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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a Jun 13. 2021

내가 노래를 들려줄게

영화 <레토>

<내가 노래를 들려줄게>        

-Лето. sin 2019. Кирилл Серебренников. 



*비평의 제목은 ‘옥상달빛’의 <선물할게>의 가사에서 인용. 


https://youtube.com/playlist?list=PLqy8v4lWr_leqzAFCTgxUHLLRI1voeaKS

*이 글을 쓰며 들었던 곡들을 정리한 믹스입니다. 목차별로 순차 재생이 되도록 설정해놓았으니 여유가 되신다면 글을 읽는 동안, 혹은 이번 여름을 보내는 동안 백그라운드 뮤직으로 추천드립니다. 





Summer (The Volunteers, 2021) 


‘바다에 둥실둥실 떠서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싶다. 너무 덥고 힘들어.’ 


성큼 다가온 더위가 가장 강렬하게 느껴지던 6월 4일의 오후 한 시. 친구가 연락을 보내왔다. 물놀이나 하고, 컵라면이나 먹고. 후딱 씻고는 낮잠을 자고 싶다고. 휴가와 방학, 연휴와 피서 등의 낭만적인 바람 이 메시지에 살랑거렸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바람이기에. 아직 실행하지 못해서 꿈꾼다는 걸 알아차렸다. 


지친 마음이 오랜 결심을 포기하도록 방조하는 계절, 여름. 텔레비전에 나오는 수많은 가수는 청량하고 시원한 밤바다를 광고하는데, 그것은 미디어 안에만 있고 이곳에는 실재하지 않는다. 친구가 말했다. ‘우리는 관념적인 여름만을 사랑한다’라고. 자신은 요즘 원래 해오던 노래를 만드는 일 말고 다른 일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번아웃 직전이라며 말을 이었다. 당장의 고통을 상상하는 즐거움으로나마 억지로 치환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는. 끈적하고 잔인하기만 한 더위의 실상. 오죽하면 번 아웃 (에너지를 다 태워 소진하다 - burnout)이란 말이 있을까. 나는 친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가만히 앉아 생각했다. 덥지 않은 여름 말고, 무엇을 선물할 수 있지? 나는 지금 무엇을 바꿀 수 있지? 등 뒤로 가만가만 땀이 흘렀다. 


반년 전 건강이 나빠져 대학교를 휴학한 뒤로, 내가 하는 일이라곤 ‘침대에 누워 영화 보기’ 밖에는 없었다. 하는 수 없지. 또 영화를 보자. 우선 뭐든 보고 나면, 자리에서 일어설 힘이 생길 거야. 간만에 넷플릭스나 왓챠가 아닌 플랫폼에서 위시리스트에 담아두었던 영화 한 편을 결제했다. 제목 <레토>. 러시아어로 여름. 내가 아는 가장 추운 나라에서의 가장 더운 계절을 노래한 가수의 이야기가 화면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It’s Still Rock and Roll to me (Billy Joel, 1980) 


레토, 우-우-아. 좁은 흑백 화면을 가르고 덥수룩한 머리의 두 남성이 등장한다. 한 명은 빅토르 최, 한 명은 리오샤. 그들은 머리만큼 높게 솟은 기타 가방을 들쳐 메고 해변을 전진한다. 인물을 좇아 성큼성큼 나아가는 롱 팔로우 샷. 핸드헬드에서 생동감이 느껴진다. 펑크의 초대를 받았으며 마이크를 찾으러 왔다고 사람들에게 말하는 그들. 선글라스를 쓴 남성이 선글라스를 쓴 여성과 어깨동무를 하고 해변을 걷는다. 조금 전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던 가수 마이크와 그의 가족이자 뮤즈 나타샤다. 


이름이 없어도 자신만의 노래를 만드는 빅토르 최와, ‘가린과 쌍곡선’이란 이름을 지어주지만 아무런 뜻이 없는 것도 괜찮다고 말하는 마이크. 그 이름의 뜻을 묻는 유일한 사람, 나타샤. 이 영화의 주인공 셋이 이렇게 만난다. 


