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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재 Nov 28. 2024

강보원 『에세이의 준비』 (민음사) 서평

인생에서 벗어나는 순간은 없다

나라면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자리에 앉아 쓰기 시작할 것 같다. 돈과 꿈에 대해, ‘전재산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돈이 없어서 하지 못했던 것들, 돈이 생기면 앞으로 하게 될 것들, 사랑과 우정, ‘약속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 행운, 운명, 스포츠카, 등등에 대해…… 어쨌든 영화는 흥미로워 보였다.

강보원, 『에세이의 준비』, p. 59-60.



어려운 시대라고 해도 사람들은 책을 쓰고, 종이책을 출판한다는 말 속에서 무엇을 느낄지는 사람들마다 다를 것이다. 책을 쓴다는 행위에서 가치를 발견하는 사람은 “시대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책을 씀으로써 원래 없던 것에서부터 가치를 만들어낸다고 받아들이면서 긍정적으로 이해해 줄 것이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책 쓰는 일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당연히 착한 사람이다. 이와는 반대로 책을 쓴다는 행위에서 가치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은—결코 적지 않은 숫자이다—시대가 어려운데, 왜 책을 씀으로써 종이를 낭비하느냐라고 굳게 믿거나 아니면 저자를 찾아가서 불쌍한 저자들에게 종이를 낭비하지 말라고 말할 것이다. 한때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유행하였던 ‘나무야 미안해’라는 비아냥대는 듯한 댓글이 대표적이다. (본인이 쓴 책에 대해서는 아마도 자존심의 문제겠지만, “나무야 미안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합당한 추측은, 우리를 씁쓸한 기분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그리고 에세이라는 장르는 오래전부터 독자들에 의해서도, 심지어 출판사에 의해서도 올바르게 이해받지 못했으며 그 결과 우리는 에세이의 홍수 속에서 책을 고르는 안목을 갖지 못한 채 이리저리 방황하게 되었다.

『에세이의 준비』라는 책의 제목은 우리에게 롤랑 바르트의 『소설의 준비』라는 강의록을 상기시킨다. 강보원은 자신이 바르트의 마지막 강의에서 제목을 따 왔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책 제목을 누구의 말에서 가져왔는지를 밝히지 않는 사람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랍게 느껴진다. 그런 시도는 저자보다 똑똑한 독자들에 의해서 제목의 유래가 밝혀지기 전까지만 의미가 있다.)


『에세이의 준비』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나는 이 책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바르트의 강의록으로부터 얻었다. 소설에서 에세이로 장르가 바뀌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문제의식도 기본적으로 같다. 물론 이 준비는 체계적이라기보다 총체적이고 포괄적이며 동시에 부분적이고 파편적일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하면…… 두서가 없고 얼렁 뚱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여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강보원, 『에세이의 준비』, p. 12.





『에세이의 준비』를 이야기하기 전에 나는 우선 강보원이라는 저자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강보원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면 이 글은 절반 이상의 정직성을 잃어버린다. 절반 이상의 정직성을 잃어버린다는 말은, 서평으로서 가져야 하는 자격 혹은 미덕을 잃어버리고 독자에게 책을 반드시 읽어 봐야겠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라는 말과 같다. 특히, 『에세이의 준비』는 내가 읽기에는 ‘강보원’과 강보원이 쓴 ‘에세이’를 날카롭게 보이지 않는 칼로 잘라서 분리해 낼 수가 없다.

만약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고 글을 써야 한다면, 사정은 매우 다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는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소설가와 그가 쓴 ‘에세이’를 보이지 않는 칼로 아름답게 잘라낼 수 있게끔, 연필로 촘촘하게 점선이 그려져 있어서 이대로만 자르면 둘을 분리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쓰여 있다. 둘을 분리할 수 있게 쓰여 있으면서도 동시에 우리에게 에세이에서 다룬 것들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꽤나 좋은 에세이스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좋은 에세이스트인 것과 같이, 동일한 수준에서, 강보원도 좋은 에세이스트이다.


푸코는 글쓰기의 즐거움이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질문에 대해서는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는 다만 글쓰기란 그것이 존재하는지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글쓰기의 동기가 자신의 즐거움이나 괴로움, 기쁨, 슬픔 등의 감정과 무관한 층위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마지막 강의』에서 “시도하기 위해 희망할 필요도 없고, 지속하기 위해 성공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글쓰기가 하나의 의무로서 주어진다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즐거움과 행복을 포함한 일체의 이유와 무관하게 지속되는 행위라는 것을 의미한다. (혹은 그 지속을 위한 방법일 것이다.)


같은 책, pp. 30-31.


