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연재를 시작하며] 그동안 '무드온라이프'를 통해 저의 일상과 시선을 나눠왔습니다. 오늘부터는 그 시선을 조금 더 넓혀, 제가 오랫동안 사랑해 온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을 기록하는 새 매거진 '무드온아트(Mood on Art)'를 시작합니다.
'예술은 결국 한 사람의 생애가 응축된 결정체'라는 믿음으로, 거창한 비평보다는 그들의 실루엣 뒤에 숨겨진 인간적인 고뇌와 찬란한 승화의 순간들을 담아내려 합니다. 그 장대한 막을 여는 첫 번째 주인공은, 젊은 시절의 저에게 강렬한 아우라로 남았던 천경자 화백입니다.
1995년 늦가을, 기다리던 〈천경자 회고전 〉이 서소문 중앙일보 사옥의 호암갤러리에서 시작되었다. 인산인해를 이룬 전시장에서 난 운 좋게도 화려한 패턴의 실크원피스를 입고 많은 사람들 속에 있는 그녀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당시 71세의 여성화가. 꼿꼿한 자세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단연 시선을 사로잡은 그녀의 아우라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 있다.
그 이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를 볼 때면 상설전시된 천경자의 공간도 잊지 않는다. 최초로 저작권을 사회에 환원한 작가라는 타이틀은 말처럼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더 가치 있게 다가온다.
이번 가을, 서울미술관에서 천경자의 전시,〈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를 관람하고 당시 호암갤러리 큐레이터로써 천경자 전시를 기획한 국내 예술학 박사 1호 최광진이 저술한 천경자 평전 『찬란한 고독, 한의 미학』을 연이어 읽었다. 예술가이자 여성으로서의 공감대가 어느 부분 겹쳐지며 한 인간으로서 천경자와 그녀의 작품들이 마음에 깊숙이 자리하게 되었다.
천경자(1924.11 ~ 2015.8)는 자신의 생(生)을 스스로 조각한 화가다. 세간에 알려진 '꽃과 여인의 화가'라는 수식어 뒤에는, 채색화라는 정교한 언어로 한(恨)의 심연을 관통한 거장의 고집이 서려 있다. 그녀의 캔버스는 언제나 생의 뜨거운 열기와 지독한 고독이 교차하는 치열한 기록의 장이었다.
그녀에게 예술은 고통을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유일한 통로였다. 붓을 쥐는 행위는 스스로를 지키는 존엄의 의식이었으며, 캔버스 위에 겹겹이 쌓아 올린 색채는 그 자체로 단단한 생의 의지였다. 1995년 그 뜨거웠던 전시장에서 내가 목격한 꼿꼿한 자세는, 평생에 걸쳐 자신의 내면을 정제해 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기품의 결정체였다.
천경자는 1924년 한반도 최남단의 바다가 육지를 품는 곳, 전라남도 고흥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맑은 하늘 아래 계곡과 소나무가 우거진 봉황산은 호기심 많은 소녀에게 거대한 놀이터이자, 훗날 예술가로서 영감을 길어 올리는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
마을을 찾아오던 곡마단의 화려한 이면에 깃든 고독을 응시하고, 머리에 꽃을 단 여인들의 모습에서 기묘한 미학을 발견하던 어린 날의 시선은 특별했다. 그 찰나의 관찰들은 훗날 천경자의 캔버스 위에서 꽃을 든 여인들의 애틋하고도 찬란한 서사로 부활한다.
마을에서 치러지던 상여를 맨 장례행렬에서도 죽은 자가 마지막으로 타고 가는 상여에 색종이로 만든 화려한 꽃들에 깃들인 슬픔을 기억하였다. 뿐만 아니라 작품 <생태>에서의 뱀의 등장은 어릴 적 친구를 죽음으로 몰고 간 두려운 존재로 남아있던 커다란 능구렁이의 서사와도 겹쳐진다.
아름다운 자연과 유복한 환경 속에서 보낸 고흥에서의 유년 시절은 소녀의 시선에 깊이 각인되었다. 고향의 평온한 대지는 그녀에게 안락한 품이 되어주었지만, 한편으로는 더 넓은 세계를 꿈꾸게 하는 동경의 씨앗이 자라난 곳이기도 했다.