십 분 전, 영화의 시작으로 돌아가 보자. 사람들이 마치 첩보 작전이라도 하는 것처럼 사다리를 놓고 화장실 창문을 통해 건물로 들어간다.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프라이빗한 곳으로라도 숨어들어 공연을 보러 모이는 관객들. 그렇지만 공연 하나가 끝나고 나면 사람들은 해변에, 집에, 거리에 쏟아져 나와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신다. 의미 없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며 알몸이 되어 뭍에서 물로 뛰어든다. 조금 전까지 필요했던 것들을 다 태우며 즐거워한다. 자 그럼 다시, 영화를 조금 더 빨리 감아보자. 당의 허락과 심사를 통과해야 국가에서 운영되는 클럽에서 공연할 수 있는 시험대에 오른 빅토르 최와 친구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들의 노래는 ‘풍자’가 아니고선 당시의 수뇌부에서는 수용될 수 없었고, 섹스 피스톨즈 같은 머리를 하고서는 미팅 자리에 함께할 수조차 없었음을 영화는 명시한다. 시대 배경을 잘 모르는 나로서 는 답답할 지경이었다. 오죽하면 화장실 세면대에 머리를 처박고 빗질을 한 채 다시 나타났을까. 


이러한 장면들이 회상하는 기억은 철저하게 통제된 사회와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오려는 욕구 표출, 혹은 자아실현의 욕망으로 얼룩져있다. 저항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당시의 억압적 분위기와 타협하고 싶어 하지 않아 했던 빅토르 최라는 인물이 돋보일 수밖에 없도록 말이다. 인물의 윤곽선을 따라 컨투어링 된 음영의 대비는 관객이 봐야 할 시야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 또렷하게 주인공과 그가 살아가고 있는 배경을 인식하도록 하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가 사건의 개요와 발단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들이라면, 이 영화는 6가지의 갈래 중 단 한 우물을 열심히 파낸다고 나는 느꼈다. 바로 ‘어디서’. 보통의 내러티브 속에서 작가 혹은 연출가는 주인공의 동기를 청중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애쓴다. 레토를 기준으로 예를 들어보자면 이들이 어떻게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고, 기타는 누구에게 배웠고, 팀은 어떻게 결성하게 되었고 등등 이 있겠다. 그렇지만 이러한 장면들은 모두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도 과감하게 생략되어있다. 마치 당연히 그렇게 되었다는 듯이. 


밴드 음악을 후대에 물려주겠다는 친구들과의 약속과 다짐이 마이크에게 있었기에 그는 특별한 사건 없이 빅토르 최의 음악적 멘토가 되어준다. 하룻밤의 불장난도 없었음에도 나타샤와 빅토르는 풋내나는 사랑에 빠진다. 빅토르의 음악을 바꾸고 싶어 했던 친구들과의 갈등이나, 드러머가 어느 날 갑자기 음악을 그만두고 군에 징집되어도 더는 극 중에서 설명하거나 눈을 맞추고 인사를 건네지 않는다. 마지막이 시작될 때(키노의 시작), 정처 없이 떠돌던 그들이 결국엔 자신의 자리를 찾아 돌아간 것처럼. 그들에게 보다 앞서 있던 질문은 내가 누구인지 보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였다. 


어떤 가사의 노래를 부르던, 전자기타를 치던 통기타를 치던, 드러머 없이 드럼 트랙을 깔고 공연을 하던, 기혼자와 연애를 하고 키스를 하던, 무엇을 하던.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들이 있는 ‘시대’를 살아내고 있음에 집중했다. 우선 시대를 고증하고 나면, 동기와 수단 같은 논리적 과정과 절차를 입증할 필요가 없었다. 1981년, 소련, 레닌그라드. 그들은 그곳의 록스타였으니까. 




Back In Black (AC/DC, 1980) 


그렇지만 뛰어난 시대 고증과 배우들의 연기보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빅토르 최라는 실제 인물의 전기 영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하물며 다큐멘터리는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은 제한되고 통제된 상황에서의 극적인, 음악적인 상상력이 얼마나 넓은 영역까지 뻗어 나갈 수 있는지 실험한 비행이다. 


