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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도슨트 Oct 07. 2020

세일즈 맨의 죽음 | 아버지에게 건네는 위로

ⓒlesprit.kr


일식당에서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정도로 낯이 익은 이 술의 이름은 ‘간바레 오또상’이다. '아빠 힘내세요'라는 뜻을 가진 간바레 오또상은 일본 니가타현에서 생산되는 사케이지만, 재밌게도 일본보다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많은 술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간바레 오또상은 일본이 경제 위기를 겪던 1990년대, 경제적 어려움으로 어깨가 무거워진 아버지들에게 위로를 전하고자 개발된 사케이다. 그래서 가격도 다른 사케들보다 값싸게 나왔다. 한국에서는 경제 불황이 찾아왔던 2006년 경 직장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어주었고, 이후 지금까지 인기 있는 사케로 남아있다. 다시 말해 간바레 오또상은 그 시대 힘들하는 가장의 곁을 함께해준 의미 있는 술이다.


이러한 경제 위기를 겪은 나라는 비단 일본과 한국뿐만이 아니다. 1929년,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국가들은 ‘경제 대공황’을 겪었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직장인들이 거리를 헤맸다. 이 시기 미국 경제 대공황을 배경으로 하여 탄생한 희곡이 바로 <세일즈 맨의 죽음>이다.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 예술의전당


대공황 속 혼란스러운 미국 사회를 증언한 기념비적 작품인 <세일즈 맨의 죽음>은 현대 영미 희곡의 아버지 '아서 밀러'의 대표작으로, 오늘날까지 전 세계에서 공연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시대적 배경보다는 그 속에서 신음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고자 한다. <세일즈 맨의 죽음>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비교했을 때 우리 시대 아버지의 모습은 얼마나 바뀌었는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지금도 여전히 간바레 오또상과 같은 술에 의지하며 쓸쓸히 짐을 짊어지고 있는 우리 시대 아버지들에게 글로나마 소소한 위로를 전하고자 한다.






<세일즈 맨의 죽음>의 줄거리



주인공 윌리는 평생을 세일즈 맨으로 살아온 한 가정의 아버지로, 이야기의 시작부터 끝까지 과거 속의 인물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보인다. 윌리의 몸과 마음은 세일즈 맨으로 이름을 날렸던 화려한 과거에 머물러 있으며, 직장에서 쫓겨난 신세인 초라한 현재를 허풍과 거짓으로 과대 포장한다. 또한 그는 출세하지 못한 아들들의 모습을 보기 좋고 번듯한 모습으로 남들에게 거짓 자랑하고, 스스로도 그렇게 믿는 지경에 이른다. 

윌리가 세일즈 맨으로 인정받고 경제적으로 부유했을 시절, 윌리의 아들 비프와 해피는 아버지를 잘 따르고 존경했으며 윌리 또한 아들들을 자랑스러워 한다. 그런데 윌리가 나이가 들면서 감을 잃었다는 이유로 수입이 줄어들고 결국 회사에서 잘리자, 가정에서 윌리는 초라한 존재가 되고 큰 아들 ‘비프’와 계속 갈등을 겪는다. 



ⓒhollywoodreporter


윌리 가족 중 가장 먼저 현실을 깨닫는 인물인 비프는 환상에 젖어서 살아가는 윌리에게 현실을 직시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윌리는 이를 거부하고 달콤한 환상 속으로 도피하면서 둘의 관계는 계속해서 나빠진다. 부자는 화해하지만, 결국 윌리는 가족에게 자신의 보험금을 남겨주기 위해 자살하고 만다. 윌리는 왜 이러한 파국에 치달았을까?







자본주의 사회와 가장의 무게 



윌리를 죽음으로 이끌고 간 가장 표면적인 원인은, 경제적 어려움에 딸려온 가장의 무게이다. 윌리는 30년 동안 한 회사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회사는 그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지 않을뿐더러 감사하는 마음도 가지지 않는다. 결국 한 평생 일해 온 회사에서 해고를 당한 윌리는, “오렌지 알맹이만 먹고 껍질은 버린단 말인가?”라고 말하며 한탄한다. 철저히 자본주의 사회인 미국에서 윌리는 언제든 갈아 치울 수 있는 ‘부품’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bard.org



회사 안에서 윌리의 존재는 하나의 부품에 불과했을지라도, 가정 안에서의 윌리는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이었다. 생활비, 할부금, 가전제품 및 지붕 수리비까지 그가 감당해야 하는 경제적 책임은 무겁지만, 나이가 들어가며 수입을 유지하는 일은 위태로워져갈 뿐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젊은 아들이 둘이나 있지만 두 명 모두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어, 윌리의 어깨는 더욱 무거웠다.

이렇게 냉혹한 상황의 연속에서 윌리가 가족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값비싼 것은 자신의 목숨 값 뿐이었기에, 그는 결국 자살이라는 선택에 이른다.





본질에 대한 통찰의 부족



그러나 윌리를 죽음까지 이끌고 간 원인은 경제적 어려움 뿐만이 아니다. 윌리는 본질적인 것에 충실하지 못한 채 외면적인 것에서 성공의 해답을 찾으려고만 했다. 윌리가 파악하지 못한 가장 큰 본질은 자기 자신이다. 윌리는 스스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오히려 윌리의 주변 인물들이 윌리 자신보다 그를 더 잘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윌리의 장례식에서 그를 기억하는 가족들과 친구 찰리의 대사에서 알 수 있다. 



비프: 찰리 아저씨, 아버지는 그 모든 세일즈 일보다 현관 계단 만드는 데 더 정성을 쏟았답니다.
찰리: 그래, 시멘트 한 포대만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사람이었지.
린다: 손재주가 대단한 사람이었어요.  