예술적 감수성의 원천은 어머니였다. 서예와 동양화에 재능이 깊었던 어머니는 눈이 큰 미인이었으며, 천경자는 외조부로부터 전수받은 창(唱) 솜씨로 동네에서 이름난 어린 소리꾼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보고 자란 그 소리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훗날 천경자는 인생의 거센 파고를 마주할 때마다 창을 들으며 한바탕 눈물을 쏟아냈고, 그 소리에 마음을 씻어내며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 이처럼 그녀의 유년은 예술가로서의 정서와 환경을 오롯이 채워준 훌륭한 자양분이었다.
학창 시절의 천경자는 글짓기와 역사, 지리 등 다방면에 흥미를 보였으나, 그림에서만큼은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광주공립여자보통학교(이후 광주 욱고녀, 전남여고로 교명이 변경됨) 시절 사춘기를 지나며 그녀의 예술적 감수성은 한층 깊어졌다. 졸업과 동시에 결혼이라는 관례적인 삶이 기다리고 있었으나, 천경자는 그 갈림길에서 망설임 없이 그림을 선택했다.
집안의 완강한 반대는 오히려 그녀의 의지를 선명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광기 어린 연기를 해서라도 바다 건너 동경으로 향해야 했다. 그것은 타인이 설계한 삶을 거부하고 오직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최초의 저항이었다. 1941년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현 동경여자미술대학교)로 떠난 유학은 화가 천경자로서의 실존이 시작된 역사적인 첫걸음이었다. 이불 보따리와 한복 몇 벌을 챙겨 현해탄을 건넌 유학 생활은 궁핍했으나, 그녀는 홀로 고독을 견디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당시 일본 미술계는 야수주의와 입체주의가 유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경자는 섬세하고 꼼꼼한 자신의 기질에 맞춰 채색화의 길을 택한다.
조부가 지어준 이름 '옥자' 대신 거울 보는 여자를 의미하는 '경자(鏡子)'라는 이름을 스스로 택한 것도 이 시기였다. 이름은 곧 그녀가 마주할 예술적 자아의 선언이었다.
방학을 맞아 고향을 찾은 그녀에게 집안의 몰락은 청천벽력과 같았다. 병환 중인 외조부와 가산 탕진으로 인한 부모님의 불화는 그녀를 압박했다. 꿈을 포기할 수 있는 위기였으나,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도쿄로 향했다. 추운 하숙방에서 낙선의 고배를 딛고 완성한 작품 <조부>는 고향에서 스케치해 온 외조부의 모습이었다.
이 작품으로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의 영광을 안으며 그녀는 당당히 귀국길에 올랐다. 학업을 마치고 그녀는 화가라는 당당한 이름을 가슴에 품고 현해탄을 건너 고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곳에는 유학 시절의 열정보다 더 가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1944년 가세가 기울어 귀국한 이후의 삶은 격동의 연속이었다. 첫 번째 결혼과 출산, 그리고 어려워진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교사로서 가장 역할을 감당해야 했던 세월은 고단했다. 결국 홀로 서기를 택해 서울로 거처를 옮겼으나, 해방과 전쟁, 여동생의 죽음 등 연이은 불행은 운명처럼 그녀를 찾아왔다.
두 번째 사랑 역시 가혹했다. 깊어지는 사랑만큼 고통도 커졌고, 임신한 그녀에게 남겨진 것은 입대를 알리는 편지 한 통뿐이었다. 이토록 소설 같은 비극적 사건들은 역설적으로 그녀를 예술가로서 더욱 단단하게 연단시켰다.
