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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디자인 Jul 13. 2018

디자이너가 읽어야할 책,
바우하우스

월간 <디자인> 2018년 7월호

<바우하우스>프랭크 휘트포드 지음, 이대일 옮김, 시공사


2019년 바우하우스 탄생 100주년이 코앞에 닥쳤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바우하우스가 있었던 3개의 도시 바이마르, 데사우, 베를린(모두 과거 동독 지역에 있던 도시)은 모두 내년에 치를 대대적인 행사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 오늘날 우리 삶에 굉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에 견주면 한국의 바우하우스에 대한 인식은 매우 저조하다. 그것은 바우하우스 관련 자료의 결핍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국내에 출간된 바우하우스 관련 책이나 자료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나마 이대일 교수가 번역하고 시공사가 출판한 <바우하우스>와 미진사가 펴낸 <바우하우스>가 충실한 바우하우스 번역서다. 이 중 프랭크 휘트포드의 <바우하우스>는 바우하우스 입문서로서 그만이다. 바우하우스의 설립 배경부터 폐교될 때까지의 진행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엮어내 읽는 재미가 쏠쏠하고, 초대 교장 발터 그로피우스를 비롯해 바우하우스를 만든 주역들에 대한 인물 묘사 또한 생생하다. 여기서는 이미 많이 알려진 바우하우스의 작품과 업적보다 그 내부의 진통 과정, 바우하우스 설립 당시의 시대적 배경, 인물 간의 갈등 상황에 맞춰 소개해본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출발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경제적 상황이 최악이었다. 독일의 1919년은 학교는 물론 어떤 단체도 설립할 수 없는 궁핍과 혼란의 도가니였다. 바우하우스가 설립된 곳은 인구 4만 명의 소도시 바이마르였다. 이곳은 산업 시설이 거의 없고 중세적인 장인들의 길드가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곳이었다. 게다가 귀족 문화가 지배적이었던 곳으로 새로운 사상이나 운동에 대한 반감이 강한 도시였다. 기적적으로 학교가 출범하긴 했지만 재정의 절대적 부족으로 학생들이 작업할 수 있는 공간과 시설, 공구와 장비가 태부족이었다. 바이마르의 소기업가와 길드의 공예가들은 자신의 사업을 위협한다며 끊임없이 학교를 비판하고 몰아내려고 했다. 


↘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건물. 초기 바우하우스는 공간과 시설, 공구의 태부족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시절의 학생들. 보수적인 바이마르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바우하우스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자식이 말썽을 피우면 이 시의 부모들은 “너를 바우하우스에 보내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귀족 문화가 지배적인 바이마르의 민족주의자들은 바우하우스를 공산주의 집단으로 여겼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보다 큰 불편을 느낀 이들은 역시 학생이었다. 공간 부족으로 기숙사가 없어 학생들은 근처 싸구려 유스호스텔에서 지냈으며 선생들은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하숙집에서 기거했다. 전쟁의 패배로 학생들 대부분이 가난했다. 그들은 작물 재배, 그림 그리기, 극장 엑스트라 출연 등의 각종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며 졸린 눈으로 수업에 임하기도 했다. 신발이나 옷조차 살 여유가 없는 학생들을 위해 초대 교장인 발터 그로피우스는 기금을 마련해 어려운 학생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궁핍한 상황이 바우하우스에 어떤 목표를 지향하도록 했다. 그것은 공동체다. 이상적인 공동체는 그로피우스가 진정으로 꿈꾸던 것이었다. 저자인 휘트포드는 이렇게 말한다.


“처음부터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를 단순한 학교 이상의 것으로 만들고 했다. 그는 학생들이 이 축소판 사회를 사회의 모델로 삼아 함께 생활하며 일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되길 바랐다. 이런 이유로 그는 당시 놀랄 만한 수준의 민주주의를 도입했던 것이다.”


그로피우스는 이사회 자리에 두 명의 학생을 참여시켰고 학생회를 장려했으며 각각의 공방에서 학생 대표를 선출했다. 학교 정규 수업 이외에 학생들의 독립적인 모임을 장려했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지향한 미술 학교의 목표는 예술가와 공예가가 동등한 지위에서 서로 협력해 건축 안에서 모든 것을 조화롭게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먼저 공동체와 민주주의 의식이 학생들의 몸에 배어야 한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적 궁핍과 정치적 혼란은 오히려 이런 그로피우스의 이상을 도와준 면이 없지 않다. 



