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월간옥이네 Mar 31. 2021

“이 버스가 고마운 이유, 한 번 들어 볼텨?”

대청호와 부소담악 펼쳐진 증약·감로·추소리행 53번 버스

군북면 추소리행 53번 버스는 옥천읍 시내버스 종점에서 출발해 국도 4호선을 따라 군북면 이백리, 증약과 감로리, 비야리와 환평리를 지나 추소리로 향한다. 왕복 기점은 이평리지만 거의 모든 승객이 추소리에서 하차해 시끌벅적하던 버스에는 어느덧 운전하는 사람만이 남는다. 부소담악과 대청호 풍경, 정감 있는 마을 입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이 노선은 옥천 버스 기사들 사이에서도 경치가 좋기로 소문난 코스. 하지만 이 길은 몹시 구불구불하고 경사져 눈 오는 날에는 운행이 어렵고, 평소에도 운전이 까다로워 신입 기사들 사이에선 ‘고난도 노선’, ‘운전 훈련 노선’으로 불린다.


반면 승객들에게 이 버스는 이웃을 이웃답게, 사람을 사람답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다. 이 버스가 없었다면 서로 모르고 지냈을 얼굴도, 몰랐을 이야기도 자연스레 소식이 닿는다.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버스 한 대가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까지도 연결해주는 셈.


정월대보름 전날이자 옥천읍 오일장이 열리던 2월 25일, 오후 2시에 출발해 추소리와 이평리에 들러 다시 읍으로 돌아가는 이 버스가 실어 나르는 정다운 이야기를 들어보자.


아이고 오랜만이네추운 겨울 어떻게들 보냈슈?

오후 1시 45분, 추소리행 세 번째 버스가 출발하기 15분 전. 일찍이 버스에 몸을 실은 승객들 발밑에는 보따리가 불룩하다. 검정 봉투, 흰 봉투, 금빛 보자기, 분홍 보자기…. 색색의 보따리만큼 승객들도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버스에 오른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처럼 지줄지줄 이야기를 풀어놓지만, 사실 이들은 같은 버스를 타고 읍내로 나와 각자 일을 보고 다시 만나 같은 버스를 타고 돌아가는 이웃사촌이다.


“오늘 마을에서 사람들이 많이 나왔어. 내일이 대보름이니까 부럼 사구 오곡밥 재료두 사구 그래야지. 원래 장날은 종점서 사람이 많이 안 타. 종점에서는 군청이나 병원 갔다 온 사람들이 타구 장 앞에 가면 보따리 든 사람들이 많이 탈 거여. 내 말이 맞는지 틀린 지 한 번 두고 봐.”


승객들의 대화를 주도하는 이수란(75세, 감로리) 씨는 이 노선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이 버스를 타고 마을을 넘나들었다. 이전에는 버스가 증약까지밖에 닿지 않아 40분 이상 걸어야 했다고. 이수란 씨는 읍내에 나와 맘껏 즐길 수 있는 자유시간을 선물한 이 버스가 참 고맙다.


“이 버스? 나 오십 넘어서 생겼으니깨 아마 이십몇 년 됐지? 인쟈 이걸 타구 나와서루 오후 2시 버스를 타구 마을로 들어가니깨 그때까지는 내 자유지. 이게 생겨서 너무너무 고마워. 아플 땐 병원두 가구 가끔씩 짜장면두 먹구 장 구경두 맘껏 할 수 있어서.”


출발을 기다리는 이수란 씨와 다섯 명의 승객들 사이에 코로나가 화두에 오른다.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왔다리 갔다리 하니까 어째 정이 없어 보여. 다덜 사람을 의심스럽게 여기구. 그래도 이런 시기에는 우리처럼 좁다란 데 사는 게 어째 이득인 거 같어. 도시 아파트에서는 코로나에 걸리면 그 가족까지 낙인이 찍힌다지? 수의도 못 입고 환자복 그대로 화장을 한다던데…. 이게 진짜여?”


비밀인 듯 작게 속삭이다가도 이야기 내용에 따라 목소리 크기를 조절하는 이수란 씨의 말솜씨가 맛깔나 듣는 재미를 더한다.


