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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누 Nov 08. 2022

2018년 서울에 머무르는 이방인

     나는 지금 몇 년도의 서울에 머무르고 있는가. 나의 모든 상식과 지식들, 하다못해 내가 아는 동시대 예술 작품이나 서적, 음악, 패션들까지도, 모두 2018년 여름쯤에 멈춰있다. 그것이 내가 한국을 떠나온 시기이므로 한국에 대한 나의 시계는 영영 그곳에 멈춘 셈이다. 

       물론 나는 2019년의 여름, 3주간 서울이라는 도시에 존재했다. 그리고 아마 그것은 올해 여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서울은 내게 삶의 터전이 아니다. 서울에 ‘산다’고 말할 수 있었던 시절의 나는 최근 나오는 소설이나 에세이, 온갖 화제의 책 같은 것들을 얼추 알았고 뉴스를 굳이 보지 않아도 들리는 소식으로 지금 이 땅에서 혹은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았다. 유행하는 노래는 길거리를 거닐거나 수많은 체인점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습득했으며 유행어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떤 음식이나 패션이, 어떤 문화적인 현상이나 키워드가 현시대를 풍미하고 있는지를 알았다. 그런 것들은 굳이 무슨 노력을 하지 않아도 서울에서 살아왔고 살아가는 내겐 자연스레 스며드는 것이었기에. 그러나, 2020년의 나는 서울과는 몇 천 킬로미터가 떨어진 곳에서 홀로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고 더 이상 서울은 내게 가까운 무엇, 혹은 적어도 삶의 터전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공간은 아니게 되었다. 이제 내게 서울은 구체적인 시공간으로 재현되고 물리적으로 체험되는 현장이 아니라 노스텔직한 추억으로 구성된 기묘한 환상의 공간에 가깝고, 점점 더 그런 공간에 가까워지고 있다. 내가 서울을 떠나온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이 아님에도. 

       그렇다고 내가 이곳에 성공적으로 터를 잡고 뿌리내렸느냐, 묻는다면 단 일 초의 망설임조차 없이 아니라고 답하겠다. 그러니까 결국 나는 어디에도 발 딛고 있지 못한 채로 살고 있는 셈이다. 물론 물리적으로는 이 도시에 속해있지만, 물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그곳에서 ‘살아간다’는 의미는 아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이 공간에 속하고 있음을 매 순간 느끼는 것이고 그 공간 속에서 삶을 일구어나가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나아가 사회 속에 어떤 방식으로든 속하고(그게 부정적일지라도) 사회의 작동 방식을 어떤 식으로든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서울에 살 적의 나는 현재 유행하는 노래가 무엇인지, 지금 가장 논란이 되는 이슈가 무엇인지, 인기 있는 책이 어떤 것인지, 누가 저명하고 저명해지고 있는지를 실시간으로 알았으며 그것이 새삼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파리에서의 나는 내가 서울에서 그렇게도 쉽게 알던 모든 정보들을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그것은 내게 프랑스인 친구가 몇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것보다는 근본적으로 내가 이 사회에 융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무엇보다 내가 이 사회에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도무지 이곳에 ‘살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사회에 살지 못하는 자의 기분이란, 항상 땅에 발을 제대로 딛지 못한 느낌에 시달리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는 불안감을 안고 있는 것, 언제나 몇 센티는 부유하고 있으며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몇 미터는 떨어진 것 같은 것,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고 숨은 쉬지만 생생하지는 못한 그런 상태가 지속되는 것을 뜻한다.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곳에 오고서야 나는 깨달았다(사실 한국 사회에서 내가 정상성에 제대로 복무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진실로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는 일기적 허용으로 용납하며, 그런 것으로 치기로 한다). 나는 이곳에 존재하지만 이곳에서 살아가지는 못하는 중이다. 이방인들에게 늘 그렇듯이, 여기서의 내 자리란 지나친 냉담이나 가식적인 친절 사이 어디쯤이다. 

       무엇보다 내게 불편한 것은 낯선 언어다. 사람들이 하는 말은 거의 알아듣지 못하고 나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잘 할 수가 없다. 당연히 소통은 없고 언어는 자라지를 못한다. 외국어를 싫어하고 평생 배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 내게는 딱히 불어를 배우고 싶다거나 잘 하고 싶다는 욕망도 없다(필요성은 느낀다). 애초에 불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듯 불어의 낯선 발음에 매료된 경험 자체가 없기 때문에, 불어에 관련된 나의 유일한 욕망은 내가 원하는 만큼 표현하고 싶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한국어로 내가 원하는 것은 거진 표현할 수 있으며 꽤 괜찮은 실력으로 단어와 단어 사이의 뉘앙스를 가지고 놀 수 있다. 낯선 언어로 이런 유희가 가능할까? 적어도 내게는 그럴 것 같지 않다. 그런데도 굳이 내가 낯선 언어에 매력을 느낄 이유가 있을까? 이미 내게는 모국어가 있는데. 내가 ‘살아’가고 있지도 못한 이곳을 위해 언어를 배워야 한다니, 내가 그렇게까지 많은 노력을 해야만 할까(이것은 물론 질문이 아니라 그러고 싶지 않다는 선언이다). 이성적으로는, 즉 대다수 사람들의 머리(물론 나 또한 포함된다)로 생각했을 때의 현실적이고도 합리적인 추론에 따르자면, 당연히(나는 지금 다다르기 싫은 결론에 다다르는 시간을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늘리고 있는 중이다), 해야겠지만, 늘 그렇듯이 최대한 안 하고 싶다. 노력은 늘 품이 들고, 프랑스 사회가 ‘살아’가고자 아등바등 몸부림쳐야 할 만큼 가치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으니까. 나는 그냥 내게 편하고, 아름답게 모호한 한국어를 쓰는 화자가 되고 싶을 뿐이고 우연히도 그 마음이 이곳에서의 내 살아감을 적극적으로 방해할 뿐인데, 내가 이 이상 할 수 있는 게 있나. 

       편하게 ‘살아졌던’ 곳을 떠나와 놓고 감히 ‘살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죄로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좀처럼 ‘살고 있다’는 감각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이 애매한 시간들은 나로 하여금 알 수 없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겸연쩍고 어색한 포즈로 배회하는 2020년의 1월. 내 어정쩡한 포즈만큼이나 두루뭉술하고 서술될 수 없는 기묘한 감정들을 떠안기에 지쳐 급기야 나는 모든 것을 미워하기 시작한다. 내 유일한 언어인 한국어와 내 환상 속의 2018년 서울, 그들만을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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