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완역본이에요.”
몇 달 전, [파우스트] 독서모임에서 들은 말이다. 모임에 온 네 사람은 모두 다른 번역본을 읽어왔고, 대화가 조금씩 빗나갔을 때 나온 한마디였다. ‘나 말고 당신들이 읽은 책은 완역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묘하게 선을 긋는 선언처럼 들렸다. 그에게 알려주었다. 요즘 나오는 책들은 굳이 ‘완역본’이라고 표기하지 않아도, 대체로 작품 전체를 빠짐없이 번역한다고. 그는 말을 들었을 테지만, 눈빛을 보니 마음의 귀가 닫혀 있었다. 완역본을 지닌 사람으로서 의기양양함을 두르고, 직역만이 좋은 번역이라고 주장했다.
어느 날, 멍하니 유튜브를 보다가 통역가들이 출연한 [유퀴즈] 인터뷰를 발견하고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는 “얼굴에 김 묻었어요. 잘생김”이라는 문장을 통역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직역으로는 ‘김’으로 반복되는 언어유희를 절대 살릴 수 없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단어의 정확성보다 청중의 웃음을 택했다. 결국 통역가가 고른 건 ‘김’이라는 글자가 아니라 라임이었다. “There's some(thing) on your face. Handsome.” 이때 원문의 라임을 살린 유머를 담기 위해서, 의역을 하는 것이 더 맞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이런 경우를 떠올리면 좋은 번역이란 무엇일까. 얼마 전에 읽은 번역가의 에세이에서, 그는 의역을 비판하고 직역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요즘 후배 번역가들이 너무 의역을 한다고 했다. 그러나 선배 번역가의 입장 역시 조금 경직된 것처럼 느껴져서 책을 반쯤 읽다가 접어버렸다. 직역은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에 충실한 번역’, 의역은 ‘전체의 뜻을 살리는 번역’이다. 그러나 좋은 번역이란, 전체의 뜻을 살리면서도, 하나하나의 의미에도 충실한 번역 아닐까? 그렇다면 직역과 의역은 구분지어 나눌 것이 아니라, 더 통합적인 시선으로 번역을 대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문득 존 버거의 정의를 떠올렸다.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라는 책에서 번역에 대한 존 버거만의 정의를 엿볼 수 있다. 통상적 의미에서 번역이란, 번역가가 특정 언어로 된 단어를 연구해서 다른 언어의 단어로 내놓는 과정이라고 한다. 첫째, 단어 대 단어. 둘째, 언어학적 전통과 규칙. 셋째, 원문 목소리에 상응하는 무언가의 재창조. 이 세 단계를 모두 거쳤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반드시 좋은 번역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존 버거는 번역이 두 언어 사이의 양자관계가 아니라 삼각관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세 번째 꼭지점은 원래의 텍스트가 씌어지기 전 그 단어들 뒤에 놓여 있던 것이다.” 그의 정의는 단순히 언어를 옮기는 차원을 넘어서 있었다. 진정한 번역을 위해서는 ‘말해지기 전의 무언가’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좋은 번역은 특정 언어가 발화되기 전 내포한 의미와 맥락, 의도까지 헤아려보고, 발화되기 전 그것을 최대한 적확하게 끌어낸, 발화된 것과 발화되지 않은 것을 모두 포함한 결과여야 하지 않을까.
요컨대, 나는 번역을 직역과 의역의 이분법에서 벗어난 ‘삼각관계 번역’이라 부르고 싶다. 문장 속 단어뿐 아니라, 그 뒤에 숨은 감정, 시대적 배경, 문화적 농담… 발화되지 않은 무엇까지 옮기는 일. 좋은 번역은 단어의 뜻을 옮기는 기술이 아니라, 단어에서 문장, 문장에서 단락으로 확장해가는 일이다. 나무의 잔가지와 바람결에 떨어지는 잎사귀는 물론, 지평선을 삼킨 숲의 전경까지 빚어내는 작업이다. 번역의 본질은 어쩌면 그 경계 위에 있다. 번역가가 그 경계 지점을 정하는 일이야말로 번역의 가장 원형에 가까운 모습 아닐까. 직역과 의역의 어디쯤, 우리에게 꼭 알맞은 번역이 존재할 것이다. 세상의 많은 것이 스펙트럼 위에 존재하듯, 번역 역시 그러해야 한다. 그 경계 위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유연함이야말로 진정한 번역에 이르는 길이다. 그리고 원문과 독자를 동시에 사랑하는 그 마음에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