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디거나 닳거나, 부러지거나
필자가 일본 애니메이션을 즐겨 보던 시절에는 라프텔이나 왓챠나 넷플릭스나, 합법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는 창구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 애니를 보려면 다음팟에 올라와 있는 자막이 붙어 있는 애니메이션을 보거나 아니면 케이블 TV를 끌어와서 애니맥스나 투니버스 같은 채널을, TV 앞에 가만히 정좌해서 봐야만 했다. 그러나 투니버스는 어린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애니메이션밖에 틀어주지 않았고 애니맥스는 우리 집의 낡은 TV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누가 다음팟에 올린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오타쿠로서 느낄 수밖에 없는 '덕질'을 향한 갈증을 해소해 나갔다.
케이온! 을 처음 본 것은 2009년 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기서 잠시 케이온! 에 대해 비화를 들려주자면, 교토 애니메이션은 신진 감독을 육성하기 위해서 실력으로 보나 연출 능력으로 보나 당시에 가장 뛰어난 인재였던 '야마다 나오코'에게 감독 자리를 맡기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이런 결정도 우연하게 벌어진 것으로 케이온! 의 제작 회의에서 "야마다 씨가 감독을 맡아보는 게 어떻습니까?"라는 제작 후원사의 제안이 나왔고 거기에 야마다 감독님이 해 보겠다고 해서 만으로 24살이던 야마다 나오코는 일약 감독 데뷔를 하게 되었다. 실제로 케이온! 의 1화 연출을 당시 교토 애니메이션의 기라성 같은 작품들과 (예컨대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이나 <클라나드>나 <풀 메탈 패닉 후못후>나 기타 등등) 비교해 보면 화면 구성이 매우 정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애니메이션 전문 학원에서 애니메이션을 배운 이시하라 타츠야나 고 타케모토 야스히로 감독과는 다르게, 야마다 나오코는 교토조형대학 출신으로 대학교에서 예술을 배우고 바로 실전으로 투입된 사람이다. 스타일이 다르다면 다를 수밖에 없는데, 한 가지 예를 들면 1화에서 카메라의 위치가 어느 쪽에 있냐고 하면 마치 실사 드라마를 찍는 것처럼 여러 포인트에 카메라를 고정해 두고 내화면에 보여주는 카메라를 교체하는 식으로, 정말로 현실에 있을 법한 여자 고등학생을 그려내었다. 그 뒤로 케이온! 은 각 화의 연출가는 달랐지만 감독의 지휘로 대성공을 거두었고 우리가 익히 아는 케이온 신드롬을 불러 일으켰다. 라는 걸 기억하는 사람이 아직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그것도 찬란한 과거의 영광이 되었으니까.
일상물인 케이온! 이 철저하게 일상적인 색채를 작품 속에 기입하면서 허상인 애니메이션에 현실감을 부여했다면, 반대로 나는 소설 속에서 '리얼리즘'이라는 게 얼마나 적절하고 정확하게 기능할 수 있는지 늘 의문을 품고 있었다. 소설이라는 형식은 허구를 담기 위해서 만들어진, 가짜 이야기에 최적화된 무대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한국의 '순문학'이라는 뭐라 정의 내리기 어려운 이상한 장르는 단편 소설이 리얼리즘을 채용하지 않으면 현실과 사회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으로 격하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왜 그랬는지 예전에는 잘 몰랐지만 이제는 그것이 우리가 '문학성'이라고 믿고 있는 현실과 소설 사이의 모종의 연결에 대한 굳은 믿음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러므로 사람들이 흔히 '리얼리즘'이라고 말하는 소설 속의 현실은 실은 진짜 현실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는 단순히 소설가들이 사용하는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라면 '나'라는 1인칭과 자전적 소설이라는 외피를 빌리는 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쉽게 말해서 그렇게 하면서까지 이야기할 만한 주제와 메시지가 있냐는 문제제기로 이어진다. 아마 소설가 본인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텐데 그것은 예술을 하는 입장에서는 정당한 일이다.