특히 화가가 되기 위해 홍익대 입학을 앞두고 결핵에 걸린 여동생의 죽음은 마음의 깊은 상처가 되었다. 벼랑 끝에 선 그녀는 환상 중에 본 실뱀을 떠올리며 광주역 앞의 뱀집을 찾았다. 어릴 적 징그럽고 두려운 존재였던 뱀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순간, 그녀는 묘한 생명의 충동을 느꼈다. 마음의 동요가 사라지고 그림을 향한 갈망이 일어났다. 그렇게 서른다섯 마리의 뱀이 뒤엉킨 작품 <생태>가 탄생했다. 그것은 지독한 고통을 독으로 다스리며 써 내려간 필사적인 생존의 기록이었다. 자신의 한을 회피하지 않고 캔버스 위에 쏟아붓는 순간, 비극은 비로소 예술이라는 기품을 입기 시작했다.
사실 <생태>를 마주한 사람들은 대부분 징그럽다는 생각을 먼저 할 것이다. 나 역시 처음 이 작품을 보았을 때 '하필이면 뱀일까' 하는 거부감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왜 세상의 따가운 시선을 뒤로하고 캔버스를 가득 채울 만큼 뱀에 집착했는지 그 속내를 들여다보니, 그것은 징그러운 파충류가 아니라 그녀를 살게 한 생명의 끈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가장 혐오스러운 존재를 통해 간절한 생의 의지를 드러낸 역설, 그것이 내가 천경자의 예술에서 발견한 슬픈 용기였다.
1951년 한국전쟁 중의 피난지 부산은 천경자가 화가이자 수필가로서 날개를 단 기회의 땅이었다. 그녀는 서정주, 김동리 등 문인들과 교류하며 예술적 폭을 넓혔고, 그 무렵 화가 이중섭과도 깊은 예술적 교감을 나누었다. 이중섭은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낭만주의자였으나, 가족을 일본으로 보내고 홀로 떠도는 궁핍한 생활 속에서 삶의 고뇌를 '소'라는 강렬한 상징으로 풀어냈다. 이중섭이 '소'를 통해 시대의 아픔을 포효했다면, 천경자는 '뱀'을 통해 자신의 한을 응시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고통을 예술로 치환한 닮은 꼴이었다.
전쟁의 상흔이 깊던 시절, 부산 칠성다방 전시회는 그녀의 인생을 바꾸는 변곡점이 되었다. 처음엔 전시장에 제대로 걸리지도 못한 채 주방 근처에 놓여 있던 <생태>가 세상에 나온 것이다.
이후 국제구락부 개인전에서 공식 소개된 이 작품은 고구려 벽화 <현무도> 이후 1,400년 만에 등장한 충격적인 뱀의 형상으로 화단을 흔들었다. 젊은 여류 화가가 터부시되던 뱀을 그렸다는 사실은 거센 화제가 되었고, 그녀는 단숨에 화단의 중심부로 진입했다.
전쟁의 끝자락, 그녀는 서울로 거처를 옮기며 남편과 재회하여 잠시나마 평온하고 행복한 삶을 맛보기도 했다. 이 시기의 안정은 훗날 그녀의 캔버스가 더욱 화려하고 환상적인 색채로 채워지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후 1954년 홍익대학교 교수로 부임하며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안정된 생활이 예술가로서의 갈증을 온전히 채워주지는 못했다.
해방이 되면서 미술계의 변화도 크게 일어났다. 무엇보다 친일파를 색출하기 바빴고 채색은 일본풍으로 매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천경자는 색이 좋아 그림을 시작했기 때문에 당시 많은 화가들이 수묵화로 전향하였으나 결코 채색화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서양화가들과 어울리며 동양화의 재료로 실험하곤 하였다. 값비싼 안료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으나 수없이 반복된 덧칠로 아래에서 은은하게 비쳐 나오는 채색방식은 동양화와는 달리 마치 서양화를 연상시켜 종종 서양화로 분류되기도 했다.
1959년 완성된 <전설>은 그녀의 채색실험이 정착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짙푸른 어둠 속의 부엉이 떼가 아이들의 행복과 안전을 지켜주는 듯하다. 신비롭고 풍부한 색채의 향연에서 보라색이 보여주는 상반된 이미지는 초월적 신비감과 동시에 고독과 슬픔을 상징하기도 한다.
왕성한 작업과 전시, 수상 등으로 겉으로는 화려한 듯 보이는 삶이었으나 늘 가난한 생활은 이어졌고 무엇보다 예술가로서의 위기감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가 선택한 탈출구는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화가로서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한 필사적인 출발이었다.