나는 지금까지(2024. 11월까지) 강보원을 여러 차례 만나 왔다. 강보원을 처음 만난 게 언제였을까?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시작한 뒤로 강보원을 만났으므로, 그리 먼 과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인생의 스케일에서 보면 상대적으로 가까이 있는 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를 서울시 강남구에 있는 어느 서점에서 벌어진 대담회에서 처음 만났을 때, 특이한 사람일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평범한 사람, 독특한 점이 하나도 없는 남자라는 것에 묘한 기분을 느꼈다. 대담자로서 강보원은 한쪽 팔의 팔목에 KF94 마스크를 미싱가(misinga)처럼 매달고, 다른 쪽 손에는 마이크를 쥐고서 다양한 이야기를 했다. 그게 무슨 말이었는지는 이제 와서 잘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히 좋은 말이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게 첫 만남이었고, 나는 이후로도 몇 번 더 만났다. 그리고 내가 바빠지고 강보원도 할 일들—주로 마감을 앞두고 있는 에세이와 문학평론을 쓰는 등의 일—로 바빠지면서 자연스럽게 만나지 않게 되었다. 올 가을에 『에세이의 준비』가 출판되면서, 우리는 책을 매개로 해서 일 년 만에 안부 인사를 교환했다.


나중에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냥 졸업을 했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로부터 무슨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종의 배려였다. 졸업을 할 시기가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아직 졸업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그저 웃고 조금 놀리는 정도였는데,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이 당황하고 심각하게 걱정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중략) 그리고 1년이나 그 후에 만나면 사람들은 내가 당연히 졸업을 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더 묻지 않았다. 물론 그냥 사람들이 눈치가 빠르고 배려심이 깊고 쓸데없이 귀찮아지는 일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같은 책, p. 72.


강보원은 나에게도 학부 졸업에 대해서 인용한 문장과 비슷하게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마도 나는 강보원의 졸업에 대해선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학부 졸업은 걱정할 일이 아니기도 하지만, 타인의 사정에 선을 넘어서 개입하지 않는 게 내 방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강보원이 13년 동안 졸업을 못 했다는 사실을 에세이를 통해 하나의 ‘진실’로 받아들이고 나서도, 놀라지는 않았다. 만약 강보원이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 나의 XX친구였다면 어떨까? 나는 지금보다 더 강하게 졸업하지 않은 그의 상태를 걱정하였을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가정법은 시간이 지나고 보면, 큰 의미는 없고 사소한 의미처럼 느껴진다. 인생에서 졸업이라는 사건이 갖는 의미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소해지는 것처럼.





오래된 글이기에 예술가와 신에 대한 다소 낭만적인 관점을 채택하고 있지만, 이 글이 주장하는 것은 모든 사물을 평등하게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삶에 대해 쓴다면, 더 나은 삶이나 더 가치 없는 삶은 없다. 존 케이지는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인생에서 벗어나는 순간은 없다."


같은 책, p. 36.



『에세이의 준비』를 읽으면서 나는 책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잡다한 생각을 하며 즐겁게 책을 읽었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책에 대해 오해하는 한 가지 믿음은, 책을 즐겁게 읽는 사람들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책을 벗어난 개념이나 사태, 현실적 사건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로, 장르에 따라서 양의 차이는 있겠지만,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하면 할수록 그 책을 깊고 즐겁게 읽는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냐면, 나는 책을 읽으면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영화를 생각하고, 영화 속 장면들을 불러 냈다. <초속 5센티미터> (2007년)라는 영화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초속 5센티미터>는 비디오테이프가 끊어질 만큼이나 많이—나는 이 영화를 비디오테이프로 본 적이 없다. 비유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본 영화라서, 대화를 나눌 때도 장면 단위로 기억 시스템 속에서 소환되는 일이 종종 있다. 초식공룡 이름을 맞추면서 서로 친해지는 장면, 맥도날드에서 두 주인공(남자와 여자)이 같이 먹었던 프렌치 프라이와 케찹, 짓궂은 반 아이들이 칠판에 분필로 적어놓은 “커플 하트”를 보고 여주인공이 눈에 띄게 당황스러워하자, 그 모습을 뒤에서 본 남주인공이 손을 붙잡고 그대로 교실 밖으로 뛰쳐나가는 장면, 인공위성의 비행과 남자 주인공을 감싸는 무한에 가까운 고독.


흥미로운 점은, <초속 5센티미터>에서 중심 주제로 제시되는 운명적인 삶의 경로와, 『에세이의 준비』에서 강보원이 독자에게 새삼 여러 차례 제시하고자, 설득하고자 하는 대안적인 삶의 경로가, 서로가 서로에 대한 안티테제라 해도 좋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초속 5센티미터>는 세 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벚꽃 이야기>에서는 두 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낭만주의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코스모나우트>에서는 가고시마현의 어느 섬에서 살게 된 남자 주인공과, 그를 짝사랑하는 여자 조연의 시간을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마지막 <초속 5센티미터>에서는 두 주인공이 재회하기까지 지나온 시간들을 건조하게 보여주고, 재회의 순간에 돌아보지만 열차가 양쪽에서 지나가서 결국 만나지 못하는 상황을 묘사한다.