“헤엑. 아이고 이게 누구여? 이 할머니 오랜만에 나왔구먼. 도대체 어떻게 지냈어유? 겨울 동안 소식이 없더니 날씨 풀려서 오늘 나왔나 보네. 아이구 반가워라. 이제 나이가 들어서 오랜만에 누굴 만나면 이렇게나 반가워. 할머이 이 추운 겨울 어떻게 보냈슈?”


반가운 얼굴이 버스에 나타나자 이수란 씨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오랜만에 장에 나왔다는 ‘추소리 할머이’ 조봉남(87, 추소리) 씨를 맞이하기 위해서다.


“뭐라구? 나 귀가 먹어서 도통 들리질 않어. 오늘 장날이라 뭣 좀 사구 그러느라 나왔지. 근데 지껌 이이가 나한테 뭐라는겨? 나는 이 귀나 좀 뻥 뚫렸으면 좋겠네.”


이수란 씨가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조봉남 씨 옆에 바짝 다가와 귀에 대고 사람들의 안부를 큰소리로 전달한다.


“오랜만에 봐서 반갑다구유! 이번 겨울에 어떻게 지냈냐구유! 옷을 고오옵게 입으셨다구유! 어디 아프진 않았는지 다들 걱정했다구유!”


“아아. 요즘 뭐 경로당에두 못 가구 답답했지. 근데 이제 다시 갈 수 있다나? 아이구 이놈의 보청기는 비싼 걸 껴두 왕왕왕왕 대구. 어째 안 끼는 것만두 못햐.”


조봉남 씨와 이수란 씨가 더듬더듬 반가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추소리행 버스 기사 민태선(49, 옥천읍) 씨가 버스가 곧 출발할 것임을 알린다.


앞 문으로 하차하는 승객

추소리 버스 곧 출발합니다자리에 앉으세요.”

버스가 출발하고 승객들의 이야기가 점점 깊어지는 사이, 첫 번째 정류장에 버스가 선다. 종점에서 미리 탑승해있던 승객보다 더 많은 사람이 묵직한 보따리를 들고 버스에 오른다. 이수란 씨가 오늘 머리를 했다는 앞자리 전영순(83세, 감로리) 씨와 미용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버스에 오른 유지목(75세, 옥천읍 옥각리) 씨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아이구. 내 친구 탔네. 잘 지냈어? 보따리가 많네? 뭘 샀어? 나는 내일이 보름이니깨 오곡밥 할 거 좀 사구, 반찬거리 좀 사구 군청 가서 볼일 좀 보구 하니까 벌써 들어갈 시간이 다 돼서 종점서 먼저 탔지.”


유지목 씨는 이수란 씨의 먼 친척이자 동갑내기 친구다. 옥각리까지는 배차 간격이 좁은 시외버스가 제법 다니지만 유지목 씨는 옥천 버스를 주로 이용한다. 만 70세 이상 승객은 군에서 발급해준 카드가 있어 무료로 농어촌 버스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 하지만 그보다 앞선 이유는 버스에서 반가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가 있어서다.


“장날이니깨 나왔지. 날이 좋아서 꽃도 사구 동태 두어 마리 사구 그랬슈.”


얼마 지나지 않아 옥각리 정류장에 버스가 선다. 유지목 씨가 친구들의 아쉬운 인사를 뒤로하고 내리자, 대화 주제도 새로워진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사람은 감로리에 사는 전영순 씨다.


“이 버스가 생기기 전까지는 참 답답혔어. 증약리까지만 버스가 닿았잖어? 근데 지금은 이게 있으니까 감로리가 살기 좋지. 공구리 쳐서 길두 닦아 놨겠다, 대전 가껍겠다. 내 친정이 이원인데 거기는 쌀 먹는 재미는 좋은데 논만 반반해. 근데 감로리에 오니깨 야채두 뜯구 사는 게 더 재미나잖어?”


오늘 머리를 했다는 전영순 씨는 보통 오전 11시 10분께 이 버스를 타고 나와 오후 2시 버스로 돌아간다. 코로나 전까지는 칼국수 집에 들러 따뜻한 국수 한 그릇 먹고 장날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지만, 요즘은 꼭 필요한 곳만 들렀다 집으로 돌아간다.


