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 숲 너머, 기록이 머무는 자리
어떤 도시를 여행하든 박물관부터 찾는 이들에게
경주는 거대한 지붕 없는 박물관이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보유한 도시로,
그 이름만으로도 공간이 지닌 품격을 증언한다.
천년의 유산부터 오늘의 예술에 이르기까지,
이곳은 언제 찾아도 변함없는 품격을 내비친다.
경주에 머물며 살아보고 싶다는 동경을 품게 되는 이유다.
달빛이 부서지는 월정교 위에서 원효와 요석공주가 마주치던 장면을 떠올린다.
그러다가도 새로운 나라를 위해 가문의 운명을 던졌던 김유신 장군의
결단이 서늘하게 스쳐 지나간다.
경주는 이렇듯 낭만과 비장이 층층이 쌓인 도시다.
경주에서 천년의 서사를 지닌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석굴암과 불국사 (1995년 등재) 가장 먼저 가치를 인정받은 곳으로 신라 불교 예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경주역사유적지구 (2000년 등재) 도시 전체에 흩어진 신라의 흔적을 다섯 지구(남산, 월성, 대릉원, 황룡 사, 산성)로 묶은 것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첨성대나 대릉원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한국의 역사마을: 양동 (2010년 등재) 신라가 아닌 조선 시대의 삶의 양식을 보여주는 마을이다. 안동 하회 마을과 함께 등재되었다.
*한국의 서원: 옥산서원 (2019년 등재) 조선 시대 성리학의 교육 기관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전국의 주요 서원들과 함께 등재되었다.
경주는 최근 현대 미술과 건축적 미학이 어우러진 미술관들이 새로운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경주의 미술관들은 관람을 넘어, 땅의 역사와 자연을 공간의 프레임 안에 담아내려는 고민이 엿보인다.
*경주솔거미술관: 경주엑스포대공원 언덕에 자리한 이곳은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했다. 건축물 자체가 땅의 흐름에 순응하듯 낮게 엎드린 형상이다. 자연과 건축, 작품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지점을 발견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
*우양미술관: 보문단지 내에 위치한 이곳은 건축가 김종성이 모더니즘 양식으로 설계했다.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와 석재 마감이 주는 견고함이 돋보인다. 국내외 거장들의 현대미술 전시가 주로 열린다. 야외 조각공원에는 알렉산더 리버만, 장-피에르 레이노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이 배치되어 있어 호숫가 산책로를 따라 예술적 산책을 즐기기 좋다. 경주에서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가장 전문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공간이다.
*오아르(OAR) 미술관: 황리단길 인근에 최근 개관하여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컨템퍼러리 아트 미술관이다. 미술관 바로 앞에 대릉원의 고분군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옥상에서 바라보는 대릉원의 부드러운 능선과 황리단길의 낮고 낡은 기와지붕들이 어우러진 풍경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설치 미술처럼 다가온다.
*국립경주박물관 신라미술관 : 박물관 내에 위치한 이곳은 신라 불교 미술을 주제로 한 전문 미술관이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같은 불교 조각들이 뿜어내는 정적과 품격은 경주가 지닌 예술적 뿌리를 실감하게 한다.
경주로 들어서는 첫인상인 톨게이트는 단아한 기와지붕이 얹혀 경주의 색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기대감과 설렘이 함께 통과하는 순간이다. 나지막한 산과 너른 논밭의 풍경이 낮고 깊은 경주로 안내한다.
톨게이트를 지나 역사의 안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간다.
경주국립박물관 입구를 지나 성덕대왕신종의 울림을 뒤로하고 박물관의 깊숙한 끝자락에 대나무 숲 사이로 좁고 긴 계단이 나타난다. 일상의 소란을 털어내고 정적 속으로 침잠하는 과정이다. 그 끝에서 2024년 국제 건축상을 받은 신라천년서고를 마주한다.
국내 대부분의 박물관 도서관은 본관 내부에 종속되어 있다. 전시실 옆 한 층을 빌려 쓰거나 복도 끝에 자리 잡는 식이기에, 박물관의 부속 시설이라는 인상이 짙다. 반면, 신라천년서고는 본관과 몸을 나누어 별도의 집 한 채로 존재해서 특별함이 있다.
우선 진입의 미학이 있다. 건물이 박물관과 떨어져 있기에 대나무 숲길을 걷고 계단을 내려가는 '전환의 시간'이 생긴다. 관람의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고 사유의 모드로 들어가는 의식이 가능해진다. 다음은 본관의 인파와 소음으로부터 물리적 거리를 두는 덕분에 서고 안의 정적은 박물관 내부 도서관이 흉내 낼 수 없는 묵직함을 가진다.
기존의 도서관들이 유물 곁의 '참고서'였다면, 신라천년서고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다. 본관과 같은 대문을 쓰면서도 기꺼이 홀로 서기를 택한 이 공간의 결단이, 경주를 더 품격 있게 만들었다.
신라천년서고는 본래 박물관의 행정 사무를 보던 노후화된 '서별관'이었다. 폐쇄적이었던 사무 공간이 담장을 허물고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것은 공간의 민주화이자, 지식의 개방을 상징한다. 건축가는 기존 건물의 골조를 살리면서도 목재의 온기와 노출 콘크리트의 견고함을 조화롭게 덧대었는데, 생각보다 소박한 건물이 오히려 친숙하게 내부로 이끌었다.
