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그렇겠지만 내게는 특히나 더 강력하게 적용되는 규칙이 있다. 마음이 허하면 배가 고프다. 해외 생활 중 유일한 낙이 먹는 것이라 매끼 화려하게 요리를 해서 챙겨 먹는데도, 외롭다거나 괴로운 감정이 들면 어김없이 그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먹을 것에 탐닉한다. 어느 순간부터 세 끼를 전부 챙겨 먹으면서도 외로움이 사무치는 밤이면 또 야식을 해 먹는 것이 공식이 되어버렸다.
나의 야식 목록은 화려하다. 라면(과 계란 두 개), 라면 반 개(와 계란 두 개)와 감자튀김과 치즈스틱, 냉동피자, 찐만두…. 다양한 동서양의 음식들이 야식으로 등장한다. 야식은 대부분 간편한 식품들이다. 라면과 같은 인스턴트식품, 이미 조리가 완료되어 데우기만 하면 되는 냉동식품들이 야심한 밤, 식탁의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야식을 먹기 전에는 곧 먹게 될 야식의 이데아를 떠올리며, 오늘의 야식이야말로 나의 육체와 영혼의 허기짐 모두를 채워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하지만 첫 입을 먹는 그 순간, 모두가 알 듯이 환상은 깨진다. 야식은 나의 상상만큼 풍부하게 나를 채워주지 못한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하지만 이미 한 입을 베어 물었다면, 물리기엔 늦었다. 야식을 준비하기 위해 들인 노력과 시간이 아까워서라도(사실 그렇게 큰 노력이 아닌데도) 나는 지금 눈앞에 놓인 접시를 비워내야만 한다. 그렇게 꾸역꾸역 야식을 먹고 난 늦은 밤이면 어김없이 후회를 한다. 조금만 참을 걸. 그냥 일찍 자고 일어나서 뭘 먹을 걸. 속은 더부룩하고 배가 불러 제대로 잠에 들기도 힘들다. 그렇다고 허한 속이 채워진 것도 아니다. 아무리 배가 불러도 마음이 헛헛하고, 기분 나쁘게 부른 배 때문에 오히려 불쾌한 기분이 된다. 다시는 야식을 먹지 않으리라 다짐하지만, 나도 알고 당신도 안다. 외로운 기분이 드는 밤이면 어김없이 야식을 찾게 되리라는 걸.
인간이 심리적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사용하는 수많은 방법들이 있지만, 먹을 것처럼 즉각적인 만족을 주는 것도 없다. 따끈따끈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물리적으로는 포만감이, 정신적으로는 만족감이 차오른다. 맛도 있고, 배도 부르고, 그저 좋은 일이 아닌가? 하지만 배가 고픈 것이 아닌데도 끊임없이 음식을 찾는다면, 이 허기는 심리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심리적인 허기를 채우기 위해 먹는 음식이 나에게 이롭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음식에 가는 손을 멈출 수 없다. 하지만 달리 무엇으로 채울 수 있단 말인가? 이만큼 즉각적인 만족을 주는 것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심리적 허기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 기저에 부정적인 정서가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불안감, 외로움, 공허함, 슬픔… 이 모든 감정들이 어서 빈자리를 채우라고 종용하면 나는 울면서 먹는다. 내게는 특히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무언가를 먹도록 만드는데, 외롭다는 감각 때문에 미칠 것 같은 날이면 늘 야식을 먹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뒤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외롭고, 그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사람들은 너무나 먼 곳에 있다. 나는 잊혀졌기 때문에 외롭고 슬프다. 따라서 앞서와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이 감각을 대체 어떻게 채울 수 있단 말인가? 음식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자기 통제력이 높은 사람들은 인내할 것이다. 이것이 심리적 허기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 허기가 자신을 한바탕 휘젓고 사라질 때까지 인내하는 것이다. 아니면 다른 대안들도 있다. 운동을 하거나, 일을 하거나, 독서를 하거나 창작 활동을 하거나, 무언가 다른 일을 하면서 심리적 허기가 지나갈 때까지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 또한 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일을 할 만큼 이성적인 상태가 아니라면? 외로움이 나를 잡아먹어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남은 것은 일단 먹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다른 대안이 있더라도 나는 지금 그것을 실행할 힘이 없고, 외로움은 나를 계속 갉아먹고 있으니. 다른 먹을거리를 던져주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먹는다. 비록 일회용이지만 그만큼 효율적이고 즉각적으로 외로움을 달래줄 대안이 없어서. 나날이 늘어나는 몸무게는 물리적으로 관찰 가능한 내 외로움의 무게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