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는 질문받는 것이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얼마나 효율적인가,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가.
그래서 쓸모는 언제나 증명을 요구한다.
보여줘야 하고, 설명해야 하고, 결과로 환산되어야 한다.
우리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자 바쁘게 살아간다.
멈추는 순간, 쓸모가 사라질 것 같아서다.
반면 가치는 질문받지 않는다.
가치는 기능이 아니라 존재의 상태에 가깝다.
증명하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고,
설명하지 않아도 유지된다.
가치는 발견된다. 어느 순간,
비워졌을 때,
멈췄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졌을 때 조용히 드러난다.
쓸모는 증명하지만,
가치는 발견된다.
이런 시대에 무용의 가치를 품은 사유원의 등장은 필연적이다.
사유원은 이름 그대로 '사유를 위한 정원'이다. 효율의 세상에서 벗어나 존재의 의미를 묻고 스스로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사유의 정원이다. 1989년 설립자 유재성 회장이 일본 밀반출 위기의 모과나무들을 부산항에서 지켜낸 것이 시작이다. 이를 계기로 수백 년 된 노거수(老巨樹)들이 모여들었고, 나무들의 보금자리를 위해 대구 군위 팔공산 자락에 21만 평의 대지를 마련했다. 이곳은 단순한 수목원을 넘어 현대인이 길을 잃고 헤매며 자신을 발견하도록 설계된 공간이다.
2021년 9월 대중에게 공개된 사유원은 승효상, 알바로 시자, 최욱, 정영선 등 당대 거장들이 참여해 완성한 공간이다. 이들은 지형을 존중하는 건축과 정원을 통해 자연의 일부가 되는 풍경을 빚어냈다. 사유원은 목적지에 이르는 속도보다 걷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무용한 시간의 가치를 지향한다. 이곳의 건축은 땅 위에 군림하기보다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며, 세월에 따라 변화하는 풍경을 그대로 수용한다.
건축가 승효상은 건축을 물체가 아닌 '장소'로 정의한다. 그곳이 본래 가진 이야기를 듣고 요구를 형상화하는 것이 본질이라는 뜻이다.
와사(臥寺)는 깨달음을 얻는 연못 오당의 낙차를 따라 붉게 물든 철판이 접혀 흘러간다. 명상의 수도원이 물 길따라 누웠다 하여 와사라 부른다. 외부를 향한 시선을 거두고 눈을 감듯 내면을 응시하는 장소다. 이곳은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길 수 있는 곳으로, 공연과 명상을 즐길 수 있는 사유원의 대표 건축물이다.
지형을 따라 낮게 스며든 구조는 외부 소란을 차단한다.
비워진 중정에는 하늘과 잔잔한 물줄기만 머문다. 장소는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침묵의 정원이기를 원했다.
사면을 두른 붉은 강판은 산의 색을 닮으며 시간의 흐름을 기록한다. 와사(臥寺)의 백미는 빛과 그림자가 그 안에서 그려내는 수려한 풍경이다. 세상 어디보다 무용한 이 건축적 장치 안에서, 빛은 강철의 면을 타고 흐르며 날카로운 선과 부드러운 면을 번갈아 그려낸다. 시간에 따라 변하는 그림자는 공간 속에 또 다른 공간을 빚어낸다. 내부로 들어가는 순간, 붉은색과 거친 질감 속으로 스며들며, 이 장소가 건축가에게 어떤 요구를 했을지 가만히 생각해 본다.
와사(臥寺)에 들어서면 붉은 강철 마감재가 뿜어내는 강렬한 기운이 몸을 감싼다. 마치 거대한 조각품 내부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생경한 경험은 일상의 감각을 단번에 깨운다.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시선은 내면의 고요를 향하게 된다.
소요헌은 1992년 스페인 마드리드가 '유럽 문화 수도'로 지정되었을 때, 피카소의 거작 '게르니카'를 전시하기 위해 고안된 '아트 파빌리온' 설계안에서 시작되었다. 비록 현지 사정으로 무산되었으나, 거장 알바로 시자는 이 묵직한 서사를 품은 설계안을 사유원의 깊은 지형 속에 다시금 구현했다.
이곳의 이름은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에서 따왔다. '슬슬 거닐며 자유롭게 사유한다'는 의미처럼, 소요헌은 전쟁의 비극을 넘어 삶과 죽음이라는 보편적인 사유로 방문객을 이끈다.
