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면 적하리 박영순·최미현 씨 모녀
엄마는 이것저것, 많은 것을 해낼 수밖에 없었다. 집안일과 농사까지, 쉴 틈이 없었다. 쟁기와 소를 끌고 밭을 갈고, 직접 낫을 들고 벼를 벴다. 자전거를 타고 들녘을 누비던 엄마는, 그야말로 억척스러웠다. 자전거가 남자들의 전유물이던 시절, 엄마는 마을에서 유일한 ‘자전거를 타는 여성’이었다.
그저 억척스럽게만 느껴졌던 엄마의 모습은, 나이가 들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새롭게 다가왔다. 힘들고 고된 농사를 아직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엄마를 보며 “이제는 좀 쉬라”는 말 대신 엄마의 하우스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것도 이런 이유였다. 엄마와 딸이 함께 농사를 지은 지 이제 4년차. 경력과 경험의 차이 탓에 여전히 중요한 밭일의 대부분은 엄마의 몫이지만, 함께 땅을 일구며 바라본 엄마의 삶터는 이전에 막연히 알던 것과는 달랐다.
동이면 적하리에서 ‘농부애(愛)뜰’이라는 이름을 걸고 농장을 운영하는 박영순 씨와 그의 딸 최미현 씨의 이야기다.
밭일이라면 못하는 게 없는 엄마
동이면 남곡리에서 적하리로 스무 살에 시집을 왔다. 일곱 살 때 부모와 떨어져 서울 등 타지 생활을 하다 할머니가 계시던 동이면 남곡리로 돌아온 뒤였다. 충남 서천 출신의 남편은 적하리에서 남의 집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주변의 말에 결혼을 결심했다.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남편은 국제상사(현 국제종합기계, 옥천읍 양수리)에 다니며 돈을 벌어왔지만 그것만으로 가정을 건사하기란 쉽지 않았다. 자식 셋. 자식 하나 가진 집도 찾기 힘든 요즘이야 ‘다자녀 가구’로 분류되지만 당시만 해도 여느 집과 다르지 않을 숫자. 하지만 가난한 형편에 셋을 먹이고 가르치고 길러내려면 한시도 몸을 쉴 수 없었다. 그나마 있는 땅을 일구면서 밖에서 놉을 얻는 것도 부담이었다. 혼자서 밭일의 처음부터 끝을 배우고 책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박영순(70) 씨가 호미는 물론 경운기 열쇠까지 손에 쥘 수밖에 없던 배경이다.
“그때는 뭐, 논 삼사십 마지기(약 8천평, 2만6천㎡ 규모) 나락도 혼자 다 벴지. 소달구지에 실어서 타작까지 다 했으니까. 평지서 일하는 건 아무 것도 아녀. 나중엔 경운기도 배워서 로터리도 내가 다 치고, 예초기도 혼자 쓰고, 밭일이라면 뭐 못하는 게 없었지.”
지금의 작은 체구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데, 이를 두고 박영순 씨는 그저 “극성맞아 그랬다”며 웃는다. 그러면서 “내가 젊었으면 지금 이 정도 일은 아무 것도 아니지 않겠냐”고 덧붙인다.
이 땅에서 지을 수 있는 작물은 웬만하면 다 해본 듯하다. 벼는 물론이고 온갖 밭작물을 다 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아욱과 풋호박을 주작물로 꽤 많이 출하했다. 대전 오정동 공판장으로 아욱을 내기 위해 밤 12시부터 작업을 시작하는 것도 예삿일이었다.
그러던 그의 밭 풍경이 바뀐 건 올해부터. 아욱, 풋호박이 가득했던 밭엔 꽈리고추, 당귀, 방풍나물, 대파, 부추, 참비름, 열매마, 미나리 같은 다양한 형태, 다양한 종류의 작물이 자라고 있다. 공판장 출하량을 맞추기 위해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하는 엄마의 일손을 좀 덜 수 있는 방법을 찾다 옥천로컬푸드직매장을 접하게 된 딸, 최미현(47, 영동) 씨의 작품이었다. 단품종 대량출하가 필요한 공판장 대신 다품종 소량출하가 가능한 로컬푸드직매장을 통해, 일하는 방식도 바꿔보고자 했던 것이다.
