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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Feb 27. 2023

엘리베이터 추락 사건

말레이시아 '진짜' 생존기


말레이시아에서 심심찮게 겪는 불편함이 있다. 정전과 단수다.


그렇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일 년에 정전 두세 번, 단수 두세 번? 아니, 연간 네댓 번이면 적은 것도 아니구나. 어느덧 꽤 익숙해져서인지, 한숨 한번 쉬어 주고 넘어가는 일이 되어 버렸다.

사실 정전이어도 크게 불편할 일은 없다. 더위를 타지 않아 에어컨이나 선풍기 몇 시간 켜지 않아도 괴롭지 않다.(물론 더위를 타는 사람에겐 재난이다.) 와이파이 없어도 핸드폰 데이터를 끌어다 쓰거나 밀리의 서재에 받아 놓은 전자책 좀 읽다 보면 시간은 금방 간다.(그런데 배터리가 없다면?) 냉장고의 식재료가 걱정되긴 하지만 어차피 꽉꽉 채워 놓고 살지 않으니 상한다 하더라도 버릴 것이 얼마 없다.

하지만 일하는 중 갑자기 컴퓨터 전원이 꺼지면서 애써 옮겨 놓은 번역문 몇 줄 날아가면 눈앞이 아득해진다. 그래서 십 분마다 저장 버튼을 누르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단수는 조금 더 불편하다. 전기와는 달리 물에는 인간 존엄성이 달렸다. 화장실을 쓰지 못하고, 손을 자주 씻지 못하며, 정수기 물을 마실 수 없고, 밥을 짓기도 힘들다. 생수 몇 통 쟁이고 그 물에 손을 씻는 호사를 누릴 때도 있지만 단수가 너무 길어진다 싶으면 집 밖으로 피난을 떠난다. 그 핑계로 외식도 하고 얼마나 좋은가.


말레이시아 이주 7년 차, 정전이며 단수며 이젠 어느 정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에 화내고 안달해 봤자 나만 손해다. 관리사무소에 전화하고 찾아가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전구 하나 갈아 주는 데 사흘이 걸리기도 하는 나라다. 첫째 날엔 내장 전등을 해체해서 전구를 확인한 후 잔뜩 벌려 놓은 채 돌아가더니 감감무소식, 다음 날 가져온 전구를 끼워 보려다 잘못 사 왔다며 돌아가더니 감감무소식, 그다음 날 다시 와서야 작업이 마무리된다.(진짜로 겪은 일이다.) 그런데도 결국엔 기존 전구들과 다른 제품을 끼웠는지, 거실 한쪽은 불빛이 하얗고 다른 한쪽은 노랗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산다.




진짜는 엘리베이터다.

정전 때문에, 수리하느라, 고장이 나서, 엘리베이터가 운행되지 않는 경우가 가끔 있긴 했다. 안내문이 붙으면 계단으로 다니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멀쩡하던 엘리베이터가 추락했다.


문이 닫히고 한 층 정도 내려가나 싶더니 순간 굉장히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찰나였지만 몸이 살짝 뜨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더니 쿵, 무언가에 걸린 듯 엘리베이터가 뒤흔들렸고, 곧 위아래로 용수철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마도 추락 방지 장치가 작동한 것이 아닌가 싶지만, 그때는 그런 걸 파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겁에 질린 와중에 옆에 있던 딸아이를 당겨 무릎 위에 앉힌 후 꼭 끌어안았다. 이대로 바닥까지 추락해 충돌하더라도 품에 있는 아이에게는 충격이 덜 가기만을 바랐다. 위아래로 출렁이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온갖 불길한 생각이 스쳐 갔다. 아이가 겁을 먹을까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았다. 괜찮아, 괜찮아, 금방 멈출 거야. 아무 일 없을 거야. 주문이라도 걸 듯 아이에게 말하며 핸드폰을 꺼내 남편에게 문자를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정신없이 흔들렸고 손가락은 벌벌 떨려 제대로 입력할 수가 없었다.



사건 종료 후 캡처해 둔 그날의 생생한 흔적



그러다 어느 순간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언제 멈추었고, 어떻게 내렸는지 모르겠다. 저절로 멈추어서 문이 열렸던 것도 같고, 경비들이 달려와 문을 열어 줬던 것도 같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렸을 때는 경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나는 그제야 울음을 터트렸다. 딸아이가 엄마 왜 우냐는 듯 나를 말똥말똥 바라보았다.


이후 몇 년 동안이나 엘리베이터를 잘 타지 못했다. 한 발 안으로 내딛기 전에 심호흡을 해야만 했고, 엘리베이터가 조금만 덜컹거려도 화들짝 놀랐으며, 작은 기계 소리만 나도 신경이 곤두섰다.

지금은 많이 무뎌졌다. 그런 일을 겪고도 엘리베이터라는 편리한 장치를 아주 외면하지는 못한다. 어쩌면 "엄마 그때 울었지. 난 하나도 안 무서웠는데." 하며 꾸준히 나를 놀려 준 딸 덕분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거침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딸 덕분에 그날의 사고도 그저 가벼운 해프닝 정도로 남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아이가 좀 알아 주었으면 좋겠다.


딸아,   많은 엄마가 그날 온몸으로 너를 지키려 했단  잊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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