전쟁의 참혹함과 죽음: <게르니카>의 변주 이 공간의 한 축을 담당하는 것은 날카로운 철제 구조물이다. 알바로 시자는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떠올리며 이 장소를 설계했다. 거대한 콘크리트 벽면 사이로 흐르는 빛은 전쟁의 참혹함과 죽음을 상징하는 예술적 배경이 된다. 비워진 공간 속에서 날카롭게 뻗은 선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변주곡이 되어 방문객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생명의 영속성과 치유: <임신한 여인>의 형상화 반대편으로 발길을 옮기면 분위기는 반전된다. 높은 천창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온화한 빛 아래, 매끄러운 백색의 알 형태 조각이 놓여 있다. 이는 피카소의 여인, 프랑수아즈 질로의 임신에서 영감을 얻은 <임신한 여인>의 곡선미를 추상화한 것이다. 부드러운 타원형의 조형물은 모든 상처를 보듬는 대지의 자궁처럼 정적이며, 파괴된 대지 위에서 다시 잉태되는 생명의 경이로움을 웅변한다.
건축으로 완성된 인간사: 어둠이 짙게 깔린 콘크리트 복도를 걷다 보면, 낮은 창을 통해 들어온 한 줄기 빛이 바닥을 가로지른다. 그 빛은 정지해 있던 무채색의 공간에 온기를 불어넣으며, 콘크리트 틈 사이로 피어난 작은 생명들을 선명하게 비춘다. 억제된 빛은 어둠을 더욱 깊게 만들고, 그 깊은 어둠 덕분에 아주 작은 빛조차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곳을 거닐다 보면 게슈탈트 법칙의 '전경과 배경(Figure-Ground)' 원리가 떠오른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육중한 노출 콘크리트 벽면은 스스로를 지워 거대한 배경으로 물러난다. 그 덕분에 벽면을 타고 흐르는 가느다란 햇살, 콘크리트 틈에 뿌리를 내린 풀 한 포기조차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전경이 된다.
무언가의 가치를 선명히 드러내기 위해 배경이 반드시 필요하듯, 우리 삶에도 본질을 지탱해 줄 배경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스친다. 소요헌에서 그 역할을 노출 콘크리트가 맡았다면, 우리 삶에서 진정성을 드러나게 하는 배경은 무엇일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마치 고통과 상처라는 배경이 있어야 평범한 일상의 기쁨이 선명히 빛나는 것과 같다. 비워진 배경이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는 이 역설은 이곳에서 마주하는 사유의 깊이를 더한다.
천장과 벽면이 꺾인 틈 사이로 비껴 드는 빛은 그 자체로 공간의 형태를 규정한다. 무채색의 콘크리트 배경 위로 직선의 햇살이 각도를 그리며 내려앉을 때, 보이지 않던 공간의 깊이는 비로소 그 형체를 드러낸다.
소대(召台)는 '사람을 부르는 언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관람자의 시선을 비트는 장치이다. 알바로 시자가 설계한 이 탑은 15도 기울어진 채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수직과 수평이라는 익숙한 중력의 법칙에서 비껴 나 우리 몸의 감각을 깨우는 도구인 셈이다. 비스듬한 벽면을 따라 몸을 옮기다 보면 풍경을 바라보던 기존의 관성은 자연스럽게 흔들린다.
15도 기울어진 내부 계단을 오르며 몸의 균형이 흔들리는 경험을 한 뒤 정상에 서면, 익숙했던 풍경은 전혀 다른 각도와 깊이로 다가온다. 이는 단순히 높은 곳에 오르는 행위를 넘어, 주변의 자연을 새롭게 발견하게 하려는 설계자의 의도가 담겨 있다. 시자는 기능을 넘어선 이 '무용한 공간'을 통해 목적 없이 걷고 사유하는 '소요(逍遙)'의 정신을 신체적인 경험으로 치환하여 표현했다.
현암은 건축가 승효상이 사유원에 가장 먼저 세운 건축물로, 그의 핵심 건축 철학인 '빈자의 미학'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공간이다. 본래 이곳은 사유원을 조성하던 초기, 설립자와 건축가가 머물렀던 임시 거처이자 현장 사무실이었다. 산야를 일구고 수만 그루의 나무를 심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기 위해 지어진 기록의 장소이기도 하다.
조성이 완료된 지금, 이곳은 방문객이 잠시 머물며 차를 마시거나 팔공산의 능선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는 공간이 되었다. 과거에 사유원의 미래를 설계하던 집무실이 이제는 방문객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사유의 장으로 바뀐 셈이다.
내심낙원은 알바로 시자가 설계한 작은 경당이다. '내 마음속의 즐거운 정원'이라는 이름처럼, 번잡한 세상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는 공간을 지향한다.