전체적인 톤이 모노라고 해도 처음부터 끝까지 흑백만을 고집하는 영화도 아니거니와, 제4의 벽은 밥 먹 듯 허물어지며, 뮤지컬 스코어가 주를 이루지만 주위의 사람들은 노래를 더럽게 못 부른다. (라라랜드 등 의 다른 음악 영화를 떠올려보면 쉽게 비교할 수 있다) 이럴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의 여지를 끊임없이 제공하며, 그것을 한순간에 ‘없던 일’로 되돌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 시장 한쪽 구석에 숨어 모작을 팔다가 번 3 루블로 남의 집 커피잔을 사서 버스를 잡아타는 일은 진짜로 구현해낸다. 


영화 속 주인공들을 촬영하는 이가 꾸준히 등장하며, 이는 영화 속 영화. 마치 미장아빔같은 액자식 구성을 시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실에 안주하는 마이크의 음악을 비판하는 회의론자는 스스로 죽었다가 금방 다시 살아나기도 한다. 심지어 그는 영화 내에서 유일하게 관객과 직접 소통을 하는 가상의 인물이다. 모두가 그를 인식하고, 심지어는 대화도 접촉도 하지만 그는 한 겹 위의 레이어에 겹쳐진 사람처럼 유유히 스크린에 나타났다가 스스로 떠난다. 


디제시스라는 영화 속 내러티브의 공간과 서사를 깨고 새어 나오는 2D 모션그래픽들은 관객과 인물의 상상을 연결하는 다리다. 로토스코핑으로 톡톡 튀어나오고 팝팝 터지는, 의성어 같은 애니메이션들. 심지어 그러한 흐름 속에서도 컷 전환을 빠르고 다이내믹하게 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 영화를 더욱 흥미롭게 만든다. 이제껏 만나본 적 없는 고유한 리듬을 가진 새로운 장르로 그들이 보낸 그 시절, 그 여름을 인식하게 한다. 


영화의 후반부,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펑크(나는 이 이름도 은유적이라고 생각한다)는 대뜸 갈매기 소리를 내더니 밤새 돌아가고 있던 영사기의 화면 속으로 뛰어든다. 초반 부분 모두가 나체로 춤췄던 검은 해변을 기억하는가? 그는 이제 스크린 안의 스크린으로 한 번 더 깊이 들어간다. 화면은 처음으로 컬러이면서도 정방향이 아닌 풀사이즈로 전환된다. 


영화에서 영화 밖으로 꾸준히 말을 걸어오던 <레토>는, 영화에서 영화 속으로. 영화 안의 삶으로 한 번 더 우리를 초대한다. 타인의 경험이 아닌 본인의 경험으로 이 시대를 살아보라고. 뉴-웨이브에 잠겨보라고. 모르는 것으로 가득한 바다가, 미지의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Bizarre love triangle (Extended Dance Mix) (New order, 1987)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한가지 딜레마에 빠졌다. 주인공과 시대, 그리고 이 영화의 스타일에 대해서 뜯어보았는데. 가장 중요한 주인공을 성장시킨 갈등은 무엇이라고 인식해야 할까? 


대학교에 가서 지겹도록 시나리오 수업을 들으며 3막 구조와 그놈의 주장목변(주인공-장애물-목표-변화)에 대해 들었다. 나도 배운 대로 글을 쓰고 싶었지만, 교수님이 원하는 박진감 넘치는 상업영화를 갑자기 뚝딱 만들어낼 수 없었다. 삶이 그렇게 드라마틱했던가? 나는 오히려 내가 만들지 않은 영화를 내 것처럼 체험하고, 읽어내고 싶었다. 나는 나에게 많은 일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떠나가는 동안 영화를 변함없이 사랑했고, 그것이 나의 힘이라 믿었다. 나는 지치지 않고 영화를 사랑하는 나만의 초능력으로, 내 삶의 슈퍼 히어로가 되고 싶었을 뿐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에 대한 답이 아직도 애매모호하듯이. 빅토르와 마이크와 나타샤. 세 사람의 시작점에는 항상 음악과 사랑이 함께했다. 그것은 긴장을 빚어내고, 때로는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그들의 갈팡질팡한 마음은 칼로 무 자르듯 분명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현실적이었다. 영화 토론 수업을 하면서도 우리는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질문에 질문을 거듭했다. 왜 이렇게 해야만 했을까? 과연 이 극에서 넘어야 할 산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음악적 여정일까, 혹은 그의 음악을 있게 한 감정의 시작일까? 나는 레토에 관해 쓰며 내가 맞이한 갈등이 지금이라고 느꼈다. 어느 것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어느 이정표를 세우고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이 부분을 시작하며 가장 오랜 시간 고민했다. 