정면에 자리한 묵직한 석등은 고즈넉한 실내 공간의 중심을 잡는 좌표가 된다. 석등 너머 격자창 사이로 스며드는 자연광은 인공적인 조명이 흉내 낼 수 없는 숭고함을 선사한다.
따뜻한 목재와 거친 콘크리트, 그리고 서까래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천장의 구조는 전통이 현대와 대화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차갑지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무겁지도 않은 그 중간의 감각을 절묘하게 살린 공간이다. 수직과 수평으로 구성된 건축적 뼈대와 사각형의 책들이 어우러져 공간에는 기분 좋은 따스한 질서가 흐른다.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는 서고의 천정은 한옥의 서까래를 현대적인 조형미로 풀어낸 결과물이다. 촘촘하게 배열된 목재들 사이로 깊게 파인 빈 공간은 공간의 호흡을 틔워주며, 그 사이를 흐르는 빛은 단순한 조명을 넘어 공간의 격을 높여준다.
천정 구조물 사이사이로 세심하게 배치된 조명들은 밤하늘의 별처럼 기록의 숲을 비춘다. 격자창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이 서고의 뼈대를 부드럽게 감싼다면, 수직으로 떨어지는 인공의 빛은 공간에 입체적인 깊이를 더한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질서 속에서, 서고는 차가운 도서관이 아닌 따스한 사유의 방으로 거듭난다.
실내를 구성하는 온화한 색채는 재료의 조화에서 온다. 마감재는 나무와 콘크리트가 대부분이며, 종이 또한 책의 형태가 되어 공간의 질감을 구성하는 한 축을 담당한다. 재료의 단순함이 만들어낸 통일감 속에 어딘가 모를 편안함이 흐르고 있었다. 동선마저 절제한 것일까. 서고는 지극히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신라천년서고를 한층 친숙하게 만드는 것은 휴식의 공간들이다. 쏟아지는 햇살을 그대로 받아내는 창가는 여느 카페 부럽지 않은 여유를 선사한다. 한편에 나란히 놓인 등받이 없는 묵직한 스툴은 이곳이 엄격한 열람실이 아니라, 언제든 머무를 수 있는 안식처임을 조용히 일러준다.
그 편안함 속에서 여행자는 비로소 긴장을 내려놓고 공간이 건네는 안도감을 마주한다.
이곳에서 책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다. 벽면을 가득 매운 책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장대한 전시물이다. 주제별로 정돈된 북큐레이션 공간은 도서관의 품격을 박물관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내가 방문했을 때 마주한 주제는 ‘푸른 세상을 빚다, 고려 상형청자’였다.
이곳에 놓인 도록들은 박물관이 품은 방대한 지식을 정성껏 압축해 놓은 요약본 같다. 굳이 책장을 넘겨 텍스트를 읽지 않아도, 서가에 놓인 책들의 표정과 배열을 보는 것만으로도 문화의 깊이가 감각적으로 전해진다. 글자 뒤에 숨어 있던 길고 긴 이야기들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고, 우리는 공간과 유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된다.
로비 한쪽의 세미나실은 유리와 가벽으로 분리되어 사유의 방이 된다. 잠시 머물고 싶어 집어 든 김시습의『금오신화』는 공간의 의미를 완성한다. 조선의 문인이 신라의 고토(故土)인 경주 금오산에 머물며 쓴 최초의 한문 소설을 읽으며 여유를 가졌다.
책장을 넘기다 마주한 서사는 자뭇 파격적이다. 신화라는 외피를 쓰고 있으나 그 내면에 담긴 상상력은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아도 모던하다는 인상을 준다. 산 자와 죽은 자가 경계를 허물고 대화하며, 현실의 틀을 가볍게 뛰어넘는 전개는 신선한 충격을 건넨다. 수백 년 전의 문장이 이토록 동시대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옛사람의 정신과 결연한 태도가 담긴 문장을 신라의 정신을 품은 서고에서 읽는 경험은 숙연하다. 고전과 공간이 시공간을 초월해 대화하는 듯하다. 커다란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낮은 조명 아래 책에 파묻히면, 세상과 단절된 채 역사와 마주하는 몰입의 시간을 갖게 된다.
신라천년서고는 박물관의 도서관이라는 호기심 하나로 방문한 곳이다.
다른 도서관에서 만날 수 없는 서사가 담겨있었고
대나무숲을 끼고 좁은 계단으로 내려오는 길과
2024년 국제건축상 수상에 걸맞은 실내공간까지 호기심을 충분히 채워주었다.
서고를 나서는 길, 대나무 숲길의 정적 끝에서 다시 마주한 석탑은
오랜 세월을 견뎌낸 흔적만으로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박물관 본관이 유물이라는 '실체'를 보여주는 곳이라면,
신라천년서고는 그 실체 뒤에 숨겨진 '서사'를 읽어내는 공간이다.
새삼 내가 서 있는 이곳이 천년의 시간이 건네준 선물임을 발견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HWfyrmVELIU