겨울의 내심낙원은 그 존재감이 더욱 선명하다. 하얀 눈이 대지를 덮으면 건축물의 백색 외벽은 주변과 경계 없이 연결되며 하나의 거대한 풍경이 된다. 숲의 나무들이 잎을 떨구고 침묵하는 계절, 첩첩이 겹쳐진 하얀 삼각형 지붕은 마치 산의 능선이 이어지는 듯한 리듬감을 보여준다.
내부로 들어서면 밖에서 보았던 지붕의 형태가 높은 천장이 되어 방문객을 맞이한다.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된 정갈한 벽면과 소박한 나무 십자가는 종교를 넘어선 경건함을 자아낸다. 높고 좁은 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공간을 정적으로 채우고, 비워진 자리에 사색의 시간이 고인다. 방문객은 이곳에서 비로소 각자의 마음속에 깃든 낙원을 마주하게 된다.
'바람과 눈을 맞으며 보낸 수천 년의 세월'이라는 의미를 담은 풍설기천년은 사유원에서 가장 역동적인 생명력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이곳에는 수령이 수백 년에 달하는 모과나무 100여 그루가 모여 거대한 정원을 이룬다.
설립자가 일본으로 유출될 뻔한 고목들을 전국 각지에서 수집하여 정성껏 옮겨 심은 것이 이 정원의 시작이다. 굽이진 줄기와 거친 껍질은 그들이 지나온 척박한 시간의 기록과도 같다. 모과나무 사이로 난 산책로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먼 산의 능선과 시선이 맞닿는다.
건축가 승효상은 이곳에 최소한의 철제 담장을 설치하여 지형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공간에 리듬감을 주었다. 계절마다 다른 빛깔로 물드는 나무들과 안개 자욱한 팔공산의 전경은 자연이 주는 경외감을 선사하며 방문객의 마음을 붙잡는다.
지형의 완만한 굴곡을 그대로 살린 산책로는 시선을 지면에서 나무로, 다시 먼 산의 능선으로 자연스럽게 이끈다. 초록빛 잔디와 대비를 이루는 붉은 코르텐강 담장은 공간을 구획하며 풍경의 핵심으로 인도하는 이정표가 된다. 정원 곳곳의 작은 연못은 하늘과 나무를 투영하며 고요한 생동감을 더한다.
어느날 서울 잠수교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4천 5백여명의 지원자 중 80팀을 선발해(무려 57:1의 경쟁력이다) 누가 더 깊은 멈춤에 드는지를 겨루는 ‘멍 때리기 대회’를 구경하기 위해서이다. 무용한 시간이 수면 위로 떠오른 이 뉴스를 접했을 때 내심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경쟁의 대상이자 우승의 조건이 될 만큼, 우리는 멈춤이 간절한 시대를 살고 있다.
'쓸데없이...' 익숙하게 듣고 내뱉는 말이다.
무용한 것을 악(惡)으로 여기던 시절을 통과해 왔다. 효율과 생산성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생산적이지 않은 모든 것은 쓸모없는 시간, 사물, 공간, 사람으로 치부된다.
물론 합리성은 이상적인 기준이다. 하지만 색채의 배색과 음악의 화음이 그러하듯, 수치화된 효율이 삶의 조화로움을 앞서지는 못한다. 때로는 엇나간 불협화음의 소리가 더 깊이 심금을 울린다. 우리 삶 역시 무용한 듯 보이는 조각들이 어우러질 때 비로소 온전한 조화를 이룬다.
이탈리아 현대 철학자 누치오 오르비네( Nuccio Ordine 1958~2023)는 저서 《무용함의 쓸모(L'utilità dell'inutile)》를 통해 이러한 세태를 짚는다.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외면받는 정신적 가치들이, 역설적으로 인간을 풍요롭게 만드는 본질임을 역설한다. 오래전 장자가 말한 무용함의 가치는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한 '일시 멈춤'의 필요성을 다시 일깨운다.
나다운 상태란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누리는 데 있다. 그 시작은 일시 멈춤이다. 멈췄을 때 비로소 보이는 풍경은 이전과 다르다. 그 생경함이 앞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인다.
명정에서 눈을 감고 내면을 응시하며, 소요헌의 묵직한 벽면을 바라보며, 삶의 본질을 드러낼 여백이 필요함을 느낀다. 잠시 멈추면 새롭게 보이고 들린다. 멈춤으로써 사유의 여백을 허락하는 공간, 사유원을 나선다.
비움으로 채워지는 섭리. 사유원은 결국, 나를 만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