“트럭이 없으니 동네 사람들에게 부탁해야 할 때도 있고, 한 번에 출하량이 많으니 그만큼 일도 많았고요. 엄마도 이제 좀 쉬엄쉬엄 일해야 하지 않겠냐, 마침 옥천에 직매장이 있으니 여기 출하하면 괜찮지 않겠냐고 했죠.”
그래도 작지 않은 크기의 밭(약 5천600㎡, 1천 700평 규모)이기에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쉬엄쉬엄’은 아니긴 하다. 무엇보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기력이 예전만 못하다고 해서 박영순 씨가 생각하는 일의 수준이 낮아지지도 않았다. 그는 여전히 해가 뜨기 전 집을 나와 하우스와 밭 주변을 정돈한다. “촌에 살면서 이런 거는 아무 것도 아니다”는 그를 통해, 생명을 돌보는 일의 무게를 돌아보게 된다.
열매마와 왕까마중, 새로운 작물로의 도전
농부애뜰 밭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작물이 열매마와 왕까마중이다. 열매마는 땅에서 키워 수확하는 일반 마와 달리 나무줄기에 열매처럼 달린다. ‘하늘마’라는 별칭도 있다. 왕까마중은 보랏빛이 감도는 까맣고 동그란 열매로 가짓과의 식물. 박영순 씨와 최미현 씨 모녀가 재배한 열매마, 왕까마중은 모두 로컬푸드직매장에서 만날 수 있다.
다양한 작물을 심기로 결심하면서 주력한 게 바로 이 두 개다. 아직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작물은 아니지만, 수확하는 데 크게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되고 몸에도 좋아 선택했다.
“열매마가 위 등 소화기관에 특히 좋다고 하더라고요. 수확하기도 일반 마보다 훨씬 편하고요. 엄마가 예전에 위가 안 좋으셨던 터라, 이왕이면 농사짓기도 편하고 몸에도 좋은 걸로 해보자 싶었죠. 왕까마중 역시 비염에 좋다고 해서 하우스 주변으로 둘러가며 심었어요. 블루베리처럼 단맛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안토시안이 풍부하고 비염에 좋다고 해서요. 저도 비염이 있어서 효능을 좀 봤죠.”
최미현 씨가 열매마와 왕까마중을 심게 된 배경이다. 공판장으로 나가야 해 획일화됐던 밭의 풍경이 로컬푸드직매장을 만나며 다양해졌고, 밭을 돌보는 이의 건강에도 맞는 작물을 심을 수 있게 된 셈이다.
물론 인기 작물은 아니라 판매가 어려운 게 숙제다. “하느라 애만 먹었지 안 팔리고 헛일이여.” 최미현 씨 뒤에서 투덜대는 박영순 씨는, 금세 이 두 작물의 효능과 먹는 법을 설명하는 데 열을 올린다. 열매마는 꼭 감자 같아서 얇게 썰어 전을 부쳐도 좋고, 백숙 요리에 활용해도 좋단다. 왕까마중은 별 맛은 없지만 탱글한 식감이 재밌고 바나나나 요거트 등과 함께 갈아내면 먹기도 수월하다. 말리면 차로도 마실 수 있다.
