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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으로 충분한 화가, 김환기

삶, 예술이 되다.

by 무드온라이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원래 좋아하던 화가였지만, 그의 철학과 예술 세계를 이해하게 된 건 에세이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만난 이후였다. 그 우연한 만남은 깊은 사유의 여정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의 작품 속 수많은 파란 점들은 시간과 공간, 철학과 예술을 가로지르며, 오랜 사유 끝에 찍힌 '삶의 점'이라는 걸 그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캔버스 위의 조국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지금은 다소 진부한 말이 되어버렸지만 1950년대에 이 말을 주장했다는 게 놀랍다. 전쟁 후 폐허와 다름없던 시절, 더구나 미술계에서는 한국의 존재가 더더욱 미미했을 시대였다.
김환기가 이런 주장을 했던 근거는 오롯이 그가 가치를 발견한 ‘한국의 전통과 정서’였고, 구체적으로는 한옥의 처마 곡선, 한지의 투명함, 고향의 푸른 하늘, 동해의 바다, 달항아리의 곡선과 백자에서 오는 고요함 등이었다. 이 모든 것은 김환기에게 ‘캔버스 위의 조국’이었다.

김환기의 1958년작 <달항아리와 나무>. 푸른 배경 위에 전통 달항아리를 중심으로 표현된 서정적 추상화

“우리의 것이 아닌 것은 창작이 아니라 모방이다.” 그에게 창작이란 정체성을 담은 출발점이었다. 자칫 서양문화를 분별없이 받아들이기 쉬운 시절이었지만, 그의 예술 가치는 분명했고 그의 창작에 방향을 제시하였다.


교육자로서의 사명


그는 서울대와 홍익대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한국 미술대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예술교육의 철학, 공간의 역할, 그리고 세계 속 한국미술의 비전에 대해 세심한 조언을 남긴 교육자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세계적인 작가가 이곳에서 나와야 한다”는 소망을 밝히며, 늘 예술에 대한 진심과 책임을 자신의 교육 철학 속에 담았다.


예술의 시간


김환기는 자신의 모든 순간을 예술로 번역해, 그림이라는 언어로 남겨두었다.

그의 그림은 그렇게 태어났다. 낯설고 넓은 세계에 자신을 던진 용기, 그리움의 깊이, 조용한 사랑 —

이 모든 마음이 ‘점’ 하나, ‘푸른 여백’ 하나에 담겨 우리에게 도착했다. 그를 김환기로 있게 한 것은 무엇보다 고국을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을 진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담아낸 그리움이었다.

강릉 솔올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마주한 나는, 한참 동안 한 점의 푸른 점 앞에 멈춰 있었다.

그 마음이 수많은 점으로 피어나는 예술로 이어졌고, 그 점에는 김환기가 껴안았던 질문, 외로움, 그리고 다짐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김향안이라는 이름, 함께 만든 예술의 여정


문학과 예술을 이해했던 김향안. 그녀는 김환기의 삶을 조율하고 지지했던 아내이자 동반자였다. 당시 신여성이었던 김향안은 시인 이상과의 사별 후 김환기의 삶에 들어와 그의 예술성과 가능성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고, 김환기를 위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1950년대 파리, 김환기와 김향안 예술과 삶, 동반자의 길을 함께 걸은 두 사람의 모습

해외 유학과 전시, 네트워크, 언어의 장벽 등 모든 여정을 함께 건너온 그녀의 존재는 김환기의 세계화를 가능케 한 ‘숨은 축’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삶의 여정을 마친 뒤에도,

그녀는 그의 예술을 지켜냈고, 그 덕분에 우리는 오늘의 김환기를 만날 수 있었다.


끝나지 않은 열정과 도전


1974년, 김환기 생애 마지막 작품. 뉴욕의 밤하늘처럼 고요한 화면 위로 질서와 여백이 선과 점으로 남겨지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더 빠르게, 더 쉽게 성공할 수 있을까’가 아닐까. 대부분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한, 편한 길을 택한다. 하지만 김환기의 매력은 ‘멈추지 않는 태도’에 있었다.

많은 이들이 정점에 오르면 머무르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이미 주어진 익숙함과 안정을 택하기보다, 그는 낯선 세계로 자신을 던졌고, 그곳에서 다시 처음처럼 자신을 시험했다. 그 단단한 용기와 열정은, 오늘날까지도 깊은 울림으로 남아 있다.

그림을 보기 전, 먼저 그 여정을 떠올리게 된다. 어떤 마음으로 붓을 들었는지, 무엇을 남기고자 했는지. 점으로 이어진 그 길은 곧 한 사람의 생애이자 내면의 흔적이다. 그의 삶은 그렇게 예술로 남겨졌고, 그 흔적은 이제 시각적인 감상을 넘어 한 사람의 태도와 인생으로 다가온다. 나는 점 하나하나를 따라, 그가 지나온 시간을 천천히 걸어가 본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잠시 멈춰 선다. 그리고, 나도 조용히 되묻는다.


이어지는 질문


나는 예술가가 아니다. 하지만 내 삶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작지만 깊은 여운으로 남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를 품은 삶을 살아야 할까.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오늘도 나는 그 질문에 귀 기울이며 하루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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