이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은 사랑과 아름다움을 경험한다. 찰나의 아름다움을 경험하지만, 이 아름다움이 중학생이 겪기에는 지나치게 큰 아름다움이라서(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남자는 이후의 삶을 헛되고 공허한 삶으로 여기게 된다. 프로이트적으로 말하면, 남자는 쾌락 원칙의 붕괴를 겪고 나서 죽음충동의 영향을 받아서 이끌린다.

한편으로, 『에세이의 준비』에서 제시되는 삶은 사랑과 아름다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어쩌면 우리가 알아야 할 전부는 아름답지 않은 삶에 대한 것일지도 모른다.” (같은 책, p. 181.) 강보원에 따르면, 글을 쓰는 사람은 마음이 결여되어 있음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삶을 연장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 적어도 에세이를 쓰기 위한 완벽한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내가 생각하기에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양철 나무꾼은 글을 쓰는 사람에 대한 가장 탁월한 이미지 중 하나다. 단순한 기구-작가. 그러니까 글을 쓰는 사람은 감수성이 풍부하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기 이전에 자신에게 마음이 결여되어 있음을, 나아가 마음이 자신의 바깥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양철 나무꾼은 도로시와 함께 떠난 여행의 끝에 양철로 된 심장 조각을 가슴에 넣고 그것으로 마음을 얻었다며 만족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다. 마음으로 쓸 양철 조각.


같은 책, p. 51



하나는 애니메이션 영화고, 다른 하나는 에세이다. 애니메이션은 삶으로부터 멀어지고, 에세이는 텍스트를 경유해 삶에 가까워지고자 노력한다. 이 대비는 내가 『에세이의 준비』를 읽으면서 임의적으로 만들어 낸 구조물이지만, 우리에게 두 가지의 삶이 다른 이유와 함께, 글을 쓰는 삶이 왜 ‘생명적’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어린 자아의 쾌락 원칙을 아득하게 넘어서는 치사량의 아름다움과 사랑, 말로 묘사할 수 없는 사랑을 경험한 남자는, 자신의 삶을 서술하지 못하고 죽음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동일한 가치를 삶 속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남자는, 삶의 아름다운 순간을 “무한에 가까울 만큼이나” 지연시키면서 삶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을 외면한다. 에세이를 쓰는 사람은 심장 속에 마음이 없다는 불변하는 진리를 아는 사람이다. 마음으로 쓸 양철 조각을 찾아서, 그것을 마음 대신으로 쓰는 사람이다.


『에세이의 준비』의 미덕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문학 장르에서 나오는 책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무엇인가를 하라고 독자를 격려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강보원의 미덕은, 타인의 지적인 노동—이성을 사용하는 노동—을 중단시키려는 의도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감성을 사용하는 일을 권장하려는 의도로 글을 쓴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중에서 몇몇은 하라고 하는 권유보다 하지 말라는 명령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가족에게, 친구에게(우정을 빌미로 해서), 선생님에게, 직장 상사에게, 또는 길거리를 지나가는 어린 친구에게 하지 말라는 말을 너무 자주 들은 사람들은 하기 전부터 포기한다. 자신은 해낼 수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시도하기도 전에 끝낸다. 하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남들이 하지 말라고 해도, 시도를 비방해도 계속해 나간다. 이것이 마지막에는 창작을 지속하는 사람—강보원, 무라카미 하루키, 롤랑 바르트 같은 작가들—과 아닌 사람을 가르는 절취선이 된다.


아무튼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기에 적어도 지금까지 『에세이의 준비』에서 내가 다뤘던 전부는 무언가를 해도 된다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온갖 이유로 온갖 것들을 하지 말라고 하기 때문이다.
(중략) 에릭 사티에 따르면 사실 비평가들은 마음껏 비판을 해도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걸 알고 있고, 언제나 옳으며, 지엄하고, 짱이시기 때문이다. “비평가 선생들께서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오…… 왜냐하면 비평가들은…… 모든 것들을 당연히…… 다 알고 있고, 그에 대한 모든 자격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지.” 그러니 어떤 욕망이 멋진 것이고 훌륭한 것이며, 어떤 욕망이 좀스럽고 그릇된 것인지 판단할 자격 또한 당연히 그들에게 있을 것이다.

(중략)

이제 우리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비평가가 하지 말라는 것은 절대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더 좋고 올바른 곳으로 만든다. 억압받는 이들을 구원한다. 세계를 더 살기 좋고 멋진 곳으로 만든다. 지구의 온도가 내려가고 사람들은 화목해지며 사자는 양과 어울린다. 다른 하나는 그냥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것이다. (원한다면 인스타그램 인생샷을 찍어도 된다.) 그러면 비평가들은 세계를 또 한 번 오염시켰다고 일갈할 테지만, 어쨌든 우리는 한 편의 글을 더 쓰게 된다. 음, 이렇게 어려운 선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기는 한다……



같은 책, pp. 1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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