발터 그로피우스라는 인물   

발터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 교장이 되었을 때 나이가 불과 36세로, 젊은 나이에 이미 큰 명성을 얻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인 1911년에 그가 완공한 파구스 공장은 혁신적인 재료와 형태로 모더니즘의 이정표와도 같은 건축물로 평가받았다. 이밖에도 그는 가구와 벽지, 디젤기관차, 기차 객실 인테리어 등 광범위한 범위에서 활동을 벌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기갑부대 장교로 참전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비행기나 탱크 같은 강력한 기계 무기가 등장해 전에 볼 수 없었던 참혹하고 무자비한 살상을 낳았고, 전쟁에 대한 이런 끔찍한 기억은 기계에 대한 낙관주의를 버리게 했다. 또 한때 좌익 사상에 빠져 급진적인 사회 개혁을 꿈꾸기도 했다. 이런 경험은 바우하우스가 공예 학교를 지향하도록 하고 학생들에게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려고 한 배경이 된다.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를 통해 일종의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것이다. 그 유토피아에서 화가는 새로운 시대에 맞게 새로운 미술 이념을 제공하고, 공예가는 그것을 응용해 실질적인 생활용품을 만들어내는 것을 기대했다. 따라서 바우하우스는 공예 학교가 되어야 했고, 그 공예 학교에는 물건 만드는 일은 못하더라도 반드시 순수 예술사가 학생들을 가르쳐야 했다. 하지만 이것은 그로피우스의 이상이었고 현실은 혹독했다. 형태 교육자로 영입한 예술가들은 공방 교육에 관심이 없었고 공방 교육자, 즉 공예가들은 예술가들이 이끄는 새로운 형태의 교육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이들의 갈등을 중재하는 것이 그로피우스의 큰일이 되었다.  



↘ 발터 그로피우스. 그는 매우 탁월한 중재자이자 외교관이었다.



↘ 발터 그로피우스는 1911년에 대단히 혁신적인 파구스 공장을 완공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갈등 조정자, 탁월한 외교관  

갈등하는 선생들 사이를 조정하고 또 바우하우스를 지원하는 외부 기관, 즉 주 정부와 산업체를 회유하고 그들로부터 재정적 도움을 받아내는 일에 발터 그로피우스는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바우하우스 초대 교장으로 그로피우스가 뽑히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 학교는 더욱 단명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뽑은 선생들로부터 끊임없이 공격받았다. 최초로 임용한 요하네스 이텐은 학생들 사이에서 영적 지도자처럼 행동해서 교장의 권위를 위협했고, 오스카 슐레머는 늘 투덜거리면서 그로피우스의 교장직 반대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그로피우스를 진정으로 괴롭힌 건 역시 학교의 부실한 재정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불안한 정치 상황이었다. 재정적 독립이 불가능한 바우하우스는 돈을 대주는 주 정부와 산학협동을 통해 기금을 받아야 하는 산업체에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했다. 주 정부는 끊임없이 학교의 발전상을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개교한 지 4년 만인 1923년에 첫 전시회를 개최한다. 이 전시회는 주 정부, 산업체, 지역 공예가 조직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불식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고 그로피우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 독일과 유럽의 주요 문화·예술 관계자들을 초청했는데 무려 1만 5000명이 전시회를 보려고 바이마르로 몰려들었다. 그로피우스의 홍보력이 힘을 발휘한 것이다. 



↘ 1923년에 개최된 바우하우스의 첫 번째 전시회에는 게오르그 무헤가 디자인한 암 호른 주택을 선보였다. 이 주택에는 마르셀 브로이어가 디자인한, 당시로는 혁신적인 주방 시스템이 전시됐다.




전시회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우호적인 평가를 받았으며 바우하우스의 명성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그런데도 보수적인 민족주의자들이 더 큰 권력을 쥐고 있던 당시 바이마르 사회는 바우하우스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다. 그 와중에도 그로피우스는 학교를 지키려고 우익의 공격을 받아넘기고 정치인을 설득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하지만 결국 주 정부가 재정 지원을 대폭 삭감하자 바이마르를 떠나게 된다. 마침 항공 산업과 화학 산업이 발전한 공업 도시 데사우가 바우하우스를 받아들였다. 