천경자의 예술은 고독의 산물이다. 그녀는 '벽에 부딪히고 싶은 외로움이 인간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신념이 있었다. 종종 그녀에게 찾아오는 우울증과 자살충동을 관조하며 나온 작품이 1969년도의 <자살의 미>이다. 자신의 분신과 같은 가녀린 수선화는 날카로운 믹서기의 칼날과 함께 위태로운 심리상태를 드러냈다. 침울하고 불안한 회색빛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청회색은 칸딘스키, 고흐에게도 우울감을 표현하는 색채였다.
이 작품을 보면 예술가들은 감정적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객관화해서 창작으로 이끄는 강한 정신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파괴를 통한 창조를 위해서는 때로 고립도 필요하다. 세상과 영합하고 대열에 끼지 못하면 호적이 없는 것처럼 세상살이까지 고달파지지만, 내 경우는 이것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운명적인 고통이었다." - 천경자 출처: 최광진저. 천경자평전 『찬란한 고독, 한의 미학』p94
결국 1974년, 그녀는 생활과 명예가 보장된 교수직을 내려놓고 전업 화가의 길을 택하며 세계 일주 여행이라는 파격적인 도전에 나선다. 아프리카와 남미 등의 오지를 누비며 만난 이국적인 여인들의 얼굴에서 그녀는 다시 한번 자신의 내면을 발견했다.
베트남 전쟁터의 종군 화가로서 사선(死線)의 긴장감을 아름답게 포착해 낸 기록들은, 그녀의 예술이 화려한 겉모습 너머 치열한 생존의 기록이었음을 증명해 준다. 문공부에서 베트남 전쟁기록화를 위해 파견하는 종군화 가단에 여류화가로서 유일하게 선정되었다. 이마동, 박영선, 김원, 김기창, 장두건, 임직순, 박서보, 박광진, 이승우와 함께 동행하였다. 아래 두 작품은 잔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묵묵히 핀 꽃들의 역설적인 평화로움에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 그녀는 또 다른 특별한 여정을 시작했다. 자신에게 울림을 주었던 작가나 소설 속 주인공들의 흔적을 찾아가는 문학기행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풍경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자신의 감성을 일깨우는 영혼의 순례였다.
미국 키웨스트 섬에서는 헤밍웨이의 단골 술집 ‘슬리피 조’와 그의 생가를 찾았다. 1989년작 <헤밍웨이의 집 2>에는 작가가 생전에 아꼈고, 지금까지도 그 집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고양이들의 생명력이 다정하게 담겼다.
20대의 고단했던 삶 속에서 자신을 일으켜 세운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향한 천경자의 애정은 각별했다. 1987년 마가렛 미첼의 생가를 찾은 그녀는, 작가의 고뇌가 서린 그 초라한 집을 화가 특유의 따스하고 유려한 시선으로 포착해 냈다. 그렇게 탄생한 <애틀랜타 마가렛 미첼 생가>는 문학적 동경과 예술적 숨결이 만나 빚어낸 찬란한 기록이 되었다.
가장 깊은 울림을 준 곳은 에밀리 브론테의 하워스 벌판이었다. 히스클리프가 캐서린의 영혼을 찾아 헤매던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아픈 상처를 씻어냈다. 1981년작 <폭풍의 언덕 2>는 화면 가득 황금빛 물결이 넘실거리지만, 그 속에는 안락함보다 언덕의 잡초처럼 황량했던 화가 자신의 삶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소설 속의 황량하기 그지없던 언덕이 천경자의 그림 안에서 다시 생명을 얻은 것처럼 반가웠다.
천경자 예술의 절정은 단연 여인상에 있다. 그중에서도 <길례언니>(1973)는 화가의 예술 세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처음 <길례언니> 작품을 보고, 그림 속의 눈빛이 이렇게 맑고 청초할 수 있을까 싶었다. 노란 원피스에 꽃이 달린 모자를 쓴 여인의 맑은 눈망울은 오직 이 작품에서만 만날 수 있는 빛깔인데, 이는 화가가 투영한 '청순한 여성에 대한 환상'이 예술로 구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길례언니는 실존 인물이라기보다, 화가가 평생 그리워한 순수한 미(美)의 원형이었다.
