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디자인> 2019년 5월호
원투차차차 네이밍부터 유쾌한 원투차차차는 권의현 대표가 운영하는 메이커 스튜디오다.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작년부터지만 사실 아티스트 어시스던트와 원목 가구 브랜드 밀로드를 거친 중고 신인에 가깝다. xs메이커 시장에서 춤을 추듯 유쾌하게 스텝을 밟아나가고 있는 그의 행보를 따라가보기로 했다. 인스타그램 one_two_chachacha
원투차차차라는 스튜디오 이름이 재미있다.
대학에서 순수 예술을 전공하고 2년 정도 한 아티스트의 어시스던트 생활을 했는데 그때 얻은 닉네임이다. 당시 작가님이 작품을 제작할 때 강조한 것이 호흡 조절과 완급 조절이었고 이를 위해 차용하는 것이 주로 춤이었다. 참고로 당시 나와 함께 일했던 다른 어시스던트들도 닉네임이 있었는데 한 명은 ‘슬로슬로퀵퀵’, 다른 한 명은 ‘쉘위댄스’였다.(웃음)
작가를 꿈꾸다가 메이커로 전향한 이유가 있나?
어시스던트 생활을 하면서 조형물을 제작하는 일이 많았는데 작업하면서 자연스럽게 가구 등 오브제를 다루는 일에 관심이 갔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원목 가구 브랜드가 많지 않았는데 당시 밀로드라는 브랜드가 생겨 관심을 갖고 지켜봤다. 그러다 우연히 그 회사에서 처음으로 직원을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덜컥 회사로 찾아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메일로 지원 서류를 제출했는데 나만 멋모르고 포트폴리오를 들고 회사로 갔다. 그 모습이 열정적으로 비쳤는지 채용이 되어서 그곳에서 또 2년 정도 근무했다.
독립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나무를 계속 다루다 보니 자연스럽게 철이나 대리석 등 다른 소재도 다양하게 다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호기롭게 밀로드를 나와 사업 자금을 마련한답시고 제작과는 별 관련이 없는 회사를 다녔는데 일을 하다 보니 그 기간이 너무 길어졌다.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던 차에 전시 설치 전문 회사를 운영하는 선배의 권유로 그쪽 회사 일을 도우며 내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지금도 그 회사 작업실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중이다.(웃음) 그곳에서 가벽 설치나 용접 같은 현장 업무를 배웠고 지인들에게 맞춤형 가구를 만들어주기 시작하면서 프로젝트 규모를 늘려갔다.
메이커의 시대가 올 것이라 예상했던 건가?
그건 아니다.(웃음) 그저 버티다 보면 언젠가 리빙의 시대가 올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밀로드에 근무할 때도 겨울 한 철 지날 때마다 ‘어디가 망했다더라’는 소식이 심심찮게 들렸는데 그때도 그 믿음 하나로 꾸준히 작업했던 것 같다. 패션 디자이너나 그래픽 디자이너의 위상이 커진 것처럼 사람들의 관심사가 집 밖에서 안으로 옮겨오면 제작자들에 대한 관심도 커질 거라 생각했다.
첫 클라이언트는 누구였나?
디자이너 김영나의 작업실에 설치할 싱크대를 디자인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때의 인연으로 에이랜드 브루클린 매장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브랜드 클라이언트는 퀸마마마켓이 처음이었다. 당시 신진 작가를 발굴하려는 계획이 있던 퀸마마마켓 덕분에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식물이 사는 집을 모티프로 전시 공간을 연출했는데 목재를 주로 다뤘던 이전과 달리 철을 주로 사용했다. 넓은 공간을 혼자 소화해야 하는 상황에서 직접 모든 것을 제작하는 목공보다 전문 제작업체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철재를 사용하는 게 오히려 더 효율적일 거라 판단했던 것이다. 제작업체가 반가공해 온 금속을 조립해 완성하는 모듈 구조를 구상했는데 퀸마마마켓 프로젝트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철재를 다루기 시작했다.
원투차차차의 대표작을 꼽자면?
지난해 문을 연 한남동 파이프그라운드. 처음으로 기획 단계부터 참여한 프로젝트였고 매장 내 가구를 총괄 제작한 것 역시 그때가 처음이었다. 인테리어를 맡았던 푸하하하프렌즈도 워낙 좋은 팀이었고. 아티스트프루프의 쇼룸 작업도 기억에 남는다. 나중에 전해 들은 이야기지만, 퀸마마마켓에서 신진 메이커를 물색할 때 아티스트프루프 최경주 대표가 나를 추천했다고 하더라. 스튜디오 초기부터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다. 역시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할 때 최상의 결과물이 나오는 것 같다.
한남동 파이프그라운드 등에선 바퀴 달린 가구가 눈길을 끈다.
내가 제작한 가구가 전반적으로 무거운 편이다. 밀로드에서 원목 가구를 다루던 습성이 남아서 그런 것 같다. 강도에 예민한 편이라 구조를 많이 치는 편인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구가 무거워진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바퀴를 달기 시작했는데 가구의 귀여움을 담당하는 것 같아 많이 무겁지 않아도 가끔은 의도적으로 사용한다.(웃음) 요즘에는 의식적으로 가구를 좀 가볍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xs메이커라 부르지만, 사실 이들 제작자를 부르는 공식 명칭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뭐라고 소개하나?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정체성에 대한 생각이 많았는데 돌이켜보면 불필요한 고민 같다.(웃음) 요즘에는 제작자이자 디자이너이자 ‘업자’라고 소개한다. 순수 예술을 공부하긴 했지만 스스로를 아티스트라고 규정하지는 않는다. 내 디자인은 조형성보다는 기능성에 초점을 맞추니까.
왜 미술계가 제작자를 선호하게 됐을까?
그래픽 디자이너가 미술계에 침투하면서 생긴 변화 같다. 대중적 파급력을 지닌 이들이 미술관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미술관이 조금 더 대중적인 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우리처럼 대중을 상대로 작품을 선보이는 메이커까지 작가로 바라보는 시선이 생긴 것 같다. 실제로 최근 몇 달간 어리둥절할 정도로 상업 공간과 미술관 양쪽에서 많은 연락을 받았다.
선호하는 작업 프로세스는 무엇인가?
일단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은 피하려고 한다. 컴퓨터로 최대한 디테일하게 기본 작업을 완성해 제조 시간을 최소화하는 편이다. 용접도 결과에 비해 시간이 많이 드는 편이라 리벳이나 볼트를 이용하는 조립식 가구 제작을 선호한다.
xs메이커에게는 작업 프로세스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1~2명으로 이뤄진 소규모 스튜디오가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에 수행하기 때문이다. 제작 기반의 스튜디오이다 보니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비용이 있는데 그 비용을 충당하려면 언제나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요즘에는 동종업계 종사자들과 서로 제작업체를 소개해주거나 노하우를 공유하면서 효율을 높이고 있다.
글: 최명환 기자
인물 사진: 박순애(스튜디오 수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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