↘ 1925년에 바이마르 시대를 접고 데사우 바우하우스를 열었다. 데사우 시에서는 새로운 교정을 짓도록 지원했고, 오늘날 모더니즘의 성지와도 같은 건물이 들어섰다.



데사우 바우하우스 시절은 아마도 바우하우스 역사에서 짧지만 가장 행복한 시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 역시 위기의 연속이었다. 그로피우스는 이제 외교의 달인이 되었고 좌우의 갈등이 극심한 시기에 9년 동안 좌우 모두의 끊임없는 공격으로부터 학교를 지켜왔다. 그만큼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그리고 1928년 1월, 그로피우스는 2년의 임기를 남겨둔 시점에 갑작스럽게 사임을 표했다. 사임하면서 그는 “지금까지 내 일의 90%는 학교를 지키기 위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 교장으로 공산주의 사상에 경도된 건축가 하네스 마이어를 임명했다. 그의 임명은 또 다른 커다란 갈등의 씨앗을 남긴 것이었다.   



경쟁과 갈등, 격심한 충돌의 격전장  

그로피우스는 공예 학교를 만들고자 했음에도 초기에 형태 교육자로 유럽에서 활동하는 뛰어난 예술가들을 임용했다. 그것도 보수적인 아카데미풍의 예술가가 아니라 모더니즘의 예술가들이었다. 요하네스 이텐, 바실리 칸딘스키, 파울 클레, 오스카 슐레머, 라이오넬 파이닝거 같은 이들이다. 그야말로 자의식으로 똘똘 뭉친 개성 강한 예술가들이었다. 여기에 이 순수 예술가들과 사상적으로 완전히 반대 입장에 있는 유물론자인 라슬로 모호이너지, 공산주의 건축가 하네스 마이어 등이 가세하면서 바우하우스는 그야말로 설립 초기부터 폐쇄되는 그날까지 선생과 선생, 선생과 학생, 학생과 학생 사이의 갈등과 투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로피우스의 첫 임용 선생인 요하네스 이텐은 ‘마스다스난’이라는 대단히 이질적인 종교를 신봉하는 예술가로 학생들에게 단식과 관장, 엄격한 채식을 권장하면서 교주 비슷한 태도로 불신임을 받고 물러나게 된다. 물론 그는 바우하우스에 예비 과정을 만듦으로써 큰 업적을 남기긴 했다. 라슬로 모호이너지는 바우하우스 역사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선생일 것이다. 그는 바우하우스의 학풍이 표현주의적인 경향에서 기계적인 모더니즘으로 바뀌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기계에 대한 거부감이 있던 그로피우스의 생각까지도 전환시킨 혁신적 선생이었다. 그는 유물론을 신봉했고 기계로 세상을 더 낫게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세기의 현실은 과학기술이다. 즉 발명과 건설 그리고 기계의 존재. 기계 사용자가 된다는 것은 금세기의 정신이 되는 것이다. 기계는 지난 시대의 초월적 심령론을 대체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니 예술의 정신성을 소중히 여기는 칸딘스키와 클레, 슐레머 등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숙명적인 일이었다. 데사우 바우하우스의 옥상에서 촬영한 바우하우스 선생들의 유명한 사진에 보면 이 순수 예술가들과 모호이너지가 가운데 있는 그로피우스를 기준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모호이너지는 임용 초기에는 표현주의를 지향하는 학생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모호이너지는 그 누구에게도 인기가 없었지만 결국 그의 가르침으로부터 매우 뛰어난 학생들이 배출되었다. 



↘ 요하네스 이텐은 그로피우스가 첫 번째로 임용한 교수였으나 학생들 사이에서 영적 지도자처럼 행동해 미움을 받고 퇴출되었다. 



↘ 라슬로 모호이너지는 헝가리 출신으로 러시아 구성주의의 철학을 받아들인 혁신적인 선생이다. 그는 표현주의적인 학풍의 바우하우스를 쇄신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 1925년, 데사우 바우하우스 옥상에서 발터 그로피우스를 비롯한 선생들이 찍은 단체 사진.