하지만 이 청순한 환상은 시간이 흐르며 더욱 깊고 복잡한 여인의 서사로 변모한다.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에서 여인의 머리 위를 똬리 틀고 있는 네 마리의 뱀은, 화가가 22세에 겪었던 지독한 삶의 통증을 상징한다. 뱀은 더 이상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여인의 고독을 지키는 수호신이자 화가 자신의 치열한 생존 기록이 되었다.
이어지는 <고(孤)>(1974)에서는 제목 그대로 뼈아픈 고독이 읽히고, <황금의 비>(1982)와 <어느 여인의 시>(1985)에 이르러서는 그 고독이 찬란한 금빛과 꽃무더기 속으로 승화된다. 금속성이 들어간 눈빛은 이제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강한 면모로 변해가고 있다.
화려한 색채와 장식으로 치장할수록 그 너머에 고인 여인의 눈동자는 더욱 깊은 심연을 드러내는데, 이는 슬픔을 억지로 지우려 하지 않고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정면 돌파하려 했던 화가의 의지이기도 하다.
결국 그녀가 그린 모든 여인은 타인이 아니었다. 시대적 혼돈, 사랑과 이별을 겪으며, 끝내 붓을 놓지 않았던 화가 천경자 자신의 '변주된 자화상'들이었다. 지독한 한(恨)을 슬픔이 아닌 찬란한 색채로 치환해내려 했던 그녀의 집념은, 후의 어처구니없는 위작논란에도 불구하고 삶의 끝자락까지 붓을 놓지 않게 한 유일한 동력이었다.
"꿈은 화폭에 있고 시름은 담배에 있고,
용기 있는 자유주의자, 정직한 생애.
그러나 그는 좀 고약한 예술가다."
- 소설가 박경리
말년에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 93점을 기증하고 뉴욕으로 떠났던 그녀는, 2015년 그 머나먼 타국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화려한 명성이 아니라,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킨 한 예술가의 고고한 기록이다.
서울미술관 전시장 한편을 채운 오지 여인들의 초상은 강렬했다. 화려한 색채 속에 박힌 그들의 눈망울은 단순히 이국적인 풍경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시를 보고 돌아와 책장을 넘기며 비로소 깨달았다. 그녀가 그 척박한 땅으로 떠나야만 했던 이유는 단순한 유람이 아니었음을. 그것은 예술가로서의 화력(畵力)이 다해가는 공포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혹은 다시 태어나기 위한 치열한 몸짓이었다. 그녀에게 여행은 곧 생존을 위한 처절한 여정이었고, 그 길 위에서 만난 여인들은 결국 작가 자신의 또 다른 투영이었다.
다시 1995년, 호암갤러리 전시장 입구로 돌아가 본다. 그녀의 꼿꼿한 실루엣은 단순히 세월이 빚어낸 기품이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전쟁의 상흔, 혼돈과 운명을 고스란히 견뎌야 했던 예술가였다.
사실 이번 글을 마무리하기까지 적잖은 망설임이 있었다. 작품과 평전, 수필집과 영상들을 통해 나눈 천경자와의 대화를 조금 더 아껴두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녀의 치열했던 삶을 몇 줄의 글로 정리하기엔 터무니없다는 나의 미진함 때문이었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관통해 온 시대는 우리가 영화나 소설로 접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처절하고 생생한 현실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직 그녀에 대해 성급히 결론을 내리고 싶지 않다. 천경자라는 거대한 무대는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펼쳐질 준비를 하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머지않아 그녀의 예술 세계가 온전하게 재조명될 날을 기대한다. 거장은 거장답게 세상에 많은 것을 남기고, 또 흘리고 갔다. 이제 나는 그림과 글 속에 흩어져 예술로 승화시킨 그녀의 조각들을 하나씩 찾아 나서려 한다.
결국 슬픔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으로 승화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지독한 한(恨)을 예술이라는 축제로 바꾸어 놓은 그녀의 발자취를 이제 조용히 따라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