하지만 단지 예술을 창작하는 입장에서 정당한 일이라고 해서 그 문제에 대답을 포기하고 쓰고 싶은 글이나 쓰고 싶지는 않았다. <방과후 티타임과 나>를 쓰기 전에 나는 이것이 윤리적인 문제이기도 하면서 예컨대 김봉곤의 카톡 대화 도용 스캔들이 촉발하였던 것처럼 주변에 널려 있는 소재를 긁어모아서 소설을 완성하기만 하면 된다는 소설가의 '자의식'이 문제의 근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의 자의식은 한 편의 소설을 쓰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기는 하지만 문제는 전업의 세계에서는 계속 소설을 쓰지 않으면 소설가라는 직함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몇 해 전에 나온 한국 영화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 손님>(2018)에서 나오는 것처럼 표절과 소재 도용을 일삼는 등단 작가가 출몰할 수밖에 없고, 정작 순수하게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주인공은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상호합의 하에 묵인되는 행태에 짜증과 함께 체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문제가 단번에 해결될 수는 없고 오랜 시간을 들여서 점차적으로 해결되어야만 한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한국 문학이 '리얼리즘'이라는 망령을 바로 벗어던질 수 없다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리얼리즘이 단순한 외피에 불과하다면, 그것을 인식하고 벗어던지면 그만이다.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서 새 출발을 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리얼리즘이면서 동시에 '리얼'이 아닌 소설을 쓰는 게 유효한 방법으로 생각되었다. 말 그대로 리얼리즘이 보여줄 수 있는 효과를 소설 속에 차용하되, 내가 겪은 일을 소설 안에 쓰지 않는 것이다. <방과후 티타임과 나>는 그 전의 다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겪은 일을 소설의 내용으로 집어넣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현이나 연화나 빛샘은 내가 현실에서 본 적이 없는 친구들이고 따라서 어떤 '리얼함'이 줄어들어 보일 수는 있겠지만 차라리 그 편이 윤리적으로는 나을 수도 있다. 나는 학창 시절에 밴드부에 들어가지 않았고 기타를 연주한 적도 없고 피아노는 애초에 그만두어서 연주하는 법도 까먹었다.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현실적인 요소를 집어넣은 부분은 코로나19로 모두가 마스크를 쓰는 부분인데, 사실 해당 장면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넣은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리얼리즘을 구사하기 위해서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코로나'라는 거대한 재난이 필요했을 뿐이다. 뒤의 이야기도 모두 내가 겪은 일들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은 이야기라는 구조를 벗어나서 자신을 온전하게 설명할 수 없다. 현실과 이야기는 서로 이분법적으로 날카롭게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등나무 줄기처럼 얽히고설킨, 애매하고 복잡하고 그렇기에 흥미로운 대상들이다. 인간은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야기라는 구조를 필요로 하고, 이야기 또한 자신의 주름을 펼쳐 보이기 위해서 현실이라는 재료를 필요로 한다. 인간은 하나의 이야기를 자아내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 이해하고 더 넓은 의미에서는 '세계'를 이해하는 관점을 획득한다. 한 인간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기 위해 이야기를 도입한다면, 도입된 이야기를 통해 독자는 한순간이나마 경계 없는 무한의 세계를 경험한다. 내가 '유사 영원의 세계'라고 말한 바로 그것이다. 유사 영원이라는 말은 이야기가 보여주는 영원이 진짜 영원은 아니고, 책을 덮는 순간에 사람은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방과 후 티타임과 나>의 주인공 은아는 고등학생 이후의 세월을 견디며 닳아 없어지고 때로는 거친 파도에 부러지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 이야기가 앞으로도 이어질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하고 싶었던 말을 다 하고 나서 쉴 때까지, 모두의 인생에 마침표를 찍기 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