. . .

비프: 찰리 아저씨, 아버지는 자기 자신을 끝까지 알지 못했어요.





윌리는 자신의 훌륭한 손재주를 발휘하는 일을 했다면 충분히 행복했을 텐데도, 당시 최고의 직업으로 여겨진 세일즈 맨의 화려한 단면만을 보고 직업을 선택했다. 윌리가 직업으로 세일즈 맨을 선택한 또다른 계기는 84세의 한 유명 세일즈 맨을 보고 난 후였다. 그 세일즈 맨이 죽자 그를 기억하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장례식에 찾아와 존경심을 표하는 모습을 보고, 윌리는 자신도 죽은 후 기억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론 고령의 나이였지만 쉬지도 않고 일했던 인물이기에 과로사한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인데, 윌리는 정작 중요한 부분은 보지 못한 채 화려한 외면에 눈에 멀었다.



ⓒpressdemocrat



이렇듯 윌리는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성공에 대한 왜곡된 철학을 가지고 살아간다. 윌리는 성공의 비결이 단지 화려한 외모와 언변술에 있다고 믿으며, 이 잘못된 가치관을 아들들에게 심어준다. 그로 인해 내실을 다지지 않고 쉽게 성공하길 바라는 윌리의 아들들은 사회에서 낙오되는데, 윌리는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들과 다르게 사회적으로 성공한 옆집 친구 찰리의 아들 버나드에게 성공의 비결이 무엇인지 묻는다.


윌리 : (조그맣고 초라하게) 비결이....비결이 뭐냐? 
버나드 : 무슨 비결이요? 
윌리 : 넌....넌 어떻게 한 거냐? 왜 걔는 영영 못따라오지?

                                             . . .

 버나드 : 비프는 열심히 훈련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성공의 비결은 성실함과 정직함’이라는 단순하고도 본질적인 해답을 찾지 못한 윌리는 외면적인 것에만 집중하다가, 초라한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행복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망상에 젖어든다. 누구보다 성공하고 싶어 했으나 본질을 이해 못한 윌리는 자신의 볼품없는 말년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죽음이라는 선택을 하게 된다.




가정 내 표현과 소통의 부재 



서로 꾸준히 대화하는 건강한 가족이라면 어떤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윌리의 가정에서는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윌리와 그의 아내 린다는 피상적인 대화만 나눌 뿐, 둘다 용기가 없어 정작 해야 할 진실된 대화는 하지 못한다. 린다는 남편 윌리를 사랑하고 걱정하며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최선을 다하지만,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여전히 윌리의 마음을 불안하게 할 뿐이다.
 
 큰 아들 비프는 허상을 쫓는 아버지에게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라고 말하는데, 이로 인해 둘 사이에 깊은 감정의 골이 생긴다. 작은 아들 해피는 그저 아버지의 기분에 맞춰주며 그때그때 상황을 모면할 뿐이다.
 
 윌리 또한 아들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아버지가 없이 성장한 탓에 아들들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온전히 해주지 못한다. 윌리는 가족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 거리감과 외로움을 느낀다. 감정 표현과 소통이 없는 가정에서 가족 간의 갈등은 커져간다.


비프 : 진실을 말해줄게요. 아버지라는 사람, 나란 사람. 우린 이 집에서 10분도 진실을 말한 적이 없어요. 들어보세요 아버지. 이게 나에요.
...
아버지가 자꾸 나를 비행기 태워 놔서 이제 누가 나한테 명령하는 걸 못 견딘단 말이에요. 이게 누구 잘못인지 알겠죠? 내 말 들었죠? 아빠. 오늘 건물 11층을 뛰어서 내려왔어요. 손에 훔친 펜 하나를 쥐고. 그래서 그냥 멈춰 섰어요.
...
손에 있는 펜을 쳐다봤어요. 그리고 생각하길, '이거 왜 들고 있는거야? 응?왜 내가 되기도 싫은 사람이 되어 있는 거야?





ⓒbroadwayworld



비록 온화한 방식은 아니지만, 큰 아들 비프는 아버지 윌리와 진실을 터놓기 위한 대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현실을 직면할 준비가 되지 않은 윌리는 이를 완강히 거부한다. 작은 아들 해피 또한 아버지의 기분을 맞춰주지 못하는 형 비프를 이해하지 못한다. 해피는 비프가 갈등을 일으킨다고 판단하고 비프의 대화 시도를 저지하면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끊어버린다. 


윌리 가족이 서로의 감정에 관심을 기울이고 진심을 나누고자 노력했다면 어떠했을지 생각해본다. 그랬다면 윌리도 조금씩 천천히 현실에 직면할 용기가 가졌을 것이고, 삶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1929년 윌리 로먼은 2020년인 지금도 그렇게 낯설지 않은 인물이다. 


한 회사에서 평생 열심히 일했지만 하루아침에 해고된 아버지.

적성을 파악할 기회를 놓쳐 원치 않는 전공 혹은 직업을 선택한 아버지.

사랑하는 마음을 올바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익히지 못한 아버지.

이들 모두 지금 우리 곁에서 살아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냉혹함 아래 소모되었던,

스스로를 알아갈 시간을 가지지 못했던, 

가족에게 자신의 진심을 표현할 방법을 몰랐던,
이 세상의 모든 윌리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다.


 이제는 그들에게 “아빠, 힘내세요”가 아닌, 

 “아빠, 혼자 힘들어 하지 마세요”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 함께 가요.
천천히 가도 괜찮아요.
언제나 사랑합니다.





공동기획 | 이채영, 김희은

글 | 이채영, 김희은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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