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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디자인 Mar 05. 2019

<바우하우스 50주년 이후의 50주년>전

월간 <디자인> 2019년 3월호

<바우하우스 50주년 이후의 50주년>전 포스터


파리 대학생들이 소르본 대학교를 점거한 바로 다음 날인 1968년 5월 4일,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뷔르템베르기셔 쿤스트페라인 미술관Württembergischer Kunstverein Stuttgart에서는 바우하우스 개교 50년을 기념하는 전시 <바우하우스 50주년 50 Years of the Bauhaus> 개막식이 있었다. 독일연방공화국 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한 성대한 행사였지만 이날 방문객 중에는 반갑지 않은 손님도 있었다. 바로 울름 조형 대학Hochschule für Gestaltung Ulm 재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울름 조형 대학을 폐교하려는 계획에 반대해 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이 학교는 바우하우스 정신을 계승한다는 취지로 1953년에 개교했는데 베트남전 반대 등 교수와 학생들의 사회참여 의식과 활동을 위험한 정치적 성향으로 본 정부 당국이 재정 압박을 가했고 결국 1968년 9월 말 폐교가 결정되었다). 그로부터 꼬박 50년이 흐른 2018년 5월 4일, 정확히 같은 자리에서 다시 한번 바우하우스 전시가 열렸다. 


<바우하우스 50주년 이후의 50주년50 Jahre nach 50 Jahre Bauhaus 1968>이라는 이름의 이 전시는 바우하우스 개교 100주년에 즈음한 행사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눈길을 끈 것은 50년 전 전시를 반면교사로 삼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는 점이었다. 바우하우스 책을 집필하고 훗날 바우하우스 아카이브를 설립한 한스 빙글러Hans Maria Wingler와 당시 뷔르템베르기셔 쿤스트페라인 미술관장이 공동 기획한 1968년 전시의 경우, 1971년까지 총 여덟 차례 해외 순회전을 가졌다. 해외에 바우하우스의 명성을 알리는 데 중점을 둔 전시였던 만큼 탈정치적이었으며 이른바 ‘독일과 미국의 합작 브랜드German-American brand’로 양식화된 바우하우스의 면모를 보여주는 데 주력했다. 


반면 지난해 9월 23일까지 이어진 2018년 전시는 바우하우스 출신들의 정치적 행보와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냈고 바우하우스를 둘러싼 모더니스트들의 여러 얼굴을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 현재 뷔르템베르기셔 쿤스트페라인 미술관 큐레이터들 입장에서는 1968년의 전시가 프로파간다 성향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성찰을 담아 미술관의 기획 역량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전시장 초입에는 1968년 당시의 전시 자료가 한데 모여 있었다. 헤르베르트 바이어가 디자인한 포스터를 배경으로 <바우하우스 50주년>전의 개막식 상황을 보여주는 미술관 축소 모형이 놓여 있었는데 재미있게도 당시 울름 조형 학교 학생들이 시위하던 위치까지 표시되어 있었다. 


<바우하우스 50주년>전 개막식에 당시 시위대가 있던 자리와 그로피우스가 있던 자리를 모형으로 재현해놓았다.


전시장 한편에는 시위대를 향해 메가폰을 잡고 타이르는 발터 그로피우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고 헤드셋을 착용하면 당시 그로피우스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뷔르템베르기셔 쿤스트페라인 미술관의 공동 관장이자 이번 전시의 공동 큐레이터인 한스 크리스트Hans D. Christ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그로피우스는 정치적이지 말 것과 바우하우스를 존중해달라는 당부를 했다고 한다. 또 이곳에는 팻말을 들고 시위하는 울름 조형 학교 학생들의 사진이 벽면에 기대어 있었다. 그 뒤로는 1920~1940년대의 주요 전시를 연대기순으로 보여주는 긴 섹션이 이어졌다. 20세기 초의 전시는 주로 유럽 국가들의 기술력과 이데올로기를 과시하는 프로파간다의 수단이었다. 


러시아의 예술 학교 브후테마스를 소개한 섹션. 브후테마스 멤버들이 레닌과 예술 교육의 목적에 대해 토론하는 영상도 상영했다.