“그래도 필요한 건 다 샀어. 동태도 사구 빵도 사구 머리두 하구. 난 볼 장 다 봤네.”


대청호 풍경

이 버스가 그 유명한 부소담악을 지나잖여

버스는 달려 잔잔한 마을 길로 풍경을 바꾼다. 좁은 길로 들어서자 승객들이 앞 좌석에 붙은 손잡이를 꼭 쥔다. 구부러지며 이쪽 저쪽 볼거리를 바꾸는 창밖 풍경처럼 사람들의 이야기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증약리에 사는 조옥분(82세, 증약리) 씨가 익숙한 길을 안내한다.


“이제부터는 길이 조금씩 험해져서 손잡이를 쥐어야 편해. 이제 꾸불꾸불 우로 올라가거든. 장에 왜 나왔냐구? 토요일에 우리 큰딸이 놀러 온대서루 딸이 좋아하는 빵을 해줄라구 재료 사러 나왔지. 지금까지 내가 만든 빵이 겔로(제일) 맛있대. 콩 넣구 팥 넣구 막걸리 넣구 풀 넣구 이스트 쬐끔 넣구 그야말로 옛날슥 빵이여. 술 냄새 하나두 안나. 고소하구 맛있어.”


청주에 사는 큰딸이 매일같이 전화해 안부를 물어온다는 조옥분 씨의 자랑에 주변에 앉은 이웃들이 부러운 내색을 한다.


“어이구. 진짜 효녀 맞네. 근데 그날에 그 집 놀러 가면 그 옛날 빵 한 쪽 얻어먹을 수 있는가? 옛날 빵 귀경(구경) 못 한지 오래돼서 군침이 도는디?”


이웃 이종실 씨(73세, 감로리)의 우스갯소리에 버스 안에 한바탕 웃음꽃이 핀다.


“이 버스 타서 아는 사람들이랑 얘기하면서 웃기두 하고 생전 못 보던 이웃들도 만나니깨 참 좋지유.”


버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뒤로하고 뻥튀기와 사과가 터질듯 담긴 봉투를 든 이종실 씨와 감로리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리자 남은 승객은 단 세 명뿐. 콩나물을 사고 날이 좋아 막걸리도 조금 마셨다는 어르신 한 분과 추소리에 사는 김영석, 조봉남 씨가 그 주인공이다.


“부소담악 알지? 그게 좀 있으면 나와. 그게 경치가 좋다구 사람들이 보러 많이 와. 그거 보겠다구 차 없는 젊은 사람들이 이 버스에 탈 때두 있구. 난 버스서 젊은 사람 만나면 반가와. 우리 육남매 다 멀리 나갔구 영감님두 작년 5월에 돌아가셔서 나 혼자 살거든. 나는 이 버스 맨 앞자리에만 타. 길이 구불구불 하니깨 뒤에 앉으면 멀미를 해서. 그래서 종점에서부터 미리 타서 와. 종점에서 미리 타는 사람들은 앞문으루 내려. 출발 전에는 카드가 안 찍혀서. 나 내릴 때 한 번 봐봐유. 내릴 때 앞문에서 버스비를 계산하니깨.”


잠시 뒤 추소리에 버스가 서자 김영석 씨가 보란듯 카드를 찍고 앞문으로 하차한다. 남은 두 승객마저 내리자 마침내 버스는 텅 비어 초록, 노랑, 빨강 색색의 손잡이만 덜렁덜렁 몸을 흔든다. 볼 사람도 없는데 창밖으로 대청호가 푸른 카펫처럼 아름답게 펼쳐진다. 좁은 길을 비틀비틀 꺾어 달릴 때마다 한줄기 대청호 모습도 마치 다른 곳인 양 시시각각 그 모양을 바꾼다.


버스기사 민태선 씨

시골 버스 운전하는 특별한 맛이 있죠.”

