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알아가는 시간
대학교 1학년 때 만난 남자친구와 10년을 연애하고 결혼하게 되었다. 10년이라는 긴 시간을 사귀면서 그와 나는 서로에 대해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표정만 봐도, 그의 말만 들어도 다음의 행동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을 만큼.
그래서 나는, 그리고 그는 이제 우리는 너무나 서로를 잘 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10년간 연애하는 중에도 남자친구와 여행다운 여행을 다닌 적은 없었다. 처음 제대로 여행이라고 간 것은 신혼여행. 첫 여행이었던 만큼 허술하고 어설펐다. 낯선 타국인데다 길도 잘 모르고, 언어도 잘 통하지 않아 당황해서 원하던 곳을 가기보다 그 근처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도 찾아서 놀자고 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 아이들이 태어났고 아이들에게 좋은 것을 보여주고 경험시켜주자는 마음에 여행을 다녔다. 생각과는 달리 부부는 어린 고객님들이 타지에서 불편하시지 않게 수발들기 바빴고, 그들의 니즈를 실시간으로 파악해야했다. 개성 강한 남매를 낳아놓으니 취향이 달라도 너무 달라 아빠와 아들, 엄마와 딸로, 혹은 아빠와 딸, 엄마와 아들로 나누어 아이돌 그룹도 아닌 것이 유닛으로 활동했다.
그렇게 가도 어린 고객님들은 자신들을 위한 여행이라는 것을 아는지 니즈를 있는 힘껏 풀어냈다. 그것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은 여행이라기보다 비위맞추는 수발이었다.
그러다 아이들이 자라서 각자 친구들과 여행을 다니고, 부모와 지내는 것보다 친구와 지내는 것을 즐겨하는 나이가 되니 여행을 가보자 해도 시큰둥한 반응이 돌아왔다. 이제 덩그러니 나이든 부부만 남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었다.
집에 둘만 있으면 마땅히 재미난 거리가 없어서 멀뚱멀뚱 지내기 일쑤였는데,
‘이번 겨울에는 우리도 어디 좀 가볼까?’ 하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여행지로 여러군데를 타진하던 중 멀지는 않지만 그동안 가보고 싶었던 곳을 추려보다가 일본 홋카이도에 가보자고 결정했다.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 곧장 항공편과 숙소를 예약했다. 그리고는 신경을 딱 꺼두었는데, 3개월쯤 시간이 흘러 여행 일자가 코앞에 다가왔다. 부랴부랴 서로 가고 싶은 곳들을 여행 공유어플에 담아두었다. 이렇게 어설프게 떠나도 되는거야?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이상하리만큼 부담이 되지 않았다. 마땅히 준비도 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여행을 떠났다.
남편과 둘만 떠나는 여행은 신혼여행 이후 처음이라 서로의 여행코드를 모르니 다른 것보다 싸우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가장 컸다. 가서 마음 편하게 지내다 와야하는데 혹시라도 서로를 섭섭하게 하면 어쩌지, 그러다 분위기 망치면 어쩌지... 하는 걱정.
하지만 막상 출발해 보니 남편도 나도 아이처럼 설레고 신나서 싸울 일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수발들어야 할 사람들도 없고, 각자 1인분씩 하는 성인이라 한 명은 언어가 되고, 한명은 길을 찾으니 못할 일도, 못갈 곳도 없었다. 둘 뿐이니 의견 조율도 쉬웠고, 먹고 싶은 것도 정리가 잘 되었다.
결혼 후 20년이 지난 지금 처음 둘이 여행을 떠나보니 서로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했던 부분에 대해 다시금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간식을 엄청 좋아하지만, 그는 내가 간식을 사지 않으면 자신이 먼저 간식을 사지는 않는다는 것. 엄청 효율 중심인 사람이라 헤매거나 시간 낭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도 유유자적하며 시간을 때우거나 멍하며 사색하는 시간을 즐겨하는 사람이라는 것. 의외로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해서 손톱만한 작은 유리 공예 인형을 구경하는데 한 시간 가량을 할애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눈이 내리고 쌓이는 것을 낭만적으로 느낄 줄도 알며 예쁘고 분위기있는 사진 한장을 건지려 수십 장의 사진 찍기를 마다하지않는 사람이라는 것.
그동안의 여행에서 늘 가족들을 리드하느라 분주하게 준비하던 사람이, 일본에서는 편안하게 뒷짐도 지고 왠만한 것을 나에게 맡기는 모습을 보니 조금 귀엽기도 했다.
사람을 알아보려면 여행을 떠나보라고 했던 말이 괜한 말이 아니었구나.
연애 10년에 결혼 20년, 30년을 알고 지낸 사이인데도 둘만 떠나는 여행을 해 보니 이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짓는지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
남편에게 다음 여행에서는 주도적으로 간식 사기를 다짐받으며 우리는 다음 여행을 약속했다.
“다음에는 어디로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