1928년의 <주거Die Wohnung>전부터 1938년 뉴욕 MoMA에서 열린 <The Bauhaus 1919~1928>전에 이르기까지 총 20개의 전시를 설명하는 패널들이 전시되었는데 이 가운데 이목을 끈 것은 1934년 베를린에서 열린 <독일 민족-독일의 일Deutsche Volk-Deutsche Arbeit>전이었다. 이 전시의 참여자 중 적지 않은 수가 낯익은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공부한 디자인사에 따르면 바우하우스는 1933년 나치의 탄압으로 폐교됐다. 이미 그 이전부터 구성원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으니 적어도 1933년 이후 나치가 주도한 전시에서는 이들의 이름이 없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독일 민족-독일의 일>전에는 바우하우스 멤버Bauhausler들의 이름이 오롯이 새겨져 있었다. 헤르베르트 바이어는 나치의 선동가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가 서문을 쓴 도록을 디자인했고 전시 공간 디자인에는 발터 그로피우스, 미스 반데어로에, 요스트 슈미트 등이 참여했다. 


1920~1940년대의 전시와 그래픽 디자인을 보여주는 ‘실험과 프로파간다 사이Between Experiment and Propaganda’ 섹션.


전시가 나치의 프로파간다와 모더니스트의 실험이 뒤섞인 장으로 치러진 만큼 전시 참여자를 모조리 나치의 부역자로 몰아세우는 것은 지나친 처사일지 모른다. 하지만 ‘탄압’한 정권의 프로젝트라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대목은 도덕성을 의심하기에 충분하다(<바우하우스 50주년 이후의 50주년>전이 당시의 전시를 특별히 부각시키거나 평가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전시와 균등하게 설명했다. 이 외에도 바우하우스 멤버들의 ‘의외’의 활동을 보여주는 내용이 곳곳에 있었지만 모두 덤덤하게 객관적인 사실만 기록되어 있었다). 


이 전시는 기획자가 도입 글에서 밝힌 대로 ‘곁가지의 이야기digressions and byways’가 풍성했다. 예컨대 바우하우스와 같은 시기, 러시아의 예술 학교 브후테마스Vkhutemas가 무엇을 지향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나 모더니스트 건축가들이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y complex와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 등이 전시됐다. 또 덴마크 화가 아스게르 요른Asger Jorn과 막스 빌Max Bill이 새로운 바우하우스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쟁하며 주고받은 편지들도 있었다. 그런데 알려져 있다시피 빌은 울름 조형 학교를 세웠고 요른은 이미지주의 바우하우스 국제 운동The International Movement for an Imaginist Bauhaus을 결성했다. 이는 상황주의 인터내셔널로 연결되고 68운동으로 넘어간다. 68운동은 다시 프랑스의 환경연구소Institut de l’Environnement로, 그리고 이곳 출신들이 만든 그라푸스Grapus로 이어지는데 이 과정의 자료와 작품이 전시장 곳곳을 채우고 있었다. 20세기의 주요 사건들이 정신없이 뒤섞여 있어 정작 바우하우스가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바우하우스를 제대로 들여다볼 기회를 주었다. 


그동안 바우하우스 관련 전시는 대부분 바우하우스 자체에 집중하느라 오히려 객관적으로 조망할 여유가 없었다. 이에 반해 <바우하우스 50주년 이후의 50주년>전은 <바우하우스 50주년>전을 비평적으로 다시 읽어냄으로써 객관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모처럼 바우하우스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진 올해, 이 전시에서 한 수 배워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즉 역사적 맥락에서 여러 정황을 놓고 냉정하게 비평해보는 것 또한 바우하우스 개교 100주년을 알차게 기념하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뜻이다.  



글·사진  김상규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디자인학과 교수

©월간 <디자인>


김상규 

대학과 대학원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후 퍼시스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했다.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 큐레이터로 재직하면서 <Droog Design> <한국의 디자인> <모호이너지의 새로운 시각> 등의 전시를 기획했으며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디자인학과 교수로 있다. <디자인 아카이브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저서로는 <의자의 재발견> <디자인과 도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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