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서점 블라인드 이벤트
초등학생 때 한 달에 한 번, 쓰지 않고 모아 둔 용돈을 꼭 쥐고 동네 서점엘 가곤 했다. 지방 소도시 시장통에 있는 작은 서점이었다. 무슨 책을 사야겠다는 목적도 계획도 없었다. 걸어서 가는 십 분 남짓한 시간 동안, 이번엔 서점에 가면 어떤 책을 발견할까, 어떤 이야기를 읽을 수 있을까, 기대감에 한껏 설렜다.
바로 옆 오래된 슈퍼보다도 작은 서점에는 책이 많지 않았다. 한쪽엔 문제집이, 한쪽엔 무슨 말인지 모를 한자가 가득 적힌 책이, 또 한쪽엔 어른들을 위한 책이 있었고 아이들을 위한 책은 고작 매대 하나에 장르나 나라, 신간, 구간 상관없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럼 나는 매대에 코를 박고 한참을 서서 뒤적거리며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책을 골랐다.
한 달에 한 권, 실패는 있을 수 없었다.
지금은 책을 살 때 실패할 여지가 적다.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면 책마다 편집자가 정성껏 쓴 도서 소개글을 볼 수 있다. 책 표지에 넣을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담당 편집자들은 내 자식 자랑하듯 애정을 담아, 꼭 베스트셀러에 가 보자는 희망을 담아 심혈을 기울여 소개글을 쓴다. 그 글에는 스포일러를 제외한 책의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온갖 SNS를 통해 광고나 홍보를 접하고 감상평들을 볼 수 있으니, 취향에 맞지 않는 책 고르기가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미리 얻은 정보가 많을수록, 책의 첫 페이지를 펼쳐 들 때의 설렘은 작아지는 것 같다. 나의 선택이지만 나의 결정이 아닌 것만 같고, 알 수 없는 외부의 어떤 힘에 이끌린 듯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이 소설이 로맨스인지 드라마인지, 영국 작품인지 미국 작품인지, 심지어 성인물인지 아동물인지도 모르고 책을 고르던 시절을 생각하면 참 재미있다. 서점 주인에게 가서 "이 책 초등학생이 읽어도 되는 거예요?" 하고 물은 적도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끌렸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그 책은 그 유명한 <제인 에어>였다. 아마도 표지에 그려진 여자의 복색이나 표정에 마음이 갔었을 것이다. 아련한 여인의 등 뒤로, 불붙은 저택 다락방과 머리를 풀어헤친 광인이 그려져 있었던 것도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책은 고작 200쪽 남짓한 축약본이었고, 읽은 후의 감상도 '로체스터 멋있어.' '미친 아내 무서워.' '제인 에어, 행복해야 해.' '우리 집에 불나면 어쩌지?' 수준이었지만 어쨌든 그때의 선택은 성공이라 할 만했다.
매번 성공만 하지는 못했다. 때로는 너무 지루하고 너무 시시한 책을 고르기도 했었다. 하지만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 포장지를 푸는 것 같은 설렘만으로도 좋았다. 책을 고르고, 아껴 모은 용돈을 건네고, 집으로 뛰다시피 돌아오던 길 내내 내용이 궁금해서 안절부절못하던 그 모든 과정이 어찌나 즐겁던지.
그래서일까, 서점에서 블라인드 북 이벤트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무척 설렌다. 그것도 컴퓨터로 작성해서 프린터로 출력한 후 포장한 것이 아니라, 손으로 꾹꾹 눌러쓰고 그림까지 그려 넣었다면 말이다.
귀여운 그림과 예쁜 글씨체를 보건대 이 이벤트를 준비한 직원들도 '월급 더 주는 것도 아닌데 대체 왜 이런 쓸데없는 일에 힘을 빼야 해?'라고 투덜거리진 않았을 것 같다. 서점에 와서 제목도 작가도 표지도 모른 채 책을 고를 손님들을 위해 단어 하나하나 고심했을 것이다. 책과 독자의 인연을 맺어 준다 생각하면 그들 역시 조금은 설레지 않았을까?
무슨 상을 수상했다거나 어느 나라에서 몇만 부가 팔렸다거나 하는 현란한 문구 없는 소박하고 정겨운 포장을 보고 있자니 문득 누군가에게 책을 선물하고 싶어진다. 이 책은 왠지 비 오는 날 선물하고 싶고, 저 책은 부쩍 지쳐 보이는 친구에게 전하고 싶다. 또 다른 책 한 권은 내 품에 고이 안고 돌아가, 생일이라든가 너무 심심한 날이라든가 아니면 아주 우울한 어떤 날에 꺼내서 포장을 풀어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내가 나에게 선물하는 낭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