“추소리 버스는 하루 네 번 다니지만, 이 차가 거의 막차라고 보면 돼요. 거의 어르신들이니 어두워지기 전에 댁으로 들어가시니까 나오는 사람도 적어지죠. 퇴근하시는 분들이 막차에 타긴 하지만 고작 한두 명 밖에는 없어요.”


버스가 종점으로 향하는 동안은 몇몇 승객이 잠시 타고 내릴 뿐 오래 앉아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일까. 버스 기사 민태선 씨는 추소리로 가는 길보다 종점으로 돌아오는 길이 훨씬 짧다고 느낀다.


“버스에 탄 사람이 많냐 적냐에 따라 운전하는 기분도 달라요. 그나마 오늘 같은 장날에는 사람이 많이 타니 시간이 빨리 가죠. 요새는 만 70세가 넘으신 분들에게 군에서 카드를 발급해드리니까 시장을 오가실 수 있는 분들이 전보다 훨씬 많아졌죠. 그래서 운전을 더 조심하려고 해요. 완벽하게 하차하셨는지, 버스와 거리가 좀 멀어졌는지, 혹시 사고가 날 여지가 있지는 않은지 똑똑히 살펴보고요.”


좁은 시골길 운전은 시골길대로, 읍내는 읍내대로 운전하는 맛이 다르다는 민태선 씨. 익산에서 와 옥천 버스 운행 3년 차가 된 민태선 씨가 가장 좋아하는 노선은 장계리를 지나가는 안남행 노선과 이원면 수묵리를 지나는 노선이다.


“이 노선은 대청호나 부소담악이 있어 풍경은 좋지만, 승객이 좀 적다면, 장날 안남행 버스는 이보다 사람은 더 많고 가는 길도 예뻐요. 특히 눈이 오는 날 장계교를 지날 땐 좀 뭉클하다고 할까.”


민태선 씨의 이야기가 막바지로 흐르는 사이 버스도 어느덧 읍내로 들어선다. 그는 종점에 버스를 세우고 혹여나 손님이 놓고 내린 분실물은 없는지 구석구석 좌석을 살펴본다. 텅 빈 버스를 확인하고 나서야 크게 기지개를 켠다. 커피 한잔으로 에너지를 충전하고 가풍리에 들러 한 번 더 추소리에 다녀와야 하루가 끝난다는 민태선 씨. 그가 또 다른 이야기를 싣고 늦겨울 노을 속으로 다시 달려갈 준비를 한다.


버스 시간

첫차 시내버스 종점 차고지 출발, 추소리행(6:30) / 이평리 기점 출발, 옥천행(7:10)

둘째차 시내버스 종점 차고지 출발, 추소리행(10:00) / 이평리 기점 출발, 옥천행(10:30)

셋째차 시내버스 종점 차고지 출발, 추소리행(14:00) / 이평리 기점 출발, 옥천행(14:30)

막차 시내버스 종점 차고지 출발, 추소리행(18:40) / 이평리 기점 출발, 옥천행(19:20)


버스 노선

시내버스 종점 차고지 > 금구리 > 옥천중 > 옥천시외버스정류장 > 삼동 앞 > 삼양리/삼양사거리 > 서정 > 옥각리 > 서정리/당골마을 > 환경사업소 앞 > 이백/백석 > 이백리(군북면사무소) > 새마을 > 자모리 > 증약 > 행복마을 > 감로리 > 감로 > 비야리 > 환평리/의성농원 > 환평리 > 추소리 > 갈벌 > 이평리(기점)


버스 요금

일반 1,500원(현금)/1,400원(카드)

청소년 1,200원(현금)/1,100원(카드)

어린이 750원(현금)/650원(카드)



월간 옥이네 2021년 3월호(통권 45호)

글 사진 서효원



‘월간 옥이네’는 충북 옥천의 사회적기업 ‘지역문화활력소 고래실’이 발행하는 지역 잡지입니다. 월간 옥이네는 자치와 자급, 생태를 기본 가치로 삼아 지역의 공동체와 문화, 역사, 사람을 담습니다. ‘정기 구독’으로 월간 옥이네를 응원해주세요! https://goo.gl/WXgTFK

https://smartstore.naver.com/monthlyoki


매거진의 이전글 마음을 어루만지는 목공예의 매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