나는 쉽게 감상에 빠지는 사람이지만, 이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늘 생각해왔다. 가끔 내 속으로 너무 파고 들어가 다른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할 말로 감정을 배설하고 나서는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책임질 수 있는 말을 하고 싶었다. 마이크가 가장 사랑하는 일, 노래를 부르며 사람들 앞에 서는 것. 그 일을 가업을 잇듯이 누군가는 계속 노래할 수 있도록 배려했던 것처럼. 나타샤가 마이크에게 솔직했던 것처럼. 오로지 나타샤와 관계 맺을 때 가장 자유로워 보였던 빅토르가 다시 한번 나타샤를 위해 만나지 않기로 했던 것처럼. 


그래. 그래서 그랬다. 나는 긴 고민 끝에 음악을 만드는데 필요한 사건과 감정을 우선시해보기로 했다. 감히 말해본다. 나는 낭만주의자가 아니며, 로맨스 영화 보는 것을 가장 꺼리지만, 사랑 없이 성장하는 삶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선 없었던 것 같다고. 


나의 선택의 결정적 이유는 이것이다. 굳이 빅토르와 나타샤의 키스신을 두 번에 나누어서 갈등 지점과 해결 지점에 보여준 감독의 의도에 대한 궁금증. 그것이 이 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감상을 180도 뒤집을 수 있었던 갈등 설정의 요인이었다. 


마이크는 주위에 수많은 여성 팬이 있는 기혼자이다. 나타샤는 그의 아내이며 기혼자이다. 둘 사이에는 갓난쟁이 아이도 있다. 그런 그들이 둘 사이에 나타난 빅토르로 인한 감정의 변화를 관찰하며 서로를 계속해서 사랑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한다. 비를 맞으며 처량하게 울어보기도 하고, 엉겨 붙은 토마토를 반 갈라 먹어보기도 한다. 떠나기도 하고 함께하기도 한다. 그들의 이러한 결정들은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무작정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 마음껏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도 사랑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나는 이토록 기묘한 세 사람의 삼각관계가 바위처럼 단단하고 완벽한 결심은 없었어도, 본인의 선택을 함과 동시에 상대를 가로막지 않으려 노력했다는 점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자신과 타인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의 자유. 그것이 그들을 무너트리지 않고 계속 노래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한다. 





Sweet Child O’ Mine (Guns N’ Roses, 1987) 


“내 친구들은 삶을 헤쳐나가고. 행진해” 


노래는 영화가 되고 영화는 노래가 된다. 마이크가 지어준 이름 가린과 쌍곡선에서 빅토르가 원하던 두 음절의 이름이 된 키노(영화라는 뜻)의 시작으로 이 영화는 끝난다. 감독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징검다리를 달려서 건너듯 일관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그들의 음악이 어떻게 변해가고, 어떻게 사람들 사이에서 불리게 되고, 어떤 마지막을 맞는지 조명하지 않는다. 오직 젊은 나이에 떠나간 그들을 그리워하는 누군가가 그 시대를 살아내고 꿈꿨던 이들에게 헌정하듯 “This film is dedicated to those we love.” -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 라는 말로 막을 내린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며 여름을 노래하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자신이 다 타서 없어진 것만 같다는 그 친구에게 말했다. 나 글을 쓸 거야. 나 다시 글을 쓰고 삶을 헤쳐나갈 거야. 영화를 만드는 일은 잠시 멈출래. 대신 이 글을 완성하면 너희에게 선물하고 싶어. 오직 너희만이 음악 속 여름만큼 이 영화와 똑 닮아있으니까. 나는 너희가 부르는 노래를 먹고 자랐잖아. 그러니 한때에 지나는 글이라 해도 괜찮아. 한 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열심히 해볼게. 눅진한 외로움의 끝자락에서도 누구든 숨 쉴 구멍이 될 수 있다면야, 얼마든지. 이 글은 내가 너희에게 들려줄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그리고 유일한 음악이다. 듣기에 좋았으면 좋겠다! 









2021.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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