좌익과 우익의 대결장이 된 바우하우스   

하네스 마이어는 교장으로 임용되기 전부터 “바우하우스는 삶을 질식시키는 예술일 뿐”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던 건축가다. 그는 누구보다 가난한 민중을 위해 저렴하고 빠르게 집을 짓는 방법에 골몰하는 공산주의자였다. 칸딘스키와 슐레머 같은 예술가에게 하네스 마이어의 등장은 위협 그 자체였다. 마이어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학교를 이끌었다. 학생 중에는 공산주의자가 늘었다.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이런 움직임은 타깃이 되기 쉽다. 칸딘스키는 마이어를 제거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 결국 그는 퇴출되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재임했던 2년 동안 바우하우스가 가장 많은 돈을 벌었다는 점이다. 마이어의 퇴진과 함께 공산주의 학생들도 퇴출되었다. 마지막 교장으로 부임한 미스 반데어로에는 돈 많은 건축주를 위해 매우 고급스러운 재료로 집을 짓고 가구를 제작하는 건축가였다. 그가 지향하는 건축과 디자인은 하네스 마이어와 정 반대편에 있었다. 그는 학교가 우익으로부터 공격받는 것을 먼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부임하자마자 공산주의 학생들을 색출하는 데 열을 올렸다. 미스 반데어로에가 교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에는 나치 학생들이 생겼다. 그러자 바우하우스는 좌익으로부터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 2대 교장 하네스 마이어는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선생들과 갈등한 것은 물론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황에서 바우하우스를 위험하게 만들었다.



↘ 3대 교장 미스 반데어로에는 하네스 마이어로 인해 늘어난 공산주의 학생들을 몰아내고 다양한 디자인학과를 없앴으며 바우하우스를 건축 학교로 만들었다.




1929년에 터진 뉴욕발 주식 대폭락은 유럽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경제적 도약을 했던 독일은 다시 경제가 어려워졌다. 경제가 어려워지자 극우 민족주의 세력이 다시 득세하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우하우스는 나치로부터 퇴폐주의 미술 기관으로 낙인찍혔다. 무엇보다 고전주의를 사랑하는 극우 민족주의자들에게 민족적 색채를 일체 보이지 않는 국제주의적인 바우하우스의 모더니즘 미학은 반독일적이며 유대적인 것으로 매우 위협적인 것으로 비쳤다. 1931년 나치가 데사우 시의회를 장악하자 그들은 바우하우스를 공격했고 1년 뒤 학교를 폐쇄시켰다. 미스 반데어로에는 필사적으로 바우하우스를 살리려고 베를린에 버려진 건물을 임대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1933년 나치가 바이마르 공화국 국회의 다수당이 되고 히틀러가 총통이 되자 그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되었다. 1933년 바우하우스는 그 짧은 역사를 마감했다. 바우하우스의 주역들, 초대 교장 발터 그로피우스와 3대 교장 미스 반데어로에, 주요 선생들인 라슬로 모호이너지, 요셉 알버스, 마르셀 브로이어, 헤르베르트 바이어 등은 미국으로 건너가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하네스 마이어는 소련으로 갔다. 




↘ 바우하우스를 접수한 나치의 돌격 대원들. 그들은 모더니즘의 상징과도 같은 바우하우스의 유리창을 깨뜨리고 시설물을 파괴했다. 아예 건물을 철거하려고 했으나 데사우 시의 만류로 겨우 살아남았다.




짧은 기간과 영속성   

14년이라는 짧은 역사를 가진 바우하우스가 왜 그토록 유명해진 걸까? 휘트포드는 이렇게 설명한다.


“강제 폐교와 더불어 많은 교수와 학생들이 이민을 간 것은 이 학교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나치가 아니었다면 오늘날 바우하우스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요, 이 학교가 그렇게 중요해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한 경제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그토록 불안하던 시절에 그렇게 혁신적인 스타일의 실험성을 보였다는 점에서 바우하우스는 또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끝으로 휘트포드는 바우하우스를 이렇게 평가한다. 


“학교가 지난 100여 년 동안의 역사주의적인 전통으로부터 건축과 디자인 언어를 해방시켰다는 것은 실로 역설적이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해방이 바우하우스의 가장 커다란 업적이다.”




글: 김신(디자인 칼럼니스트)

© 월간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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