셨다.     

하아..

대한민국 국민의 암수발을 2년 가까이하고 가족도 찾지 않는 남편의 장례를 홀로 치러주고 현충원에 모신 뒤 해마다 제사를 지내는 아내가 대한민국 국민이 될 수 없다니! 심지어 대한민국 국민의 아이를 정성스럽게 돌보고 있는데!

    

나는 이모님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만들겠다는 의지에 활활 타올랐다.        

  

이모님은 혹시나 출입국관리소에서 귀화시험을 치러 오라고 연락이 올 것을 대비해서 종합평가와 면접시험을 대비하는 문제집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가 낮잠을 자거나 어린이집에 가면 보려고 했는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문제집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셨다. 귀화는 사실상 포기하셨다면서.     


그런데 국적법을 살펴보니 만 60세가 넘으면 종합평가가 면제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모님께 종합평가 준비는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씀드렸다. 이모님은 문제집을 버리며 좋아하셨다. 혹시나 면접을 볼 것을 대비해서 애국가 4절까지는 외워야 할 것 같아서 하루종일 들을 수 있는 애국가 CD를 드렸다. 집에서 틀어놓고 일하시라고.    

 

덕분에 아이가 애국가를 4절까지 흥얼거렸다.



그리고 이모님의 귀화신청서 행방부터 찾기 시작했다. 신청한 지 2년이나 지났는데 아무런 절차가 진행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이상했다.


이 귀화신청건이 어떤 사정에선가 잊힌 신청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민권익위원회를 통해서 이모님의 귀화신청건이 처리되지 않고 있는 사정을 물었다.


내가 이 신청건의 담당자를 알 수 없었고, 국민권익위원회에 접수된 민원은 어떤 방식으로든 처리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권익위에서 출입국관리소 담당자에게 소명을 요청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권익위에 민원을 접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출입국관리소 귀화 담당자분이 나에게 직접 전화하셨고, 이 사건이 어떤 경위로 누락이 되어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고 설명하셨다. 마침 담당자분이 친절하셔서 절차나 보완서류를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국적법상 대한민국 국민인 배우자와 혼인한 상태로 대한민국에 주소를 두고 있던 중 그 배우자의 사망으로 혼인 생활을 할 수 없었던 사람은 ‘법무부장관이 상당(相當)하다고 인정’할 경우 간이 하게 귀화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정확한 요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법무부장관이 상당하다고 인정’이라는 것이 추상적이어서 귀화가 쉽지는 않았다.     


나는 출입국관리소 담당자에게 진술서처럼 장문의 편지를 썼다. 이모님이 대한민국 국민이 될 자격이 있음을 목격한 사람으로서.     


이후 출입국관리소 귀화 담당자분이 편지를 받고 감동받았다고 하시며 연락이 왔다. 아마 참고자료로 사용된 것 같다.

     

이모님은 서류 보완과 절차를 거쳐

드디어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그다음에는 보훈처에 연락했다. 국가유공자의 배우자가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고.


이모님은 이후 사망한 국가유공자의 배우자로서 유족연금을 받게 되셨다. 그것은 혼자서 고된 삶을 살던 한 남자의 마지막 암투병 기간을 간병하면서 지켜준 이모님께 그분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모님과 만난지 5년째 되던 해에 나는 국선전담변호사를 지원했다. 그리고 이모님의 집과 다소 먼 거리로 이사하게 되어 우리는 헤어지게 되었다.


이모님은 나에게 감사하다고 하셨고, 나는 이모님께 감사하다고 하면서 헤어졌다. 이모님은 우리 집에 들어올 때는 중국인이셨고, 나가실 때는 한국인이셨다.


내가 아이를 직접 돌보지 못하고 때로는 눈물로 시간을 보내며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 회의할 때, 온갖 어려운 일이 손을 잡고 함께 와서 절망할 때에도 이모님이 계셔서 그 시간들을 잘 견디고 잘 자라서 튼튼한 몬스테라가 될 수 있었다.


돈을 받고 하는 일이라도 일을 잘 해주는 것을 당연히 여기면 안된다.


친절이나 미소, 눈빛과 말투 조차도 그 사람이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 내 은인의 국적취득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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