농민에게 작물을 바꾼다는 건 여러 모로 큰 도전이고 시험이다. 이렇게 좋다는 열매마와 왕까마중을 주력 작물로 삼은 올해, 예상치 못한 날씨가 이들의 도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50일이 넘는 장마로 일조량이 부족해 꽃이 피지 않거나, 피더라도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이다. 그나마 밭에서 함께 길렀던 열무나 얼갈이배추가 작황이 좋았는데, 태풍이 몰고 온 호우에 인근 수로가 범람하면서 모두 물에 잠겨버렸다. 밭 한편의 자두나무도, 앞서 4월 이상저온으로 냉해를 입었다. 박영순 씨는 “올해 작물은 모두 다 헛것”이라면서도 “이보다 더한 피해를 입은 농가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며 애써 마음을 위로한다.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다, 그 밭의 남다른 풍경
사람들은 농사를 ‘계절에 따라 정해진 대로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수확을 하면 되는 것’으로 쉽게 오해한다. 하지만 생명이 역동하는 땅을 가꾸는 일은 그렇게 단순한 서류 작업 같은 게 아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농민들마다 밭 풍경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박영순 씨의 밭도 그렇다. 하우스 바깥을 둘러가며 심어져 있는 꽃을 비롯해 열매마 맞은편에 자라는 시계꽃, 하우스 안 한쪽 면을 가득 메운 다육이까지, 그들 모녀의 취향을 한 눈에 보여준다. 다육이는 사실 내다 팔 생각으로 키웠는데 몇 년을 애지중지 하다 보니 아까워서 못 팔겠더란다. 하우스 한편을 다육이가 차지하고 있는 이유다.
젊은 시절부터 혼자 농사일을 맡아왔고 지금도 적지 않은 밭을 일구고 있지만, 그 속에서도 자신만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는 게 농사의 재미일지도 모르겠다. 꽃과 다육이에서도 그걸 느낄 수 있지만, 정점은 지난해 만들었다는 미나리꽝일 듯하다. 하우스 안에, 그것도 그냥 밭에 이런 걸 만들 수 있다니. 여전히 틀에 맞춘 대로만 살아가는 도시 사람에게는 농사의 창의성을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대단하긴 뭐가 대단혀. 그냥 식전에, 해거름에 나와서 조금씩 하면 되지.
삽으로 며칠 파내면 만들어지는 거(실제로는 한 달 정도가 소요됐다), 그게 뭐 대단하냐는 박영순 씨 말에 더 혀를 내두르게 된다. 50~60cm 깊이에 눈대중으로도 30평(99㎡)은 될 거 같은 규모인데, 어쨌든 ‘별 것 아니’라는 그는 낫을 들고 미나리를 슥슥 잘라내 내민다.
사실 이 미나리꽝에 앞서 10년 전 쯤 만든 연못도 이 집만의 재미난 풍경이다. 땅을 파고, 돌을 주워와 꾸미는 것 모두 그가 했다. 4~5년 전 이곳에 들인 잉어는 이제 20마리로 불어나 연못의 또 다른 주인이 됐다.
이렇게 열정이 넘치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른 아쉬움은 그도 어쩔 수 없다. “젊을 때엔 ‘저까짓 것’이던 게 지금은 ‘언제 다 하나’ 싶다”며 웃음 섞인 한숨이 따라붙는다. 그래도 힘닿는 데까진 땅을 지키고 싶다.
“그래도 산 사람은 산 사람의 일을 해야지,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말여. 우리 남편이 15년 전에 죽었어요. 계속 고생만 하다가 이제 내 땅도 마련하고 살만해지나 싶던 참에……. 나라도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봐야지. 나중에 딸이 이어받더라도, 그때까지 만이라도…….”
하우스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 붉어진 눈시울로 그가 나직이 말을 잇는다. 어릴 적 갖고 있던 꿈에 대한 이야기였다.
“처녀 적엔 누구나 다 꿈이 있잖어. 나도 그랬지. 연못도 그래서 만든 거여. 양옥집에 넓은 마당, 연못이 있는 집에 살고 싶었거든. 일이 힘들 때 연못가에 앉아서 커피 한 잔 마시며 쉬면 그만한 게 없어요. 우리 딸은 힘들게 왜 자꾸 땅을 파냐고 그랬지만(웃음).”
어릴 적 꿈 중 연못 하나를 이뤘을 뿐이라며 웃는 그이지만, 어디 이룬 게 그 하나뿐일까. 의지할 자식들이 있고, 그 중 하나는 티격태격하면서도 땅을 함께 지키는 재미를 맛보고 있는데. 그의 밭 풍경은 소출과는 상관없이 사계절 내내 풍성할 것이다.
글 사진 박누리
월간옥이네 2020년 10월호(VOL.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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